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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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회 수련회를 끝나고 일찍 종료가 되어서 이렇게 봉사회 모임을 참여하게 되어서 너무 감사의 시간이 됩니다.
오늘은 잠언을 묵상하다가 같이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준비했습니다.
(잠언17:24)말씀을 보면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이 말씀을 중점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누구십니까? 우리가 잘알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명철한 자의 앞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찾겠습니다.
잠언 14:6 “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연결되는 말씀인데요.. 명철한 자가 지식 얻기가 쉬운 이유가 무었입니까?
명철한 자 앞에 주님이 계시니깐 얻기기 쉬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다들 잘 알고 있듯이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어디에 더 가까이 계실까요? 그것은 사랑하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119:151 “151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때가 너무 많이 있는것 같습니다.
나와 가까이 계시는데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떨때 나타나셨습니까?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고 있을때 돌 베게를 배고 자고 있을때 주님이 꿈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나 야곱이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창세기 28:16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같이 동행하고 있는데 내가 깨닫지 못했구나..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한가지의 생각하고 있는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지금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얼릉 피해야겠다.. 그러한 생각만 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럴때 70~80km를 걸어나고 피곤하여 곤히 자고 있을때 하나님이 나타나신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거죠.. 아 나랑 항상 같이 있는 거구나! 내 옆에 계시는 구나 그것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또한 도와 주심을 깨달을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같습니다.
사도행전 17:26–28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우리는 내가 어렵고, 내가 힘들고 할때만 주님을 찾기 때문인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고 우리는 누굴 힘임어 기동하며 사는 것입니까? 주님을 하나님을 힙임어 기동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없이 살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 사는 곳이 있을수 있을까요?
한곳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생명도 있는 것입니다.
욥기 12:9–10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줄을 알지 못하랴 10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생명의 원천은 주께 있는것입니다.
그러니깐 갑작스러운 죽음도, 아직도 취하지 않은 죽음도 다 누가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또한 우리의 생명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있는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항상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항상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요? 주님과 가까이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죄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가까이 하고 항상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살아야 할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주님이 내곁에 왔을때 붙잡을수 있고 놓지 않아서 축복을 받을수 있는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러 인물이 나옵니다. 붙잡을때 잘 붙잡아서 축복 받은사람들이요
정탐군 둘을 영접한 라합이 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 2:8–14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14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만약 라합이 정탐군을 숨겨주지 않았다면 영접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라합을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을것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때 같이 죽는 운명이 될것입니다.
이 정탐군을 숨겨줌으로 말미암아 목숨도 건지게 되었고 라합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증조모가 되는 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을 영접한 많은 인물중에 삭개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눅19:1-10)중에 누가복음 19:5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 삭개오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의 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부자였는데 마음이 곤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이 컷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어떻습니까? 열망을 마음에 품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열망이 식었습니까?
삭개오는 딱 한가지의 열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보고싶다라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키가 작은 부자 삭개오는 체면을 무릎쓰고 뽕나무 위에 올라간것입니다.
왜 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을가요? 그것은 바로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았을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삭개오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던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는 주님이 한마디 던집니다.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을 들었을때 삭개오는 이 기회를 잡아야 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치게 된것입니다. 삭개오는 보고싶은 갈망이 있었기에 내려오는 것도 급히 내려와서 즐겁게 영접했다고 말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수 있을때에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 될수 있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축복일수 있는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중에 우리가 구원받은것을 돌아보시면 어떻습니까? 그때 아니면 구원받을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요? 아닐것입니다. 그때가 가장 주님을 만날수 있는 기회였을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분들은 그 기회를 잡은 분들입니다.
시편 24:7–10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이 성경의 구절은 여러 해석이 나올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한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복음을 받아 들이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문들에 주님이 들어가신다는것입니다. 그것도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는것입니다.
구원은 주님을 마음의 문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자은자라 할찌라도 영접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영접이 나중에 큰 상이 되어서 돌아올것입니다.
마가복음 9:37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한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형제 자매님을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님을 영접해야하는것입니다.
마태복음 25:35–40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수 있을때 영접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영접이 그 형제 자매님의 마음을 돌릴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할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는 명철한자의 앞에 있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 우리 바로 앞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접하는 것이 명철한자인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항상 우리와 교제 하고 싶어 하십니다.
항상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신앙이 회복되지 않은 분들은 계속 해서 주님이 문을 두드리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시고 잡아주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니깐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고 있을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영접해야합니다.
삭개오도 지나가고 있을때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10:46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그리고 소경 바디메오도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을때 크게 외쳤지 않습니까? 그냥 지나갈수 있는데 그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소리치지 않았냐는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나의 마음의 방에 들어오려고 하시고 같이 교제하자고 할때 우리의 마음의 방들을 열어 주셔야합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 주님이 역사하는 그곳에 우리는 동참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
주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계신곳 주님이 역사하고 있는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잠언 17:24 “24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명철한자는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항상 우리는 명철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지혜로 모든것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물어보는 삶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