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9. 찬양팀 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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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시편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은 오늘날의 찬양곡과 같다. 시편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되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시편은 히브리어 מִזְמוֹר(mizmôr)를 번역한 말인데, 이 מִזְמוֹר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 זָמַר (zāmar)의 뜻이 바로 “찬양하다”, “악기를 연주하다”이다.
또한 표제를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찬양팀에게 특히!
시편 11편의 표제를 보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다. 당시 시편을 사용하는 배경에서도 오늘날처럼 찬양을 인도하는 자가 있었고, 그의 인도에 따라 함께 시편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뜻이다.
시편 4, 5, 8, 9편의 표제를 보라. 각기 “현악에 맞춘 노래”, “관악에 맞춘 노래”, “깃딧에 맞춘 노래”,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다. 현악과 관악이라는 말은 아마도 악기 구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깃딧, 뭇랍벤 같은 것들은 사실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한데, 아마도 당시에 사용하던 곡조나 음악의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로는 발라드로 갈게요, 셔플로 갈게요, 보사노바로 갈게요 정도 되지 않을까?
많은 구약의 백성들이 이 시편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교회의 전통에서도 꽤 오랫동안 이 시편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렇듯 수천년 동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때 찬양곡으로 사용된 시편, 이 시편의 가장 두드러지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바로 다윗이다.
시편은 총 150개가 한 권으로 묶여 있다. 그 중의 무려 절반 정도가 다윗이 지은 시편이다. 갯수로 하면 73개이다. 또한 다윗 자신이 임명한 찬양대장인 아삽의 시편이 12개, 고라 자손의 시편이 10개, 헤만의 시편이 1개, 여두둔의 시편이 1개로 총 24개이며, 다윗의 아들 솔로믄의 시편이 2개이다. 그리고 무명의 시편 중에 거의 확실히 다윗의 시편이라 할 수 있는 시편이 또 5개가 있어서 다윗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시편의 갯수만 102개이다. 이정도면 압도적인 영향력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찬양곡의 갯수 뿐만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전문적인 찬양대를 훈련하여 조직한 것, 그리고 그들을 통해 늘 회막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24시간, 365일 끝없이 이어지게 했던 것 등을 생각해보면, 예배에 있어서 다윗의 영향력은 정말 전무후무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물론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참 마음에 들어하시고 그를 사랑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다윗의 별명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렸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으면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참된 예배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셨겠는가?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도행전에서는 이 예언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질 참된 예배가 회복될 것인데, 이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모든 열방들이 드릴 예배이며, 마치 다윗의 장막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다윗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하나님은 그토록 다윗을 크게 사용하셨는가? 그가 꿈꾸던 예배에는 어떠한 모습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회복될 참된 예배가 다윗의 장막과 같을 것이라고 하시는가?
오늘은 다윗에게 있었던 예배자의 마음, 그의 고백을 통해 나타나는 그의 중심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광야는 다윗이 피난처라는 단어의 의미를 발견한 사전이었다고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광야가 없다면 피난처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광야에 아무 도움도 없이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는 피난처를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다윗이 처음에 정한 피난처는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곧 배웠습니다. 우리도 수없이 많은 이런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사 우리의 참된 피난처는 바로 하나님, 그 선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십니다. 다윗이 발견한 피난처의 뜻은 거의 다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피난처는 원래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점차 장소보다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뀌게 됩니다. 광야에서 경험하고 맛보고 알게 된 하나님의 선하심은 다윗으로 하여금 유일한 피난처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평생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광야는 다윗을 하나님께로 더 깊이 인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