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장 1-14절(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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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의 소중한 생일 입니다.
여러분이랑 가장 친한 친구나 아니면 남친, 여친이 에르메스 로고가 박힌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옵니다.
그러면서 너무 생일 축하 한다고 전해줍니다. ‘꼭 집에 가서 혼자봐~~’
대충 보니 사이즈가 5백 5십만원 정도 되는 이블린 백 같아 보입니다.
집에 가서 혼자 볼 수 있습니까? 친구들에게 자랑하면서 소중하게 박스를 열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에르메스 가방이 아니라 시장가방에 에르메르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그 선물을 준 그 친구, 애인과 계속 관계를 맺겠습니까?
바로 손절, 헤어짐 각 아닙니까?
실제로 지난 교회에 고등부 학생 중에 한명이 친구 선물이라고 에어팟 프로 박스에 콩나물 대가리 두개 넣어서 줬다가 큰 싸움이 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이 이와 같은 상황 입니다.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겉으로는 하나님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정작 그 안에서는 하나님이 없고 우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봉사 하지만, 정작 그 속에 하나님이 없고, 교회 안에서의 관계나 다른 목적만 가득 차 있으며, 교회 안과 세상의 삶이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예배 하는 예배자인지, 아니면 우상숭배자 인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심을 다시 점검하는 돌이킴의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과 성막의 설계도를 받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8절 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수여받은 율법을 지키며 순종하는 백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과 성막의 설계도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성막을 직접 설계하시고, 친히 두 돌판에 계명을 기록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산 밑에서 이스라엘은 모세의 부재를 불안해 하며 아론에게 달려가 자신들을 인도해낸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아론은 득달같이 달려드는 백성들의 요구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예배를 집례 합니다.
한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 하나님이 직접 쓰신 증거판을 수여받고, 한쪽에서는 우상을 만들어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 합니다.
이 요구의 이유를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라고 합니다.
이들은 지금 모세의 부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왜 부르셨는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세우신 모세라는 지도자가 없다는 그 두려움이 이들을 집어 삼킨 것입니다.
이들은 모세의 부재와 함께 모세와 함께 하던 하나님도 자신들을 떠났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각하는 신에 대한 개념과 이방사람들의 신관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고대근동의 신관은 사람이 만든 신상에 신이 거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존재와 역할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이 거하는 신상의 역할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부어주시고, 인도하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모세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주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2계명,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즉,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출애굽의 주체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시고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종 입니다.
출애굽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가만히 있었고 따라나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열가지 재앙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이집트의 강력한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되는 은혜를 직접 경험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이들을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고,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시내산에서 보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소유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여호와를 인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의 정확한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누가 자신들을 구원하고 인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하고 배은망덕한 이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이 결국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고 배은망덕한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마라는 십계명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의 삶을 차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질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좋은 곳으로, 편안함으로 인도하여 낼 신을 하나님으로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성공과 만족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내 삶에 없어지니 불안하고 하나님이 버리신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주권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을 인도하는 존재는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것들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것은 다양한 경험, 물질, 인맥 등이 아닙니다. 물론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얼마나 더 보여주셔야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신뢰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인정하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인내가 회복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 합니다.
두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요구에 아론은 어쩔 수 없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가르치고 지켜야 할 대제사장이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4절 후반부 말씀에서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는 핑계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하나님을 기만하고 조롱합니다.
하나님 보다는 사람을, 자신의 안위를, 상황을 더 두려워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들의 의도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버리려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깝게 서서 섬기려 했습니다.
다른 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단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했던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잘못되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분노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찾았지만 자신의 욕망, 안위, 욕심 등의 우상을 /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5절과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송아지 형상을 만든 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은 그 날을 여호와의 절기로 지정하고 아침일찍 일어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겉모습은 여호와 신앙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11절에 나와 있는 시내산 언약체결의식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고 기뻐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송아지 형상이 이제 모세를 대신하여 자신들을 인도할 여호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어 자기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 철저하게 믿고 있습니다.
시편 106편 19-22절 입니다. (함께)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그는 함의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만한 일을 행하신 이시로다
그들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송아지를 만들었고 그 곳에 하나님이 임하시기를 기대 했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우리의 욕심과 욕망이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공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유한 것, 나의 자랑할 거리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실패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지지 못하고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욕망과 욕심도 그 분의 영광과 임재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욕심과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사용하고 악용하고자 한다면, 이미 우리는 구원자 하나님을 잊은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었다, 누구 때문에 예배에 실패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이렇게 하셔서 내가 이렇게 밖에 못섬긴다는 변명을 하지 맙시다.
나의 필요와 우선순위를 먼저 채우시는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이미 하나님 없는 실패한 우상숭배자의 예배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하나님을 찾고 예배 하는 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의 방식대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은 참 특별한 위치에 놓여져 있습니다. 25장에서 31장까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설계도면을 그려주십니다. 34장에서 40장까지는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면을 가지고 성막을 제조합니다.
그런데 성막 이야기 사이에 송아지 형상을 만든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이 어떤 곳입니까? 성막은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셔서 임재하시고 언약 백성들을 만나시는 장소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는 그곳에서 여호와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예배 드리는 장소가 / 성막입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 예배하며 섬기는 장소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알려주신 대로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 예배 입니다. 그것을 위해 성막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관점대로,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송아지 형상 따위로 전락시키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예배 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 6절 말씀을 보시면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뛰어논다 라는 레차헤크 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음란하고 난잡한 성적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이방 신전에서 일어나던 우상 제사 의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전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던 중 조명이 하나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학생 하나가 오늘 예배 망했다~ 고 이야기 합니다.
수련회를 준비하는데 원하는 장비를 가져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수련회 망했다~ 고 합니다.
뭐가 더 중요합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망한 예배 입니까?
찬양이 잘 안맞습니까? 음이 틀렸습니까? 내가 모르는 찬양입니까? 내가 듣기 싫은 삶에 찔림과 양심의 가책이 있는 말씀이라 별로 라고 생각합니까?
내 마음과 기분에 들지 않으면 그 예배는 실패했고, 내가 생각하기에 만족한 모습이 보이면 그 예배는 성공했습니까?
사람의 많고 작음이, 예배의 외적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예배를 나의 기준에 잣대를 대고, 판단하는 우리의 교만함이 가장 큰 문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다른 이방신을 예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만한 자들의 예배를 보시고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8절 입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이미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분명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걸고 예배 하지만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9절과 10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자신을 기만하며 농락하는 교만한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을 심판하려 하십니다.
인간은 나름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며 성공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면 실패한 삶이며,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우리의 중심을 다해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과연 누구입니까? 나의 만족과 유익이 예배의 대상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깨어진 언약관계 가운데 진노하십니다. 이들은 진멸하시고자 하십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 예배 가운데 안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내가 찾는 참된 예배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이것만큼 마음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자 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배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의 생명과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삶, / 예배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예배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날 이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 3000천명이 죽었습니다.
나의 소유, 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지만 /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예배하고 경배하는 자들에게 진노하시고 철저히 / 그 죄를 물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송아지 우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우상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우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에 있다면, 또 그것을 하나님으로 포장한다면,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우상숭배자 입니다.
기분 나쁘니 나 예배 안나간다 고 협박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자가 되지 맙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협상 조건, 협박용 무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주님의 은혜로 서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며, 그 앞에 겸손함과 경외함으로 엎드려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의 이름만을 예배하는
하나님이 찾으시며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