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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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돌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죠
우리를 구원하려고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인기를 질투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사람은 다 죽잖아요. 다양한 이유들로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 때문에 죽었죠.
운명 때문에 죽은 게 아닐까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거 아니었나요?
본인의 선택이었지
사람들의 신념 때문에 죽은 거죠.
모두가 죽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어요.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 즉 로고와도 같습니다.
복음서의 3분의 1 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고
신약 성경의 대부분도 왜 죽으셔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와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냐고요.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은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생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핵심 메시지이자
온 세상의 중심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에 오직 당신 한 사람만 있다해도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을 겁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당신을 그만큼이나 사랑하시는 거죠.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전심을 다한 끊임없는 사랑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사랑인 거죠.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이것이 십자가의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제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뭐 때문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세요. 당신을 창조하셨죠.
그건 당신이 하나님의 걸작품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은 고귀하고 훌륭하고 대단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놀라운 창조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음악 미술 문학을 보세요.
창조주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적으로 만드셨으니까요?
또한 인간에겐 놀라운 자기 희생 헌신 친절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제 경우를 봤을 때 정반대의 모습도 있습니다.
우린 나쁜 일도 잘합니다.
신문만 펼쳐도 온갖 끔찍한 악들을 볼 수 있죠.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거지
단지 이렇게 말하기엔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위대한 사랑과 헌신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동시에 나쁜 일도 할 수 있거든요.
역시도 너무 후회되는 나쁜 짓들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죠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저는 죄라는 단어를 들으면 종교적 죄책감이 떠오르거나
혹은 비싼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생각납니다.
이건 죄다 라는 표현은
뭔가 아주 즐거운 것에 동의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아이스크림 광고에서는
너무 달콤해 이건 죄야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보다 훨씬 심오하고
생각보다 우리와 훨씬 더 관계가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실수나 초콜릿 폭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겐 때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관계나 약속
혹은 자신의 행복까지도 망가뜨리려는 듯한
본능적인 성향이 있다는 거죠.
또 우린 종종 주변 사람들을 보며 나도 잘못했지만,
쟤만큼 나쁘진 않아라고 생각합니다.
더 끔찍한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라고요.
솔직히 우리는 모두 잘못을 저지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에 비교하면
우린 모두 턱없이 부족한 존재죠.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차피 다 죄인인 거면 뭔 상관이야
하지만 모든 잘못에는 결과가 뒤따릅니다.
신약성경은 죄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데요.
예수님은 마치 환경이 오염되듯
죄가 삶과 마음을 오염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바로 죄의 오염성이죠.
잘못된 행동이 우리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망가뜨리죠.
또 인생의 나쁜 것들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죄는 정말 강력하죠.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전 파울의 이 말에 공감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노예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헤로인을 지속적으로 복용한다면, 중독자가 될 겁니다.
하지만 마약뿐만이 아닙니다.
불같은 성질, 질투, 허영심, 교만함, 이기심, 험담,
음란함에도 중독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파괴적으로 만드는
죄의 노예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엔 분명 정의를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사랑과 정의는 반대되는 게 아니에요.
아동이 성추행을 당하거나
노인이 잔인하게 학대당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우린 가해자가 붙잡혀서 처벌받는 바랍니다.
죄는 반드시 형벌이 따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의 죄만 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하죠.
그런데 우리는 나의 죄와 남의 죄를 똑같이 보진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내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내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의 잘못된 행동은 벽을 만듭니다.
가족 친구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
사이에 무언가 놓인 듯 눈을 맞추기가 힘들어집니다.
똑같이 우리의 잘못과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관계가 무너지는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관계에 벽이 생깁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쁜 소식이죠.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여러분과 나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죠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24 NKRV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를 하나님의 대속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1941년 7월 31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14번 감옥에
한 죄수의 탈옥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졌습니다.
게스타포는 보복 차원에서 지하 벙커에서
굶겨 죽일 죄수 10명을 임의로 뽑았습니다.
