시험받으시는 예수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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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험받으시는 예수님 1
본문: 막 1:12-13
2020-09-13
지난 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시험받는 장면을 살본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세 가지 시험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해결한 이 세 가지 시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내용입니다.
마귀는 아주 전략적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제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략도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십니다.
(눅4:1)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요르단에서 돌아오시고 성령에게 인도를 받아 광야로 들어가사
(눅4:2)사십 일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그 날들에 그분께서 아무것도 잡숫지 아니하시더니 그 날들이 끝나매 그 뒤에 그분께서 주리시니라.
(눅4:3)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에게 명령하여 그것이 빵이 되게 하라, 하니
(눅4:4)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4:5)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그분께 보여 주며
(눅4:6)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그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내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리라.
(눅4: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경배하면 모두 네 것이 되리라, 하매
(눅4:8)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4:9)그가 또 그분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눅4:10)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대한 책무를 주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니
(눅4:11)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눅4:12)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4: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마치고 한동안 그분을 떠나니라.
13절에서 마귀의 시험의 절차가 끝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네 14절을 보면 시험을 마치고 난 후의 결과로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아주 적합한 결론이 내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눅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시매 그분의 명성이 주변 온 지역에 두루 퍼지니라.
사전 전제 사항
시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내용을 보기 전에
몇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 예수님(인성)
우선 마귀가 예수님께 다가올때 예수님은 배가 고플때 찾아 왔습니다.
육신적으로 약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시면서 슬플때도 있었고 비통할 때도,
고통스러울때도, 목마를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서 배우셨고 성장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인간으로 이 땅에 살면서 경험하셨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자라고 경험하는 장면 뿐 아니라 유혹받는 장면에서도
그분의 신성은 초점의 대상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인간의 입장에서 치르는 시험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당하실 때
그의 신성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인간의 몸으로 이 시험을 치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 가지 강조사항
시작 부분에서 세 가지 부분에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눅4:1)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요르단에서 돌아오시고 성령에게 인도를 받아 광야로 들어가사
1. 성령 충만으로 성령의 통제아래 들어가는 것
세 번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계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을때
성령님께서 예수님께 내려온 것을 보았습니다.
전적으로 성령님의 통제아래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
그리고 성령님에 의해서 인도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따라서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끌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성령의 권능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14절로 가면
(눅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을 입고 …
3.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사용하게 되는 것
예수님은 지금 성령님의 권능을 입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시험을 통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특성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취한 인간의 특성은 유혹받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승리의 열쇠
이 세가지 강조점을 통해서 우리가 승리의 열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 충만으로 성령의 통제아래 들어가는 것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사용하게 되는 것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길때 사용하신
그 동일한 성령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도움을 얻게 될 것이고
동일한 승리를 취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승리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공적인 사역 전에 치르는 시험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이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입기 위해서
이 시험을 통과해야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을 입고 공적인 사역을 해 내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이 당한 고난과 시험은
그분이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저지른 일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1. 제사장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 자신이 희생물이 되어 드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히4:15)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이 말씀이 전하고 있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경험해 보시고 이제 마귀의 유혹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아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으로 겪고 있는 시험이 무엇인지 몸소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기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갈 것이니라.
우리가 이런 분을 구원자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이 우리의 모든 약한 점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침례를 받으시는 예수님(마태복음)
(마3:13) ¶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마3: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마3: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사건 후로 예수님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갑니다.
침례를 받으시는 예수님(마가복음)
(막1: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 오사 요르단 속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막1:10)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들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시더라.
(막1:11)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1:12) 성령께서 즉시 그분을 광야로 이끌고 가시니라.
“즉시” 광야로 이동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침례를 받자마가
광야로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침례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임을 인정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사람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확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아주 영광스러운 시간이 된 것입니다.
요르단에서 광야로
그리고 요르단 강에서의 사건은
예수님을 광야의 시험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축복이 부어지가
곧바로 예수님은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은 모든 영광가운데 높여졌지만
광야에서는 어려운 상황으로 끌려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전에는 하늘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광야에서는 마귀의 음성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귀와의 한 판 전쟁을 치르는 순간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시험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모든 일이 주님으로 인해 기쁘고
모든 일이 잘 풀릴것 같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주님과 깊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갑자기 광야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공허한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사탄의 공격과 고난만이 주어집니다.
주님이 주시는 축복에서 마귀의 시험으로 바뀌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험이 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적이거나 불경건한 삶을 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 한 순간도 거룩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한 순간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순간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험당하셨습니다.
우리고 가장 경건하고, 순종적인 순간에 있다가도
곧바로 최악의 시험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힘들어지는 것은 축복과 승리
다음에 오는 시험을 맞이할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좋은 것 같고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갈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행복하게 잘 마무리 되었다고 방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시험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이 없는 곳으로 데려다 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시험을 제거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행히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기에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광야에 우리 혼자 서있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홀로 감당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돕기 위해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요르단 강에서 이미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내려온 것은
광야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예수님께 내려오신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앞서십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보다 앞서시면서 함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을
이미 요르단 강에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을 이기고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장착해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고 싸우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떻게 구할지 아시는 분
(벧후2:9) 주께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시험들에서 건질 줄 아시고 또 불의한 자들은 심판의 날까지 예비해 두사 벌할 줄 아시되
우리는 시험이 오면 근심에 빠집니다.
