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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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views믿음의 정의와 예배를 통해 나타나는 믿음 있는 자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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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는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명시적 지식은 우리가 보통 지식이라고 부르는 머리로 배우는 지식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실의 암기, 수학, 과학과 같이 논리적 추론을 이해하는 지식입니다. 암묵적 지식은 반복적인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체득되는 지식입니다. 젓가락질, 골프, 예체능, 영어와 같은 외국어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암묵적 지식도 처음에는 명시적 지식을 통해 배우고 많은 반복을 통해 암묵적 지식이 됩니다. 예를 들어 처음 야구를 배우는 사람은 어떻게 공을 던지는지 배웁니다. 배운 것을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복된 연습을 통해 암묵적 지식이 된 후에는 이전에 생각하던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게 됩니다. 프로 야구 선수는 공을 던질 때 어디에 던질지를 생각하고 던질 뿐입니다. 발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딛고, 손은 어깨 위로 들어 눈가를 스치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공을 던지는 일은 이미 암묵적 지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암묵적 지식은 배우기가 무척 힘듭니다. 오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르치기도 어렵습니다. 암묵적 지식은 본인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식의 세계에서도 두 가지 다른 지식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여기에 하나 더 영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지식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 보겠습니다.
눅 10:21-22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특정인에게만 이 지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지식을 특정 사람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일반 지식과 다른 영적인 지식입니다.
암묵적 지식이 명시적 지식과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영적인 지식은 일반 지식과 다릅니다. 영적 지식은 배워서나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계시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계시를 통한 깨달음은 곧 순종의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던, 계시를 통한 깨달음이었던 회심을 생각해봅시다. 그때 깨달음으로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계시를 통해 영적 지식을 얻으면 바뀝니다. 영적 지식은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영적 에너지와 비슷합니다. 성경적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영의 양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 지식과 일반 지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계시로 깨닫게 된 영적 지식이 있고, 더불어 설교나 강의, 신앙 서적을 통해 배우고 정리한 일반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영적 지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실재 믿음은 없고 일반 지식만 남게 됩니다. 머리에 지식은 남아있습니다. 영적 지식의 형태인, 영적 지식의 겉모습과 같은 일반 지식이 남아있기에 아직도 영적 지식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은혜를 구해 영적 지식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실재 믿음은 사라졌는데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믿음이 사라졌다고 할 때 내면에 믿음이 소멸되어 완전히 없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씨는 있으나 불이 꺼진 상태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 안에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착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믿음의 선진들의 삶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려면 나의 삶이 이들의 삶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과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지금은 온전하지 못해도 믿음이 자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재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생명에 속한 열매가 삶에 맺혀져야 합니다. 믿음은 영적 실체이기에 우리 안에 변화를 만들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사야에서 영적 지식은 사라지고 일반 지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이들에 대한 예가 있습니다.
사 1:10-14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거라,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아무 유익도 되지 않는다.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 내가 요구한 적이 없다. 심지어 내가 그 제물을 가증히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월삭, 절기가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고,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기에 견딜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의 예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배운 데로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배운 지식만 있을 뿐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지식이 없었습니다. 영적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며 행한 것이 하나님을 오히려 노엽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납니다. 저는 매일 기도하고 말씀 보며, 사역하다 보니 내가 하나님의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심이 변질되고 예수님께 멀어진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신앙 행위 가운데 안일하게 평안하다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저의 실체를 보여주십니다. 높아진 마음, 식어진 열정, 작아진 믿음, 영감이 떨어진 기도, 계시가 줄어든 말씀, 인내와 용납에 인색해진 성품 등 많은 지표가 저의 영적 고갈을 말해주는데 깨닫지 못하다 하나님의 비추심으로 보게 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다시 중심을 바로하고 하나님을 구합니다. 믿음이 회복되고, 잃어버리고 사라진 영적 지식과 능력이 회복됩니다.
여러분 믿음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실재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실재 믿음은 사라졌는데 믿음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정의한 곳입니다. 믿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 본문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믿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실재 믿음이 맞는지 확인해봅시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사실 1절 말씀을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이 어떤 일은 한다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처럼 ‘믿음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바라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실상이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소원하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소원입니다. 믿음은 우리 마음에 두신 하나님의 소원이 실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 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에 소원으로 두십니다. 우리 마음에 두신 하나님의 뜻, 우리의 소원은 믿음으로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우리에게 약속된 것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천국, 약속의 말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등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천국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의 말씀이 이루질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절대 개념이 아닙니다.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실재하는 영적 실체입니다. 내 안에 영적 실체인 믿음이 바라는 것을 실상이 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줍니다. 각자 믿음의 크기도 다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신 것처럼 믿음의 크기가 모두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힘들게 괴로워하며 간신히 견디며 하는지, 다스리고 정복하며 풍성한 응답을 누리며 넉넉하게 하는지는 믿음의 크기에 달려있습니다. 오늘은 믿음 자체의 유무에 집중하려 하기에 이 부분은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실재 믿음이 있다고 말하려면, 여러분 마음에 두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고 있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천국 소망이 살아있는지, 하나님이 의식되는지, 예수님이 느껴지는지,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지, 자신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여러분에게 실재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3절: 믿음의 예를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아니니!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 본적 없는 것, 천지 창조의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신 것을 본 적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데 믿고, 압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이런 일을 행합니다.