9번째로, 뽑힌 사람은 프란시스 가유브니 체크였습니다.
자신이 뽑히자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불쌍한 아내와 우리 아이들을 이제 다신 볼 수 없겠구나.
바로 그때 자그마한 최고의 안경을 쓴 남자가
앞으로 나와 말했습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라 아내와 아이가 없습니다.
제가 저 사람 대신 죽고 싶습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47세의 막시밀리안 콜벤
그날 다른 9명과 함께 벙커에 갇혔습니다.
더 놀랍게도 이 사람은 벙커 안에서도
다른 예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벙커의 분위기가 마치 교회 같았죠.
결국 나치는 다른 사람들을 가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194년 8월 14일 그에게 독극물을 수사합니다.
41년 후인 1982년 10월 10일
막시밀리안 콜베의 죽음이 재조명되었습니다.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 15만 명의 인파와 26명의 추기경
300명의 주교와 대주교가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 프란시스 가요브니 체크도 있었죠.
교황은 막시밀리안 콜베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것과 같은 승리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는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프란시스 가요브니 체크였죠.
인디펜터드지에 실린
가요브니 체크의 부고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93세에 죽기까지 막시밀리안 콜베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을 전 세계에 전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습니다.
자신을 대신해 죽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방식으로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형은 고통과 수치심이 절정에 이르는 죽음이
그러나 흥미롭게도 신약 성경은
십자가형의 육체적 고통과 괴로움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보다 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지금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은 매우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정서적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적으로도 고통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책감을 모두 짊어지신 것이죠.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 걷어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결과는
아름답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모든 면과 같죠.
그중 한 면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요.
죄책감은 자신의 나쁜 행동에 마음이 불편한 거고,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를 부끄럽게 느끼는 거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책감, 여러분의 수치,
나의 죄책감, 나의 수치를 모두 지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낄 때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받는 사람이니까요?
여러분의 가치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으니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한히 귀중한 존재인 거죠.
그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거고요.
또 다른 면은 사랑의 참된 본질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말 그이상이며 행동을 수반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셨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고 희생함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신 겁니다.
제 아버지는 8년간 치매로 투병하시다가
몇 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 가장 힘든 시간들이었죠.
사랑 많고 뛰어난 물리학자였던 아버지가
기억상실, 혼란, 분노, 두려움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너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심각하게 이런 질문들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죠? 왜 우리 아버지죠? 왜 우리고? 왜 지금이죠?
이 일에 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 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아버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나요?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죠?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건가요?
이런 질문들이 성경에도 많이 나옵니다.
시편은 왜 하느님이 이토록 멀리 계신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정말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듯한 느낌이었죠.
그런데 크리스찬으로서 우린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 질문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십자가에서 울부짖으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제가 겪던 고통에 대한 완전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걸 이겨내도록 도와준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구름 위에만 앉아 계신
냉정하고 거리가 먼 분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고통을 받으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시고, 또 죽음도 맞이하셨죠.
때문에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하시는 거죠.
우리가 고통당할 때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전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안도감을 느꼈어요.
표현할 수 없는 평안함을 내내 경험했죠.
평안함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읽을 때 온 것이고요.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죠.
지금은 비록 우리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언젠가는 이 고난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에서의 패배를 뒤짚은 사건이 아닙니다.
승리의 징표인 것입니다.
부활은 나쁘고 악한 것이 우리의 결말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지금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뭔가와 싸우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악은 끝내 승리하지 못합니다.
악은 십자가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결말은 해피엔딩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십자가가 죄로 인한 모든 문제를 해결했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벽이 무너졌고
이제 본향인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됐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무고한 제 삼 자인 예수님을 벌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속 탕자와 같이 말입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와 집을 떠나 방황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찰리 메케시가 탕자의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을
제가 참 좋아하는데요.
예수님께서 묘사한 사랑의 아버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바로 여러분과 제가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를 안으시고 입 맞추시고, 사랑하시고,
꼭 끌어안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이 친밀하고 가까운 아버지와의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우리의 다른 관계에서도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되는 거죠.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아예 공짜로 다 드립니다예요.
