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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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이신 예수
양의 문이신 예수
지난 시간 9장의 맹인이 눈 뜬 기적을 통해서 믿음은 눈을 뜨는 것처럼 매우 혁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을 살펴 보았고고 저자 요한은 1장에서 제자들, 4장의 사마리아 여인, 8장 음란 현장에서 잡힌 여인 등 믿음은 찰나의 순간처럼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은 우리 삶의 여정에서 많은 고비를 만나고 그때마다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라는 각자의 답이 우리 삶의 방향과 나의 생각과 태도와 잘 맞는가를 점검하고 그리고 교정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생각하시나요? 저는 마치 기차의 선로가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방향을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왜 평행일까요? 이 땅에서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완전한 합치의 한 길을 갈 것이지만 이 땅에서 발 붙이고 사는 우리 각자의 삶 주변은 9장 41절의 마지막 말씀처럼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10장으로 장은 바뀌지만 지금의 분위기 즉 맹인과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의 배경은 바뀌지 않고 1절에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양의 우리 비유와 선한 목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1절과 12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1절에 ‘진실로 진실로’가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우리 해석에는 ‘내가’라고 주어가 먼저 나오지만 원문을 보면 ‘아멘 아멘 레고 후민’을 그대로 해석하면 ‘진실로 진실로 말한다 너희에게”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한다도 중요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멘 아멘’ 이라고 두 번 연거푸 하는 표현으로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표현이고 본문은 그중에 15번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시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말씀하시는 권위적 선포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 비유가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죠. 이어지는 문장은 ‘아니다’ 부정문 입니다. 내용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는 것이 주어절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을 통하여’/ 여기 부정문 ‘메’는 답변을 ‘노’로 요구하는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물론 반대로 ‘예’를 요구하는 경우는 ‘우’로 시작을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성찬에서 배신할 가룟 유다를 말할 때 ‘나와 그릇에 손을 넣을 자’라고 할 때 제자들이 ‘저는 아니지요?’라고 할 때 ‘메티’라는 부정문이 나옵니다. 즉 예수께서 ‘아니다’로 답을 의도하고 묻는 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19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그러니 여기 비유의 내용은 듣는 사람에게도 ‘아님’을 전제하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문을 통하여 문으로 들어오지(수동태) 않는다.! 수동태 형입니다. 그럼 어떻게 들오온다(오는, 자기 힘으로/ 능동태) 자’ 가 전체 1절의 주어절을 이끌고 있습니다. 수동형이니 누군가에 의해서 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강압적으로 끌려진다는 의미로 생각하지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12절 역시 11-13절까지 한 덩어리인데 앞서 살핀 절도와 강도가 양을 훔치는 목적이라면 선한 목자와 절도, 강도인 삯꾼과의 비교를 하고 있는데 ‘주어’가 ‘그 삯군’이라는 것입니다. 왜 12절이 중요한 가하면 삯꾼에 대한 정보 때문입니다. 첫번째, 목자가 아니다, 두 번째 제 양이 아니다. 아닌 것은 ‘존재’적인 의미인데, 존재를 설명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쉽게나마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나의 존재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름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름이 나의 존재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죠. 즉 목자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한 부류는 삯꾼인것 처럼 말이죠. 그래서 1절과 12절은 그걸 알게 해주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의 눈에는 저 목자로 보이는 자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양을 가지고 있다면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무엇이 그것을 알게 해주는가 하는 질문에 답이 ‘양의 문’ 1절에서 ‘문을 통하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2절에 훔친 것, 절도요 강도인 삯꾼은 목자도 아니며 제 양도 아닌 삯군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은 즉 문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들어오지 않은 자들은 절도요 강도인데 이들이 삯군이라고 했다면 문으로 들어가는(2) 2절의 표현은 ‘양의 목자’인데 그 목자는 다시 후반에서 ‘선한 목자’로 서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비유를 듣는 자들은 이런 비유가 어려운 것이 아닌 바로 일상의 비유로 매우 합리적, 합법적인 누구나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현관의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을 때 들어온다는 생각은 합리적으로 가족 중에 누구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누르는 속도와 같은 부가적인 정보로 누구인지까지 특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들어온다면 당연히 정상적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죠. 양의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 정당성, 합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지기는 그를 위해 문을 연다고 된 것은 문지기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런 이해를 위해서 당시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는데 목자는 때가 되어 마을을 돌며 각 집에 뜰 앞에서 즉 양이 모인 곳으로 합법적으로 들어갈 때 각 집에 문지기들은 문을 열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목자는 양을 부르고 부르는 음성에 양들은 반응을 합니다. 3절 중간’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럴 뿐만 아니라 목자는 3절 후반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는 것은 양들에 대해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을에서 각 집을 다니며 양을 불러내면 불러낸 양들 앞에서 목자가 이끄는 대로 4절 양들이 따라갑니다. 양들이 따라가는 이유는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 타인이 와서 오히려 양을 부르면 5절에 ‘도리어 도망간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생활 밀착형 비유이지만 6절에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저자 요한은 빛과 어둠이라는 대조를 안다와 모른다로 혼용하면서 전체에 사용한다고 말씀드렸죠. 7절에 ‘다시 이르시되’ 여기에서 ‘진실로 진실로’ ‘나는 양의 문이라’고 직접 말하는 장면입니다. 양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안다’ 입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듣는다’, ‘안다’로 연결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은 따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듯 푸른 초장으로 인도되는 것이죠. 목자는 안다. 양은 듣는다. 이 관계는 앞서 살폈던 맹인의 사건을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제자라는 이들이 맹인을 죄의 관계에서 살폈다면 예수님은 맹인의 치료를 죄의 관계가 아닌 목자의 관계에서 이끌어서 맹인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 즉 듣고 자기를 아는 예수를 따르는 믿음을 구체적 비유로 말씀하신.