2절: 선진들이 이로써,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습니다. By faith입니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믿음이 그들 안에서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하나님의 약속의 변치 않음을, 본향이 있음을,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했고, 그래서 선진들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믿음의 증거로 믿었습니다.
이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했으니 믿음의 실례를 볼 차례입니다.
첫 번째 예로 들은 사람이 아벨입니다. 아벨은 성경에 기록된 첫 순교자입니다. 아벨은 그의 형 가인에 의해 들판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한 예로 아벨의 예배를 말씀합니다.
4절:
아벨이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증거하는 첫 번째는 믿음으로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형식을 갖추어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창4: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예배입니다. 아벨과 가인의 예배인데 둘이 드린 예배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둘의 차이는 여러 가지이지만 예배와 관련된 차이만 주목하겠습니다. 4-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과 가인이 차이가 있었고,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땅의 소산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첫 것은 귀한 것입니다.
민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아벨은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제물에서 아벨은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제물 뿐 아니라 아벨과 가인에게도 차이가 있습니다. 7절 말씀에서 가인이 평소에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던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벨은 선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가인의 삶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고, 아벨을 받았다는 것은 아벨의 삶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그의 삶이 악했고, 아벨은 하나님 앞에 그의 삶이 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을 믿었기에,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분 하나님께 대한 증거를 얻었기에,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믿었기에 그분 앞에서 선을 행하기를 힘썼습니다.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증거로 받아 알기에 귀한 것을 드립니다. 말라기에 기록된 제사장들은 믿음이 없었기에 하나님께 흠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삶을 살핍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기를 힘쓰고, 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회개하므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아니라 우리 몸으로 행한 삶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아벨과 같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립니다.
더불어 본문에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함께 의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린 사건을 통해 의로운 자의 증거를 얻었다고 하십니다.
믿음의 예배와 의인의 증거와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의인의 증거는 하나님의 백성의 증거이며, 구원의 증거이며, 천국의 시민권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벨에게 의인의 증거를 주셨다. 그분은 믿음의 예배를 드리는 자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아벨이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증거하는 두 번째는 믿음으로 드리는 진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해 증거하셨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벨에 예물에 대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주시기 전이었습니다. 아벨은 어떻게 제사법에 기록된 방법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통해 깨달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첫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맏아들 되신 예수님을 제물로 삼으실 것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소, 양, 염소의 제물은 모두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중에 양은 그 천성으로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잘 보여주는 동물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속죄제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모든 제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에 대해 증거하셨다는 것은 아벨이 드린 제물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이라는 것,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온전한 제물이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벨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인 믿음으로 약 4000년 후에 있을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어린 양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인 어린 양을 그의 믿음에 따라 예수님의 보혈로 보시고 받으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저 양 새끼, 가치로 따지자면 30만원 안팎되는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예수의 보혈을 하나님께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해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속죄제물과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분께 복을 얻어야 합니다.
아벨이 믿음에 대해 우리에게 증거하는 세 번째는 믿음의 삶은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에 의해 죽었습니다.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삶이 허무하게 보입니다. 아마 그는 결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내 뿐 아니라, 자녀에 대한 언급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이에 형제에게 죽은 것인데,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허망한 삶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삶,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린 삶으로 인해 성경에 기록되어 지금도 믿음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내적인 것이지만, 내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겉으로 드러나며 증거합니다. 나에게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고 그로 인해 세상에 믿음이 무엇인지 증거합니다.
아벨 뒤에 열거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삶이 증거가 되어,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 후대에 속한 우리 뿐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앞서 지나간 모든 이들에게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믿음이 우리로 믿음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것이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건,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 같은 순종이건,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건, 믿음은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부분에서 증거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증거로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증거, 사랑을 나타내는 증거, 어두운 세상에 어두움을 드러내는 빛으로, 맛이 없고 거짓된 맛으로 가득한 세상에 참된 맛을 나타내는 소금으로, 그렇게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 삶은 어떤 부분에서 증거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믿음의 있다는 것은 그저 설교 시간에 들은 내용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 매주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빼 먹지 않고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봉사에 참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믿음이 있는 자들의 삶에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믿음의 삶을 이것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것들로 믿음이 있고 없고, 믿음으로 살고 아니고를 측정한다면, 52주 예배에 빠지지 않는 사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절에도, 이슬람 사원에도 넘쳐납니다. 그런 것으로 믿음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지식과 믿음의 차이를 구별하십시오. 믿음에 대한 머리의 지식과 실재 믿음을 구별하십시오. 내 안에 믿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순종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길을 걷게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립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 받으실 희생예물, 예수의 보혈을 드립니다. 믿음이 있으면 삶에 믿음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게 실재 믿음이 있는지 살피고, 실재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