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음 9: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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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은 쫓겨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달랐습니다. 소외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없어도 되는 존재로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소외 된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듣고 그를 찾아 병 고침을 받았다는 많은 기사가 있지만 여기 소개된 맹인의 경우는 그저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베스트 셀러인 ‘강아지 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느날 강아지가 골목길에 똥을 누고갔고 자기가 똥이라는 사실에 슬퍼할 뿐만 아니라 참새, 어미닭은 더러워서 피했지만 흙덩이는 사과하고 격려를 해줬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을 맞고 봄비가 내리더니 파란 민들레 싹이 자라나 거름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거름이 되고 이런 희생으로 민들레는 아리따운 하나의 꽃을 피우며 기뻐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강아지똥조차도 그 쓸모가 있다는 말은 쓸모없는 듯 취급받는 소외된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뛰어 넘지 못할 벽을 만들지 않습니까? 앞서 살핀 것처럼 제자들 조차도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장애를 ‘죄’로 인식했습니다. 실로암 못 근처의 망대를 쌓다 무너져 죽은 13사람의 죽음도 죄 때문에 천벌을 받았다고 하는 인식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티비 어느 프로에 국내 자폐 스펙트럼의 권위자인 의사가 출연해 하는 말이 자녀가 그런 경우 대다수의 부모는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내가 무슨 전생에 잘못이 있다고’ 하면서 전생까지 들먹이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이런 식의 구분은 가장 쉬우면서도 나와 너를 구분하기에 제일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편을 나누기가 제일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양분되어 서로를 헐뜯지만 그럼에도 올바른 정치인이라면 이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를 정제하고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죠. 반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들이 갈등을 조장하고 더욱 선명하게 양분하려는 위선적인 태도의 뿌리에는 자기의 이익과 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 유대인들과 엘리트 층인 바리새인들은 ‘너는 죄인’ 이라는 구분을 통해 자신들을 ‘의인’이라는 그룹으로 나눴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누가복음 18:11–12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더 이상 쫓겨날 곳이 없던 맹인의 회복을 기뻐한 사람은 요한의 글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모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은 예수께서 그를 새로운 공동체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를 만난다고, 안다고 모두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서 오랜 시간 요한복음을 들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적의 당사자가 되어도, 기적을 눈으로 보아도, 심도 깊은 토론에 참여하고 자신의 질문이 해결되었다고 해도 더 나아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고 해도 ‘믿는다’는 것과 거리가 멀 수도 있다는 것이죠.
잠시 우리는 그렇게 쫓겨난 맹인을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지난 시간 맹인은 예수께서 침을 발라 바른 진흙이 눈에 묻은 채 실로암까지 ‘바로’ 갔고 눈이 밝아졌으며 다시 예수를 찾으러 올라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반기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를 쫓아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물론 이것이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쫓겨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기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났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오히려 성전 근처에서 구걸을 하며 삶을 영위했던 때가 그리웠을까요? 아니면 이보다 더 큰 일 즉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예루살렘에서도 쫓겨날 수 있다는 현실적 고민을 했을까요?
35절의 시작은 우리 말에 ‘예수께서’라고 시작할 때 주 동사인 ‘들으셨다’ 로 시작을 합니다. 직역을 하면 들으셨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를 쫓아 낸 것을 로 해석됩니다. 이어진 문장인 ‘그가 찾았다 그리고 말했다’ 인데 여러분의 호기심을 위해 ‘네가 인자를 믿는냐’ 라는 문장에서 어떤 단어가 먼저 나왔을까요? ‘믿느냐’ 라는 동사가 먼저 나왔을 것처럼 보이지만 ‘네가’ 입니다. 35절의 시작이 ‘들으셨다’는 예수의 동작은 주어인 예수보다 앞에 기록되어 들으신 상황이 더 중요한 것을 나타내듯 여기 ‘네가 믿느냐’는 질문에 중요한 것은 바로 ‘너’ 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체는 예수이시지만 이것을 기록한 목적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새로운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육신의 눈을 고치셨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눈이 보배라는 말은 ‘눈의 구실 즉 눈썰미 있는 기능이듯’ 우리는 눈으로 본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본 것이 과학적 근거를 넘어서 마음을 움직여 ‘믿게’ 합니다. 그럼에도 요한은 그런 믿음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보지 못한다는 맹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인자 우리 말로는‘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되는데 당시의 사람들에게 ‘인자’라는 표현은 예언된 사람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너는 예수라는 사람이 예언된 사람으로 불리는 인자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출교를 당할 것이 결의된 상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쉽게 ‘희안하죠’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그런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강아지 똥이 무엇에 볼품이 있습니까? 그러나 진흙이 ‘그의 존재’가 있음을 말해 줄때 그는 민들레 씨앗에도 ‘있음’이라는 존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맹인의 삶은 ‘없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이름보다는 ‘구걸’하는 삶이 그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 나라에 초대를 받을 뿐만 아니라 믿음이라는 옷이 어떻게 입혀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대부분 ‘구걸’과 같이 하는 일로 불림을 받습니다. 김사장님 이사장님이나 누구 엄마 등 말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누구로 불리고 있습니까? ‘나를 알아 준다는 말’ 때문에 눈물 흘리는 유명한 프로그램을 자주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의 후반부에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혼인 잔치를 베푼 주최자는 임금이었고 마땅히 참석해야 할 이들을 정중히 초대합니다.
