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른다는 것은(막 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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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죽으심을 준비하는 예수님과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영광을 꿈꾸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때의 영광만 생각합니다. 즉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불편한 말들은 들을 생각이 없고, 오로지 자기들이 원하는 말들만 듣고 싶어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32절은 제자들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왜 올라가십니까? 고난을 받고 죽으러 가십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시지 않고 앞장서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앞서 가심에 제자들과 뒤따르는 자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냥 앞장서 가신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져서 능욕과 고문을 당하며 죽임을 당한후 사흘만에 부활하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은 사실 제자들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습니다.그들이 왜 지금껏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친구와 가족들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까? 목표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날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높은자리 한 자리씩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요 오늘 본문 35절이 이하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옵니다.그리고 이렇게 요청합니다.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소서"라고 말이지요. 예수님은 고난을 향해 가고 있건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의 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삼총사를 이루며 다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갈때도, 변화산에 갈때도, 감람산에서 예수님께 질문할때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들은 예수님의 가장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드로가 배제된 채 야고보와 요한 만이 은밀히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말하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왕좌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전형적인 정치적 왕으로서의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첫번째 고난을 받아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으며 강력하게 반발했는데 그 이유도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강력한 힘을 가진 정치적인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나 야고보와 요한은 힘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한통속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왕좌의 오른편은 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였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그의 어머니 밧세바를 왕좌의 우편에 앉혔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구한 것을 안 나머지 열 제자들이 분노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제일 화를 많이 냈을 것입니다. 그는 늘 제자들의 대표격으로 활약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분개했다는 것은 그들 역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음을 드러냅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은 권력의 자리를 두고 추태를 보이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습에 대해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진정 큰 사랑은 ‘섬기는자’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복음 22장 27절에서 자신을 섬기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으로 섬겨야 으뜸이 될 수 있을까요? 44절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으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부’ 사람을 잘 섬길수는 잇습니다.나와 직접적으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섬김은 적극적으로 행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섬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모습의 절정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대속물’은 노예나 전쟁 포로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 치르는 값을 뜻하기도 하고, 죄지은 자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지불되는 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