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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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바벨론 탑을 쌓는 것은 인간의 욕망의 집결체이다. (물질, 명예, 욕망)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바벨 사건은 죄아래 있는 인간이 원하는 삶과, 하나님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대적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를 보면 어떤 학자는 지금의 영어처럼 각자의 언어가 있고 누구나 다 아는 공용어가 있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 당시에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가 하나여서 다 함께 소통이 가능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2절에서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했다 라고 하죠. 거류 했다는 말은 정착하고자 했다. 뿌리내리고자 했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어느 도시나 지역이건 정착을 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의 연합하고자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습이 3절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3절에 그들이 무엇을 만들기 시작합니까? 벽돌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벽돌을 사용하고자 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4절을 보니까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라고 합니다. 일단 먼저 제가 앞 부분을 먼저 설명드리고자 잘랐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벽돌을 만든 이유가 성읍과 탑을 쌓기 위함인데, 그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끔 쌓자는 거에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먼저 탑이라고 하는 단어를 살펴 볼 필요가 있어요. 이 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그달 이라는 단어에요. 그런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사사기, 에스겔과 같이 다양하게 쓰입니다. 망루, 요새라는 뜻으로 요새화된 탑과 성채라는 뜻이 있어요. 그리고 이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이 미그달은 ‘미그달’을 힘과 교만의 상징으로 사용하며 (사 2:15, 30:25, 33:18), 그래서 ‘미그달’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대상이 된다 는 겁니다.
(이사야 25:2–3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그러니까 지금 본문 11장에서 이 사람들이 짓고자 하는 미그달, 탑이 무엇이었냐면 자기들의 힘과 교만으로써 요새화된 것을 쌓아 올리려고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냥 탑쌓는게 아니라, 이사람들 안에 욕망을 쌓는 거에요.
그리고 이들이 이탑을 얼마만큼 쌓자고 합니까?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죠. 이 하늘에 닿는 다는 것은 좀 비유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라고 보고했다 (신 1:28). 심지어 하나님도 이스라엘이 곧 차지할 성읍들을 묘사하시면서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라고 말씀하신다 (신 9:1).
굉장히 높은 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당시 메소포타미아 고대 근동 문명에는 또한 이런 높은 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탑의 목적이 무엇이냐면, 당시 사람들은 이 탑을 하늘 높이 까지 쌓으면 신이 그 탑의 계단을 이용해 내려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탑 자체가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의 역할도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당시 사람들이 큰 성과 같은 탑을 쌓는다는 것은 우상 숭배의 탑이자 욕망의 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자기들의 명성을 내고자 하는 것이거든요.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두바이에 부르즈 칼리파라는 건물은 828m 입니다. 이 건축물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이를 통해 유명해졌던 것처럼, 그들도 이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이죠. 왜 명성을 얻고자 하냐? 마치 그 명성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과 같은 힘으로 여겼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4절에 흩어짐을 면하자 라고 하잖아요. 즉, 이 사람들은 이 요새화 된 탑을 통해 자신의 힘과 능력도 과시하고 싶고, 또 우상숭배를 하고 싶은거에요.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우상숭배와 더불어, 그 요새화 된 탑이 앞전에 있었던 홍수 사건과 같은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 같다는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었던 거였죠.
그러니까 바벨탑은 뭐냐! 인간 욕망의 집결체라는 거에요. 물질, 명예, 욕망이 담겨있는 것이죠. 지금도 보세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높은 탑과 같은 건물을 지으면 그것이 곧 세상에 자랑이 되고 명예와 힘을 과시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63빌딩이 왜 유명합니까? 물론 지금은 그보다 높은 건물이 많지만 정말 높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유명해진거 아니겠습니까? 높게 쌓는 다는 것은 어떤 인간의 올라가고 싶은 욕망과 명예의 상징인 거에요. 아기들이랑 탑쌓기 놀이를 해도 아이들은 높이 쌓이면 쌓일수록 좋아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죠. 그 마음에 자꾸 높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원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악함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창세기 고대 근동부터 있었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탑을 쌓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말이 된 것인지가 나옵니다
Q2. 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하는 것이다.(멈춰있고, 흩어짐을 면함, 안정감, 변하지 않으려함)
바로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던 그 명령과 완전히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불순종하는 모습인 것이죠.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정착이 아니고, 멈추려고 하고 온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데 흩어지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탑을 쌓아 얻은 명예와 명성을 통해 안정감을 쥐고서는 변하지 않으려고하는 악한 모습인 것이죠.
