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성전의 조건(막 1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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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깨끗게 하신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그 저주대로 무화과 나무가 마른 이야기 사이에 성전을 깨끗게 하신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둘 사이에 별 관련성이 없어보이는데도 마가복음은 이런 배치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마가는 무화과 나무 저주 사이에 성전 청결사건을 배치하고 있을까요?
먼저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왔을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베다니에서 머무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대략 3킬로미터 거리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위성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도중에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그 때 멀리서 보니 잎이 무성한 한 무화과 나무가 있어 그 나무에 먹을게 있을까 하여 다가가셨는데, 그 나무에는 잎사귀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며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이 열매를 따먹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무화과 나무에 먹을 것이 없어서 저주하신 예수님의 뜻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지금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밝히기 까지 하는데요, 어째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이스라엘에서 무화과 나무는 비싸지 않은 음식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몇차례 열매를 맺는데, 건기가 시작되는 4월에 맺는 첫번째 열매를 ‘파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때의 열매인 ‘파게’는 맛도, 볼품도 없어서 가축 사료로 쓰이거나 가난한 자들, 혹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여행자들이 허기를 달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파게’이후 4-5차례 열매가 맺힌 후 8-9월에 맺히는 열매를 ‘테헤나’라고 하는데, 이 때가 맛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 즉 양력으로 3월 말에서 4월초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는 파게가 맺힐 시기입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이 바라셨던 무화과 열매는 8-9월경에 열리는 맛난 테헤나가 아니라 파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파게마저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설사 파게를 맺지 못했다고 해도 뿌리가 말라버릴 만큼 저주를 하실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이 행동이 비유적인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예수님이 전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13절에서 ‘무화과 나무의 때’라는 말은 계절적 의미에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란 뜻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서 ‘때나 시간’을 말하는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고 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간을 말하고요, 또 하나는 ‘카이로스’라고 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단어는 ‘카이로스’입니다. 그러니까 무화과 나무의 때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가 아닙니다.
두번째로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 그렇다면 ‘무화과 나무의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지금은 이스라엘의 때가 아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공교롭게도 이 저주 이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이스라엘의 선전의 때가 지났다’라는 뜻으로, 앞으로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즉 앞으로 있을 성전 정화사건을 예고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성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과격하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성전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은 성전 당국의 허가를 받고 이루어진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 제물에는 흠이 있으면 안되는데, 그것을 판별하는 것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성전에서 인정하거나, 직접 기른 제물을 팔았습니다. 문제는 그 제물들은 시중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것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환전상도 내쫓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이 시대에 사용된 화폐에는 로마 황제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동전으로 성전세를 바치면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성전세 전용 동전으로 바꾸어 그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냥 바꿔주지 않고 수수료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각종 세금으로 허리가 위허 있던 백성들은 성전세와 거기에 수수료까지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신 것은 돈벌이 장소로 타락한 성전,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성전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아무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도 금하셨습니다. 여기서 물건은 제사에 사용되는 그릇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그릇들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은 성전 제사를 폐지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렇게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무슨 말입니까?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것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며 비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성전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자기를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다짐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거래하는 곳이 되었고, 죄를 회개하는 곳이 아니라 죄를 쌓고 손쉽게 죄책감을 벗겨주는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다음날 아침 제자들은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일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타락한 상황일수록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특징을 세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산을 움직이는 믿음을 가진 공동체 입니다. 구약에 따르면 산을 움직이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불러 일으키는 촉발제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또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두번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성전을 비판하시면서 원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합니까? 믿기에 기도합니다. 특별히 받은줄로 믿으라고 하시는데 이 말은 기도할때에 이미 응답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은 미래의 일을 현재에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어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때야 비로소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ㅣㅂ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길 바라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역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전혀 그분의 뜻을 이루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기도를 이루시기 위해 활동하고 계셨다고 봐야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세번째는 용서하는 공동체 입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로 세워진 공동체는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죄 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과 기도의 공동체가 지금 존재하는 성전을 대체하여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명하셨듯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