아는 데 어는 정도 아는가 하면 이름을 안다는 것이죠. 이름은 존재와 연결을 한 구체적인 것이죠. 유명한 시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양에 불과한 동물에게 이름을 불러 줌으로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깊어졌는지 그리고 ‘선한 목자’가 어떤 이미지를 갖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양의 이름을 부른다는 친밀감은 앞으로 11장 이후 예수님의 고난 시작에 앞서 사랑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앞서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담겨 있는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죠. 앞으로 등장할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어떻게 살리셨을까요?
요한복음 11:14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후에 43절까지 여러 상황과 사람들과의 대화 후에 요한복음 11:43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이름을 부름으로써 죽음이라는 공간을 지나 삶이라는 공간으로 나오게 합니다. 목자는 뜰 안으로 들어가 양을 부르고 인도하는 정도이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사망이라는 공간에서 이름을 불러 다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내용이 9절에 나오죠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아멘
예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가 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 것은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게 되는 것이죠. 듣고 따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내용은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양은 의심이 많은 동물 중 으뜸이라고 합니다. 그런 양이 목자를 따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음성이 부드럽고 따름에 대한 요구가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는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고 이런 사랑의 전달은 의심을 뚫고 마음 깊은 ‘의지’를 움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수동태’의 용어는 그래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의해 인도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앞서 가면/ 그래서 양은 목자를 앞질러 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이의 음성은 말 그대로 낯선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겁먹고 도망하게 됩니다. 앞서 낯선 이를 ‘절도와 강도’ 즉 합법적으로 문을 열고, 문지기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들입니다. 10절에 절도와 강도는 도둑입니다. 훔쳐가는 자입니다. 1절을 시작하면서 ‘아니다’는 부정으로 시작했던 내용은 6절에 ‘알지 못한다’는 부정적 분위기로 마무리됩니다. 이런 분위기는 9장 마지막에 40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 10장 1절에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연결되는 내용을 볼 때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즉 바리새인 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상적인 목자의 비유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들어도 알지 못하는 무능력은 듣지 않으려는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그렇습니다. 가르치려 들면 ‘꼰대’라고 말합니다. 배우는 것을 스스로 ‘쇼츠’나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 할 수 있다고 믿고 말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배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양질의 콘텐츠는 분명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막히는가 하면 기초를 갖지 못한 실력, 실력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배우려 하지 않는 태도가 결국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배우려는 자세를 말할 때 가르치려는 사람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이나 굴종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분명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7절 부터 그 목자라는 앞에 ‘선한’이라는 다시 말해 ‘선한 목자’라고 말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문지기’가 문을 열었으니 ‘문지기’라고 할 법합니다. 그런데 ‘양의 문’이라고 좀 이상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앞에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이 다시 7절에서 주어에 해당되는 것은 ‘예수’ 그리고 ‘에고 ~ 에이미’ 동사입니다. 에고 에이미 동사는 ‘나는 무엇 무엇이다’로 해석하는대 ‘양의 문’이 목적어로 들어가는 문장 구성입니다. 이런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앞서도 나는 생명의 떡, 나는 세상의 그 빛 이라고 했습니다.
잘 생각해시면 앞선 양의 목자 비유에서도 중요한 내용은 ‘문을 통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신다면 그 문에 대한 이야기 즉 ‘양의 문’이라는 연결은 ‘문’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도와 강도로 규정한 것은 그들이 문을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거부한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을 염두해 두었다면 역사의 현장에 오신 예수를 통하지 않는 상태가 절도요 강도인 것처럼 그 문은 예수이신 것이 맞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이신 예수의 말씀을 듣습니다. 양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양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이신 예수를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의 문’이 가진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내가 심판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입니다. 특히 8절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는데 에스겔 34:2-3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 이런 경고는 이미 선지자들로 인해 내려진 상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끄는 곳은 어디였을까요? 정치적인 평화, 다시 번영을 누리는 다윗 왕의 출현과 같은 로마제국 압제에서의 벗어나려는 현실적인 것이고 어찌보면 이런 일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계속해서 3-4절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는 경고와 그대로 맞지 않습니까? 바로 맹인의 기적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쫓아내는 바리새인들이 증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즉 ‘넘겨준다’는 히브리적 관용구로 구약의 여러 구절에서 드러난 메시아의 자기 희생입니다. 이사야 53:12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반면 삯군은 목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양도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에서도 자기 병사의 목숨을 헛되게 만드는 사령관이나 숨기기에 급급한 정부 관료들, 가족의 비리를 숨길 뿐만 아니라 수사조차도 받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이들에게 심판은 곧 국민들의 선거로 내려지겠죠. 현실도 이러할진대 어찌 ‘선한 목자’와 그에게 모든 권한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겠습니까?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고 다시 말씀하시면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고 하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목자와 양의 은유는 ‘아버지’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를 말입니다. 8장 54절 이후 등장하지 않던 아버지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38절까지 9번이나 상당한 부분으로 나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치고 다음주에 이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