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7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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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정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4월 첫 예배이자 신입생 환영예배에 함께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혹시 오늘 하임 예배 처음 온 1학년 친구들 있으면 손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우리 이 친구들을 향해서 함께 반갑게 인사합시다. 만나서 반가워~
네. 우리 14기 친구들 함께 예배하게 되어서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우리 하임 공동체를 통해서 하늘고 생활동안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공동체를 통한 사랑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신입생 환영예배이기 때문에 뒤에 준비된 순서가 참 많아요. 그래서 오늘만큼은 말씀을 간단하게 핵심만 나누고, 뒷 시간을 여유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지난번 예배때까지는 마가복음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4월에 들어오면서 또 다른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신명기 말씀이에요.
신명기는 이미 이전에 말씀을 나누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익숙할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리마인드 차원에서, 또 처음 말씀을 듣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신명기 말씀을 소개하고 들어갈게요.
신명기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난 후 오랜 광야생활까지 끝낸 후에 가나안을 앞두고 모세가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랜 출애굽의 과정동안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을 다시금 되새기는 내용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친구들이 읽기에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율법의 내용들도 등장하기도 하죠.
그리고 그 율법의 내용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죠? 17절을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구누구죠? 객과 고아와 과부가 등장합니다.
객이라는 것은 누구를 의미하죠? 자신이 지금 있는 그곳이 자신의 원래 터전이 아닌 사람들을 의미하죠. 여행을 왔거나, 아니면 떠돌고 있거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아는 어떤 사람들을 의미하죠?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들을 말합니다. 당시는 전쟁과 같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발생했기에 고아도 많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과부는 어떤 사람이죠? 남편을 잃은 여인이죠. 고아와 마찬가지로 전쟁 등의 일들로 인해 성인 남성의 생존율이 적었던 당시 사회에서는 과부도 많이 존재했습니다.
자, 이 세 그룹의 공동점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렇죠. 바로 사회적으로 약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2,3학년들은 지난번 말씀을 통해서 기억을 하고 있죠? 과부가 당시 사회에서 약자로 취급을 당했다는 것을요.
성인 남성들도 생존율이 높지 않았던, 또한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당시 근동지역 사회에서 터전이 없이 떠도는 자들과 부모가 없는 아이, 남편이 없는 여성 모두 의지할 곳이 없는, 상대적으로 생존할 확률이 적은 약자들이었습니다.
보통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약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죠? 보호를 해줍니다. 왜냐?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보호망을 제공해주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당연한 이 보호가 당시에는 가능했을까요? 그렇지 않죠. 말씀드렸다시피 성인 남성도 홀로 살아남기 쉽지 않은 사회인데, 약자들까지 챙기는 것이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들을 챙길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불쌍하다고 연민을 할지언정, 손을 내밀어 돕는다는 생각까지는 나아갈 수 없었겠죠.
그런데 그러한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율법으로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시죠?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여기서의 송사는 재판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재판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재판의 기본중의 기본이 뭘까요? 공정이겠죠. 그런데 앞서 말했듯, 객이나 고아는 사회의 주요한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재판이 불리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도 어떤 갈등상황이 있을 때에는 나랑 친한, 익숙한 이들의 이야기가 더 잘 들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어쩌보면 당연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는 것은 채무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옷, 그 중에서도 겉옷은 각 개인들에게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겉옷이 사막의 모래를 막아주고, 밤의 추운 기온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돈을 빌릴 때, 자신의 겉옷을 담보로 잡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과부들에 한해 겉옷을 담보로 잡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채무에 대한 부담을 크게 줄여주고자 말씀하셨다는 것이겠죠.
17절에 등장하는 이 율법의 구절은, 간단한 한 줄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법률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또 자연스레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까요? 그것에 대해 반발하는 의견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 반발을 명령으로서 무시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에 대한 이유까지 설명해주십니다.
바로 이어지는 18절에서 등장하죠. 바로 너희가 애굽에서 종 생활을 했었고, 그것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구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 애굽에서 종 노릇을 하면서 아주 힘든 삶을 살아왔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뭐에요? 인간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가나안 땅을 앞두고 있는 신분의 변화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이전에 그렇게 살았는데, 똑같이 대하면 안되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으로써 약자에 대한 보호라는 구절을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약자 보호에 대한 율법을 말씀하십니다. 19절에 등장하죠.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이것은 뭘 이야기 하죠? 추수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조금 두고 온다면, 그걸 그냥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어지는 20절과 21절을 통해서 감람나무와 포도원의 경우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이건 지금으로 치면 어떤 것이죠?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라고 볼 수 있을거에요. 아마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22절을 통해 다시금 너희가 이전에 종이었던 때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며 이 율법의 내용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이 율법의 말씀을 보면서 놀라운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율법이 거의 세상에서 가장 먼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보살폈다는 것을 말이죠.
우리는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들을 떠올리나요?
뭔가 강한 느낌이 들죠. 돌로 치고, 반드시 죽이고 이런 내용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물론 율법의 많은 부분들에 그 내용들이 실제로 담겨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오늘의 말씀과 같이 이런 상당히 진보적이고 열려있는 내용들도 동일하게 담겨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조금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보통 갖는 생각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죠.
물론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진멸하고 없애고 이런 말씀만 하시고, 신약의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 이런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시는 분이실까요? 그렇지 않다는게 바로 오늘 말씀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만 하시는분이거나, 사랑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두가지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있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은 약자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벌을 내리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에 대해 채찍으로 난장판을 만들어버리시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이 오락가락하는 분이시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움과 사랑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재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죠? 죄를 밝히고 그것을 처벌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밝히고 처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을 죄책감없이 죽이기 위함일까요? 그렇지 않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 안에서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랑을 위해 의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공식은 반대로도 같은 의미를 주겠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보면 너무 철저하고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인도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우릴 향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말씀 안에는 어떤 내용이 있죠? 가장 기본적인 율법인 십계명에 나타나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그러니 오늘 말씀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죠.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키나요? 여기 있는 많은 친구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믿을텐데, 그러면 말씀을 잘 지켜야 하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그렇지를 못한다는 거에요. 맨날 말씀 못지켜서 캠프가서 울고불고 하면서 지키겠다고 하는데, 또 못지키는 모습만 나타난다는 거에요.
아마 뜨끔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원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심지어 성경에 등장하는 제자들마저 말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대체 율법이 왜 있는것이냐는 생각이 들겠죠. 아무도 못지키는데 있을 필요가 있냐는 거에요.
그렇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담긴 이 아름다운 율법을 우리는 지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누굴 보내셨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말씀을 다 지켜주신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못 지켜냈던 말씀에 대한 죗값을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치르시고, 지난주에 지켰던 것처럼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이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사라졌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서 말씀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면서 또 사랑이 많으신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에 우리를 그대로 죽음의 자리에 두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직접 죽음의 고통을 겪으시는 십자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율법의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오늘 이 율법의 말씀,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공의와 사랑을 보이셨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든 친구들의 삶에도 이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귀한 하임 공동체를 통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 한사람 한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