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힘써야 할 세 가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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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우리가 볼 때 언변이 화려한 설교도 아니고 적용과 예화가 훌륭한 설교도 아닙니다. 오히려 요엘과 시편 말씀 구절들을 인용하는 투박한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신데 우리가 그 메시아를 죽였으나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원수가 곧 자신이라는 생각에 ‘어찌할꼬’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통해 성령의 선물을 받고 이 세대에서 떠나 구원을 받으라라고 말합니다.
이 투박한 설교의 결과는 놀랍습니다. 남자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대규모 회심을 시작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됩니다. 42절은 이들이 힘썼던 몇 가지 일들을 말하고 있는데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소망합니다.

1.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다.

교회가 첫 번째로 힘썼던 일은 가르치고 또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43절에서 사도들은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했다고 합니다. 본문 속 베드로의 설교 또한 기사와 표적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사와 표적은 가르침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말씀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기록하고 교회를 세우는 시대적 기능을 수행해야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과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와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교회가 세워지고 성경이라는 완성된 말씀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사도라는 직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본문에서 기사와 표적이 아니라 그 가르침과 가르침을 받는 마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베드로의 말씀 앞에 그리고 사도들의 기적과 표적을 보고 가르침을 들었을 때에 두려워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도 쓰입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대부분은 사람 자체만 보았을 때에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대부분은 시골출신이었고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당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시골 어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두려움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봅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베드로가 보인 기사와 표적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가르침이 개인의 사상이나 생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또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만약 사람을 보고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움으로 말씀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서 우리 모두가 겸손함과 두려움으로 말씀을 청종합니다. 누가 전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42절의 시작을 원어로 살펴보면 사도는 복수형이고 가르침은 단수형입니다. 사도는 여러 명이었고 각자의 방법대로 가르쳤을 테지만 그들이 가르친 것은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두 명의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선포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뿐인 줄을 믿습니다. 나아가 전 세계 모든 교회에서도 각각 다른 설교자가 다른 본문과 방법으로 설교하고 가르칩니다. 그 모든 가르침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주제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단 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가르침이 선포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두려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 두려움은 기적이나 표적을 보아서 혹은 사도들의 권위에 대해 갖는 두려움이나 신비주의에 빠진 상태의 두려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 가운데에 심지어 교회 가운데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말씀을 듣긴 하지만 말씀 앞에 겸손하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하지만, 여전히 옥토 밭이 되지 못한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보다는 값싼 위로나 심지어는 장사나 개인의 유명세를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는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패역한 시대 가운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이 회복되어 가르치고 또 가르침을 받기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 교제와 떡을 떼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두 번째 일은 교제와 떡을 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함께 교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당시 시대상황에서 보면 이 일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함께였고 남자와 여자와 아이가, 주인과 종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인종과 신분의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떡을 떼다는 의미는 함께 식사교제를 하는 애찬의 의미와 성찬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벽을 허물고 깊이 있는 관계를 맺고 예수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44절 이하의 본문 말씀은 이 교제와 떡을 떼는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이들은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또 성전에서, 집에서 날마다 모여 함께 먹고 마시며 예배드렸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공동체, 이상적인 교회공동체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케 되었을까요?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훌륭하고 사랑이 많아서였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서신이나 여러 서신들을 통해 보면 초대교회에도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신분과 시대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적용케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부활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신앙을 통해서 이 땅의 것이나 세상에서의 나의 위치, 명예가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실재하는 하나님 나라가 내 삶의 최종적인 소망이자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대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의 부활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개념이 나의 삶에 온전히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믿음이 희미할수록 우리는 불안함을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가 아닌 나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2024년 한국교회의 키워드들을 살펴보는데 ‘외로운 크리스천’이라는 주제가 등장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온라인 예배가 대중화되고 1인가구가 많아지다 보니 교제 없는 성도들, 믿음은 있지만 교회는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들이 많아진 탓이었습니다. 전국 2000명의 그리스도인을 통해 조사한 결과 10명 중 4.6명 정도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는 현장예배의 부재, 영적 갈급함, 경제적 어려움 등이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부활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정 우리는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의 불안함과 개인주의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부활절마다 부활의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깁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또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부활의 증인이 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잘하기보다는 함께 가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어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교제하고 예수를 나누기를 힘쓰다 보면, 또 더 나아가 온 백성들을 품어 하나님과 이웃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힘쓰다 보면 우리의 삶이 불안함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교제와 떡을 뗌으로 외로울 새가 없는 복음으로 꽉 찬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오로지 기도하다.

마지막으로 초대교회는 기도하는 데에도 힘을 썼습니다. 기도에 힘썼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말 그대로 기도에 힘을 쏟았다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로는 당시 유대문화권에 따라 정해진 기도시간에 맞추어 기도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가르침과 교제도 중요하지만 기도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것을 봅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배경이 되는 오늘의 본문 속 베드로의 설교 또한 마가의 다락방에서 뜨거운 성령의 역사와 기도 뒤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전에 오르셔서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성전인 우리와 또 성전 된 우리가 모인 교회 공동체에서 기도가 끊어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위험 속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다음주자들과 또 그들이 속한 세상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교회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통해 날마다 성장해갔습니다.
우리에게도 크게 두 가지 기도시간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도시간과 또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에 힘써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도 유익이 있지만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와 같이 정해진 기도시간에 또 정해진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는 것 또한 큰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기도시간에 우리는 대부분 나의 필요와 상황에 대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기도의 방향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한편 금요기도회와 같이 공적인 기도시간에는 물론 개인적인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하지만, 말씀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측면에서 나라와 교회 또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를 제목으로 합니다.
우리 교회를 예로 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기도, 치유와 부흥을 위한 기도,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들을 위한 중보기도 등 개인적인 기도시간에는 후순위로 밀릴 수 있는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도는 물론 공적인 기도회 시간에도 힘을 써 참여함을 통해 날마다 믿음의 성숙을 이루는 동서울광염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가운데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합니다.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의 부활의 소망을 품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라는 답을 통해서 우리 앞에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개인의 기도와 함께 모여 기도하길 힘씀으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본문을 통해 교회라는 공동체가 힘써야 할 세 가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가르치고 또 두려움으로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교제하고 함께 먹으며 예수를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권위와 인식이 땅에 떨어진 요즈음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부러워하고 교회를 부끄러워하는 요즈음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부끄럽게 할 수 밖에 없고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을 말씀을 통해 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건강한 몸 된 교회 공동체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교회가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이 땅에서는 온 백성에게 빛이 되어 칭송을 받고 하늘에서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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