“어떻게 이 시험을 견뎌내지?”
“내가 이 시험을 어떻게 싸워야 이길 수 있지?”
주님은 우리가 시험에서 어떻게 해야 건짐을 받을 수 있는지 아십니다.
우리는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권능의 하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할길을 내 주시는 주님
(고전10:13)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님을 통해 피할길을 만들어 주신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피할 길을 만들어 놓으시고
성령님과 함께 모든 시험을 감당케하시는 것입니다.
정면 승부하시는 주님
주님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시험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시험을 비껴나가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험을 정면으로 부딪혀서 이기게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신 것입니다.
시험의 내용으로 좀더 들어가겠지만
우선 시험을 받고 있는 장소에 대해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소는 광야입니다.(구약:동산 /신약:광야)
외지고 척박한 땅에서 굶주림의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처음으로 인간이 유혹을 받은 장소가 동산이었고
신약을 여는 자리에 한 인간이 광야에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두 아담이 마주한 시험에 아주 중요한 비교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사점>
둘 다 시험을 받았다. 둘 다 마귀에게 직접 시험을 받았다 둘 다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시험을 받았다
예수님은 아담이 시험을 받은 당시와 동일한 상태에서
시험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차이점>
물론 두 상황에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금지된 음식 / 금지된 방법 동산에서는 금지된 음식을 먹으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는 금지되지 않은 음식을 금지된 방법으로 먹으라고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소/ 척박한 장소 아담은 아주 완벽하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그곳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최고의 안락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은 장소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쉴만한 장소가 아니었고 형편없는 장소였습니다.
모든 시험을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장소였습니다.
풍족한 상태 / 굶주린 상태 아담은 먹을 것이 풍족한 상태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40일간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동산이 주는 모든 축복과 편안한 환경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열매를 먹어야하는 유혹에 직면한 것입니다.
먹을 필요도 없는 것을 먹으라는 유혹을 받고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들짐승들이 주변에 놓여 있는 황량한 광야에 놓여 있었습니다.
굶주린 상태에서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음식을 거부합니다.
거부한 이유는 취하는 방법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부하고 승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너무도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고
마귀는 예수님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 되셔서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자신을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실패한 그 시험에서 성공하셨고
아담이 넘어진 곳에서 넘어지지 않고 서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잃어 버린 것을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사복음서의 기록상태
광야에서의 시험은 세 권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눅가복음 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단 두 절로 굵직하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나름 세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혹받으실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인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복음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게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는 시험의 과정을
조금 순서를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정욕을 공격하는 마귀
누가복음은
창세기 3장에서 이브가 유혹받았던 순서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 순서는 요한일서 2장에 기록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나타내는
묘사가 들어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정욕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했던 것을 봅니다.
육신의 정욕 : 먹기에 좋고 안목의 정욕 : 선악과의 나무를 보는 것/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움 이생의 자랑 : 이 열매가 이 여자를 지혜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 : 이 돌에게 명령해서 빵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안목의 정욕 : 세상의 왕국을 예수님께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이생의 자랑 :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라고 합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마귀의 전략은 바뀐것이 없습니다.
마귀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험할 수 있겠지만
이 세 가지 정욕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아담을 넘어뜨렸습니다.
이 방법으로 수 많은 아담의 후손을 넘어뜨려 왔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이 방법으로 예수님도 넘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어떻게 마귀를 이길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혹에 대해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광야 시험의 의도
이 시험은
마귀에게는 예수님을 끌어내리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해 예수님을 더 강하게 만드는데
그 의도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했던 그 시험을 통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귀사이에 경쟁이 붙은 것입니다.
빛의 아들과 어둠의 권능이 대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내용을 보면…
(눅4:2) 사십 일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그 날들에 그분께서 아무것도 잡숫지 아니하시더니 그 날들이 끝나매 그 뒤에 그분께서 주리시니라.
40일간 예수님은 광야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습니다.
마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 예수님을 마귀가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뜨리기 가장 적합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견디기 힘들정도로 배가 고플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40일간 마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금 절실하지 않은 여러분 앞에
갈비를 놓고 시험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몸에 있는 에너지는 모두 사라지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때 마귀가 세 가지 시험을 들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시험이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3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눅4:3) 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에게 명령하여 그것이 빵이 되게 하라, 하니
배고픔을 공격하는 마귀
배고픔은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이 욕구를 채우도록
몸의 욕구가 강하게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 안에서 생기는 욕구인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네 주린 배를 채워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내가 보니 네가 먹을 것이 없구나.”
마귀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입증해 보거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면
더이상 굶주리기 않아도 되지 않겠니?"