마태복음 22:4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러나 초청받은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22:5–6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그들은 그에 대한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그들을 잔치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 후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명령합니다.
같은 기사를 다룬 누가는 초청받은 사람을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누가복음 14:21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자아’에 대한 높은 평가를 스스럼없이 하게 합니다. 그래서 임금이신 하나님의 초청을 이러저러한 핑계로 거절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없음’과도 별반 다르지 않는 존재들 아닌가요? 시편 103:14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최근 파묘라는 영화에서 죽은 시신이 썩어 땅과 자연에 온전히 돌아가는 시간이 30년인데 일부러 파묘를 하면 그런 자연의 법칙을 깨는 것이라 화가 미친다는 미신적인 내용을 주제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고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괜찮은 삶이었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죠. 있음에 대한 인정,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다는 가치있는 인정을 최소한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 말니다. 맹인은 ‘눈을 뜬’ 사실 조차 인정받지 못한 곳에서 더 이상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37절은 아주 의미있는 표현을 기억하십시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맹인은 ‘선생님 말씀해주세요’라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로 자신의 존재를 밝힙니다. 그러니 37절의 ‘보았거니와’는 그가 ‘보지 못했던’ 과거와 ‘보고 있는’ 현재를 연결합니다. 특히 ‘보았다’는 완료 형태의 단어는 보지 못했던 현실의 과거와 완전한 다른 상태를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죠. ‘저 사람 완전히 달라졌네’ 맹인의 태도를 보십시오. 구걸은 주는 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는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는 표현은 ‘보는 것의 확실함’이 ‘보이게 하신 분’과 일치시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는 말은 눈을 밝게 되고 오히려 시달린 현실은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게 눈으로 보는 그 이상을 보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눈을 뜬 사실’이면 충분히 믿음이 생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자인 요한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맹인은 현실을 통해 믿음이 하는 일 즉 마음에서의 요동을 경험하게 합니다. 회당에서 쫓겨난 맹인은 예수와의 비밀스러운 대화처럼 보여도 40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게 있던 자들’이 옆에 있는 곳에서 대담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39절의 말씀 즉 주변 모두를 향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통해 맹인이 예수에 의해 일방적으로 눈이 띄워졌지만 그를 둘러 싼 구걸하는 맹인이라는 그에 대한 2중적인 평가는 오히려 눈 뜬 세상의 치부를 경험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눈 뜬 맹인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저자 요한은 12장에서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했다고 고발합니다. 오히려 맹인 사건으로 바리새인들과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더 마음이 완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으로 보아야 깨닫고 돌이킬 길은 완전히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들은 사건이 생기면 지나치지 않고 더 자세히 살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더 나아가서 잘못된 것을 고쳐 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우리가 의레하는 말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표현을 합니다. 반대로 바리새인 같이 행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는 병들어 갑니다. 보편적인 윤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마땅히 있어야 할 윤리의 파괴를 경험하고 제시된 올바른 하나님 나라로 이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맹인 이었던 소외보다 오히려 본다 함으로 소외된 그의 마음에 그제서야 소문으로만 들렸던 ‘인자’에 대해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40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예수께서는 41절에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유죄선언을 받은 것이죠. 이들은 ‘눈 먼 인도자’들입니다.(마태복음 23:16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
이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에게 ‘저건 못 볼거야’ 하면서 아이의 눈을 가린 적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눈이 있다고 다 볼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스개소리로 ‘안 본 눈 삽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잘못된 것,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막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예수께서는 오히려 보지 않는 상태를 죄 없는 상태로, 반대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모든 것을 보며 아는 것처럼 또는 보이는 정보가 맞는 것처럼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도 여전히 ‘죄 있음’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흔한 표현들 ‘야 넌 안본게 나아’, ‘안 본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뿐입니까? 스스로가 ‘저는 못봤습니다’, ‘본 걸 말하지 않겠습니다’, 눈으로 들어온 시각 정보를 한편으론 부정하거나 교묘하게 바꾸는 것을 우리 역시 보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 사실이 저와 여러분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 역시도 못본 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과 함께 우리의 이성에도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가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에서 부활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부활에는 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는 성립되지 않는 사실이 부활이라는 의미를 알아가기도 전에 우리를 막습니다. 물론 과학적이지도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기 맹인에게 예수께서는 부활을 믿으라, 하나님 나라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인자’를 믿느냐? 즉 자신이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유대인으로 구걸하지만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구약적 의미에서 ‘인자로 오실 분’에 대한 민족적인 열망에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 정도로도 믿음은 그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정이 오랜 시간 예수를 믿었던지, 아니면 휴식기가 있던지 아니면 교회 이름만 알고 있던지 그렇게 아는 그것만으로도 예수께서는 부활이라는 사람의 죽고 다시 살아남에 대해서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앞서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맹인이었던 이 사람이 현실에서 쫓겨남을 당했을 때 예수께서 찾아 오신다는 사실은 여전히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맹인은 예수가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자신의 현실을 통해 깨닫고 받아 들였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처한 현실을 해석하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피하지 마시고 즐겨 찾고 마음의 평안과 예수를 더 알아가는 귀한 곳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송’ 주님의 고요한 음성 내귀에 속삭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