너무 좋아서 진짜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요.
하지만 매번 용서해 주신다고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죠.
죄를 지어도 될 이유가 아닌
죄를 짓지 말아야 할 동기가 되는 겁니다.
어쩌다 범죄를 저질렀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요.
그럼 전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고 말하죠.
무장 강도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수업 같은 건 없으니까요?
범죄는 그냥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것들이에요.
담배, 술, 대마초 다 그런 게 시작이죠.
처음엔 그냥 고급차의 장식을 훔쳐서 바꾸는 거였는데
그러다 아예 차 전체를 훔치는 걸로 발전한 거죠.
그러다 힘 좀 쓴다는 사람들과 얽히게 됐어요.
어느 날 어떤 남자 집을 찾아갔는데
사람들한테 몇십만 원 정도 빚진 사람들이었죠.
그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남자가 돈을 안 갚겠다고 떠들고 다닌 거예요.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기로 한 거죠.
그날 그 남자는 아들과 정원에 있었는데,
억지로 차에 태여서 채석장으로 끌고 갔어요.
도착해서는 이 친구들이 차 트렁크에서
잔디 깎는 기계를 꺼내서 제게 주며 말했죠.
발 좀 깎아줘라 그래서 그의 발을 찢어놨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그렇게 계속된 거예요.
결국 리드크라운 법원 3번 법정에서 7년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오히려 이왕에 나쁜 놈 된 거 제대로 나쁜 놈 돼보자 싶더라고요.
그래서 감옥에 감옥을 거치다가 결국 경비가 가장 삼엄한
A급 교도소까지 가게 됐죠.
그런데 거기서 어떤 수감자 꼬맹이가 와서는
알파코스를 해보겠냐고 묻는 거예요.
뭔 말인지 몰라서 한 대 맞기 전에 꺼지라고 했죠.
그러곤 잊었는데 녀석이
다음날 종이 같은 걸 들고 또 얼쩡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한 대 때려주려고 기다리는데
녀석이 눈치 챌는지 얼른 말하고 도망치는 거예요.
수요일 오후에 모임인데 커피랑 과자도 공짜예요.
그래서 좋아 너 수요일에 보자 하고는
정말 수요일부터 제대로 괴롭혀주기 시작했어요.
근데 절 멈추게 한 건 그들의 말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전 아예 귀를 닫고 있었거든요.
그건 사람들의 행동이었어요.
그들은 항상 사랑과 긍휼로 저를 대했거든요.
그래서 전 제 방에 앉아 난생처음 진심으로 기도했어요.
제대로 하는지 모르면서요.
하나님 분노와 폭력, 증오를 없애주세요.
지금까지 싸워봤지만 매번 졌던 이 중독도 없애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평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평소처럼 담배를 잡았는데
만질 수가 없더라고요.
담배의 모양, 냄새 모든 게 구역질이 났어요.
그리고 제가 뭘 해야 할지를 알게 됐어요.
숨겨뒀던 마리와나 하나를 창밖으로 바로 던져버렸어요.
그러고 나니까 기분이 나아지고 좀 진정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여전히 놀란 상태였죠.
그래서 스스로에게 대럴 진정하고 씻고 면도를 하자.
하고는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는데 그냥 얼어붙어 버렸죠.
제 자신을 못 알아봤거든요. 사람이 웃고 있잖아.
게다가 얼굴에서 빛이 나네.
단지 얼굴만 달라진 게 아니라 느낌도 달랐어요.
모든 게 사라졌거든요.
누가 제 머리 뚜껑을 열고 얼음물을 부은 것 같았어요.
모든 게 깨끗이 씻겨 나간 것처럼요.
그래서 교도소 목사님께 모든 걸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말하셨죠.
어젯밤에 잠든 사람과 오늘 여기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정말이었어요.
전 싸움도 마약도 이젠 다 끝이라고 말했죠.