예수님의 신성을 사용하게 만들려는 마귀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가자고 있는 힘을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현재 인간이기에 갖고 있는 약점을 이용해서
그의 신성을 사용하도록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교활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돌을 빵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뭐 그렇게 큰 죄가 될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먹거리를 만들 능력 뿐 아니라
수많은 군중을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먹을 것을 만드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배고픈 군중을 먹이는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은
예수님이 굶주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모든 것을 비우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고 계획인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나는 아주 합당한 욕구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채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굶주림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마귀가 제안하는 방법으로 욕구를 채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제안과 설득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제안하는 방법은 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겸손하게 섬기는 종으로 이땅에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명성을 알리는 것에 관심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어떤 특권도 사용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선을 넘어서는
신성을 사용해서 어떤 능력이나 자원을 동원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을 사용하길 거부하십니다.
자신의 백성에게 주어진것과 동일한 능력만을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신성을 사용해서 배고픈 욕구를 채우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아담에게 사용했던
먹는 것과 관련된 시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아담처럼 실패하기를 원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도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 했던것 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너무도 쉬운 능력
마귀가 예수님에게 요구했던 것은
엄청난 능력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먹을 빵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구에는 일종의 조롱이 들어있었습니다.
마귀의 명령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배가 고프다는 것이냐?”
“네 아버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로 먹이신 분이시다.”
“도대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배가 고프다는 것이 말이 되냐?”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라는 요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뭔가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분의 삶을 주관하시는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하나님인지 마귀인지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분이라고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가? 자신을 더 신뢰할 것인가?
광야에서의 시험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런 믿음에 금이 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빼앗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고 있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구원자가 되도록 유혹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신적 능력을 사용해서 스스로를 구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서
하나님에대한 전적인 신뢰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번 실패하고 걸리는 함정인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망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욕구를 성취해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밤새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요일에 교회 나가지 말고 공부하고,
성경책 덮고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서울대가고 카이스트 간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잘나서 내 자식이 잘나서 간거라고 스스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육신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기를
주님은 예수님과 함께 못박은 자신을 더이상 의지 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지속적으로 싸워야할 영적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이미 죽은 자신을 더이상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물로 드리는 좁은 길을 버리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로 죽어가는 길을 택하게 만듭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설득력 있게 유혹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주장은 꽤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그 진위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험은 마귀가 나를 하나님의 뜻에서,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구나!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주로 섬길 것인가?
시험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내가 누구를 섬길 것인가 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매번 시험이 닥쳐오고 결정을 해야할 순간에
우리의 마음은 내가 누구를 주로 섬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살 것인가?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으로써의 삶을 드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전적인 순종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택할때
그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취해야할 그 길을 온전히 순종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를 이땅에 보내신 목적입니다.
마귀는 십자가 없는 왕이 되라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고통받지 않고 메시아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갈 필요없이 왕이 될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시험은 예수님께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이기지 못하게 만드려고 합니다.
그것이 마귀가 계속 공격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대응 방식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그리고 말씀
예수님이 마귀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식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거절이 예수님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눅4:4)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주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논쟁이 없습니다.
마귀는 "만약"이라는 가정으로 질문과 공격을 한 반면에
예수님은 가정이 없이 명확하고 확고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이 믿고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씀의 인용 뿐 아니라 순종까지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의 원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우리는 또 한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과 동일한 인간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초자연적 능력으로
이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이 사용하셨던 동일한 성령님이 있고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마귀로부터 지킬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공격하면서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을 읽던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의 머리 속에, 마음속에, 말씀이 넘쳐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가지 시험을 받으시면서 인용한 말씀은
모두 신명기에서 인용하고 계십니다.
(신8:3)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지 않아도 될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해야 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긴 세월을 훈련시키고 가르치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민족을 겸손하게 만들필요가 있었던 것입니
그래야 이들은 자신의 말씀으로 가나안까지 이끌어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약성도들도 모두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육신적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배우고 따라야만 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예수님도 동의하고 인용했던 말씀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요4:31) ¶ 그 사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잡수소서, 하거늘
(요4:32)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하시니
(요4:33) 그러므로 제자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그분께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는가? 하매
(요4: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의지하고 순종하고 헌신했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데에 동의하고 머리로 수긍은 하지만
실제로 필요한 순간에 우리는 그 말씀을 붙든 일에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낙담하고 슬프고 육신적인 욕구가 넘쳐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 더디고 힘들다고 느낄때
마귀가 여러분에게 속사이는 것입니다.
"이 돌로 빵을 만들어봐”
“네가 필요한 것은 네가 만들어서 쟁취해야지”
“언제 말씀대로 다 지키면서 할 수 있겠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거야.
그 말씀 없어도 네가 스스로 얻을 수 있잖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한가?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부분은
과연 하나님 한 분만으로 우리가 충분한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양식만 취하라고 한다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양식과 하나님이 함께 주어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양식은 없고 하나님만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견디실 수 있을까요?
지금 예수님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가 바로 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정해야 합니다. / 우리도 결정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에게 충분한 것인지
예수님은 이문제에대한 답을 “그렇다”라고 이야기 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40일간 더 먹을 음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만을 섬기고 그분만을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항상 동일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신성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끌어 주셨던 성령님도
그분이 인용하셨던 말씀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야 할 우리의 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