이것이 오늘날 어떻게 우리와 같습니까? 산하정책이죠. 아이를 낳지 않는 정책의 바벨탑. 그리고 지금은 개개인이 힘드니까 낳기 싫어하는 모습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생육하고 번성하지 않는 바벨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세지는 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전도하지 않고, 복음 전하지 않는 교회. 멈춰 있고 움직임이 없는 것이지요. 안정감에 사로잡혀있는 교회 선교하지 않는 교회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전도하지 않는 성도, 안정감에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성도들은 다 개인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바벨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중에 어머니께 복음을 또 한번 전했습니다. 물론 선뜻 예수를 믿자고 하니 믿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던지 전도에 힘쓰라, 그리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거둘것이라 약속하셨 잖습니까? 제가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어머니께 또 복음을 전했더니 저번에는 화를 내셨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기도를 많이 하라고 하십니다. 화를 내시지 않아요. 그러더니 저에게 목사님의 설교를 보내보라는 것입니다. 자면서 요즘 듣고 잔데요. 이게 제가 11년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 모습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런 개인이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가 쌓아놓은 바벨론이 무너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쌓아놓은 바벨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안정감을 위해, 누군가는 명예와 세상 욕심을 위해, 누군가는 욕망을 위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는 땅 끝까지 복음 전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습 한번 보십시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말씀이 살아야 한다는거 알면서 우리 그렇게 기도하고 바라고 복음 전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우리 안에 바벨탑들이 많이 쌓여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저들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약속 하셨는데, 언약으로 멸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는데, 타락한 죄인의 본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짓밟고 그 위에 바벨 탑을 세워 꼼짝하지 않으려고 불신의 탑, 이생의 자랑과 명예를 자꾸 쌓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 은혜가 임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 멸하시지 않고 언어를 흩으셔서 자연스레 흩어지게 하고 자연스럽게 탑을 무너뜨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 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공든 성벽, 요새와 같은 불신이 무너지는 은혜인 것이지요. 저들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죄를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명령에 불순종하고자 완고한 마음들이 굳어가던 차에 하나님이 그 모습을 모르셨겠습니까? 훤히 아시고서는 그것을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지는 은혜라고 제가 표현한 것이죠.
우리 안에도 분명히 견고한 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자 발악하는 모습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각자 하나님과 나만 아는 견고한 바벨탑이 무너지는 은혜가 임하길 소원합니다?
Q3. 인간은 수직적 존재가 아니라, 수평적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견고한 바벨탑이 무너져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수직전 존재가 아니라, 수평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고 그 깨닫은 바대로 살기 원한다는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것은 수직적 존재가 되기 위함이잖아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고, 욕망이나 물질이나 명예를 쌓아올려서 올라가는 삶. 올라가는 존재가 되려고 하는것인데, 그게 아니라 우리는 수평적 존재고 하나님이 그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시는 거거든요. 수평적 존재는 뭐냐? 흘려보내는 자들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수평적이잖아요 흘러가는 것이잖아요.
흘러가는 자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자들이거든요. 요셉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랬고, 사무엘과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수직적 존재는 어땠습니까? 사울은 비참하게 죽었죠? 아합도 그러했죠? 하나님을 대적했던 블레셋도 그랬습니다.
위로 쌓는 수직적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불면 날라가는 모래성과 같은 거에요. 그러나 복음은 수평으로 흘러가는 것이고, 이는 생명나무가 되어서 만국을 치료하는 잎사귀가 되는 것이죠. 아까 언급했던 인물들 중에 최고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 신이신데도 수직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러 온게 아니라 누구보다 수평적 존재로서 약자들 돌보고 그 사랑을 흘려보내신 분 아닙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 우리 시대에는 복음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은 전하고, 가르치고 서로 사랑하고 품어주며 점점점 옆으로 흘러 넘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9절을 보니까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온 지면에 흩으셨다 라고 하시면서 바벨탑 사건이 종료가 되요. 이게 무너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기회, 즉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신거에요. 인간 안에 있는 쌓아올리려고 하는 온갖 죄악과 더러운 것들을 흩으시고, 다시 복음으로 다시 생명과 살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만 아시는 바벨탑들이 분명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욕망의 집결체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죄를 짓는 악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수직적 존재가 아니라 수평적 존재라는 것을 오늘 이시간을 통해 다시한번 깨닫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이 견고한 진과 요새와 성읍과 바벨탑이 무너지는 은혜가 임하길 소원합니다. 이 굳어버린 모래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땅에 흩어져 복음 전함과 영혼구원에 쓰임받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무너지는 은혜가 우리 안에 흘러 넘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