나한테 빚진 게 있어도 다 잊을 거고,
내 걸 가지고 싶으면 그냥 가지라고
난 이제 필요 없다고 다 끝낸 거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으니까요?
전임 사역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석방날을 맞이했죠.
치안판사인 마크 핀치 목사님이
리버풀 근처 룸큰으로 오지 않겠냐고 물으셨어요.
이제 막 교회를 개척했는데
젊은 조폭들과 마약 문제가 있다며 와 보지 않겠냐고요.
석방 당일 판사님이 교도소 문 앞에서 저를 태워서
다른 집이 아닌 판사님 댁으로 데려갔어요.
판사님의 장녀였던 레베카가
지금은 제 아내이고 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됐죠.
제 삶이 이상 어떻게 더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죄 권세가 십자가를 통해 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우리의 중독도 깨어집니다.
크리스찬이 되기 전 저는 화를 못 참았어요.
아버지의 불같은 성미를 그대로 물려받았죠.
그래서 이 끔찍한 성질머리가 평생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저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삶의 다른 영역들은 좀 더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신학적 용어를 두 가지만 사용하자면
칭의는 즉각적으로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즉시 바로잡히는 거죠.
하지만 성화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더 긴 과정이죠.
요한는 말합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우리는 계속적인 용서를 받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계속 용서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는
누군가 절 화나게 하면 원한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원한을 품는 건 상대방에게
내 머릿속을 공짜로 전세 주는 거와 다름없죠.
전에는 상대방에게 갚아줄 생각을 하면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용서하지 않는 것이 상대방보다
제게 더 큰 해가 된다는 걸 깨달았죠.
용서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죽기를 기대하며
내가 독을 마시는 것과 같다라는 말처럼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도 스스로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게 가장 힘들었어요.
하지만 CS 루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재판에서 하나님보다 상석에 앉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면 여러분도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죠.
우리가 더 많이 용서받았으니까요?
용서는 내가 하는 거지만 선택 사항은 아닙니다.
그리고 쉽지도 않습니다.
C.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모두가 용서를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막상 용서할 일이 생기게 되면 매우 힘들어한다.
하지만 가장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이고
가장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며
가장 먼저 잊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코리텐 봄을 참 존경합니다.
그녀는 네덜란드 크리스찬인데 유대인들을 숨겨주다 잡혀
언니의 아버지와 함께 라벤스부룩 집단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아버지와 언니 배 씨는 그곳에서 죽었죠.
그녀는 놀라운 사람입니다.
종전 후에는 사람들에게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며 다녔죠.
하루는 독일의 한 교회에서 강연을 하게 됐습니다.
강연이 끝날 무렵 한 남자가 코리 여사를 향해 다가왔는데
그는 라벤스 그룹 수용소에서 가장 잔인했던 간수였습니다.
그당시 그의 모습이 정확히 기억날 정도로요.
그가 다가와 자신이 라벤스 그룹의 간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코리 여사를 못 알아봤지만 여사는 이미 그를 알아보았죠.
벌거벗은 몸으로 그의 앞을 지났던 때가 기억나면서...
한 없는 오한과 분노가 밀려왔다고 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전 이제 크리스찬이 됐습니다.
과거에 정말 잔인한 짓을 했지만,
그 행동들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피해자들에게
직접 용서를 구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죠.
프렐린 탈북 당신이 용서를 받았으니 날 용서해 주시겠어요.
전할 수 없었어요.
그 사람 때문에 언니가 죽어가며 받은 고통이 생각났거든요.
전 용서할 수 없었어요. 증오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전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제게 주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제 마음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사랑에
제 증오와 용서치 못하는 마음보다 강하니 감사합니다.
그 순간 전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리고 전 말했죠.
형제님 손을 주세요.
전 그분과 악수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랑이 제 팔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지요.
원수를 용서할 때만
하나님의 바다같이 넓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용서할 수 있나요?
아니요. 저도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하실 수 있어요.
이 완전하고 무한한 용서가 부부관계와 가정생활
그리고 모든 관계들을 변화시킨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도 완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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