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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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9:1-21
오늘 사사기 9장의 말씀은 사사기 전체의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이야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한 비유-요담의 비유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9장을 1절에서 6절까지, 그리고 7절에서 21절까지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6절까지 보면 아비멜렉이 나옵니다. 기드온의 아들로서, 70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지만 그 중에 세겜에 있는 첩의 자식으로 아비멜렉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에서 보면 그 이방 족속, 가나안 족속의 왕의 타이틀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마치 애굽에 바로가 있고, 옛날 로마 제국에 시저가 있듯이 가나안 땅의 왕의 이름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름을 왜 자기 아들에게 붙여주었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그 세겜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기면서 그 가나안의 풍속대로 따라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기드온이 겉으로는 왕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서는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드디어 자식에게 가서는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크게 일기 시작합니다. 기드온은 별 것 아닌 것처럼 금에봇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음란히 섬기더니, 마침내 이방신을 섬기는 길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사들이 나타나서는 이스라엘 밖의 외부의 적들에 대해 싸웠는데 이 아비멜렉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서로 동족상잔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기드온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불신앙적인 요소들이 아들에게 가서는 완전히 드러나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삶에서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어떤 나라들보다도 비율이 높을 정도로 크리스챤들이 많이 있는데, 왜 수없이 많은 서구의 크리스챤 국가들에서 점점 믿는 백성들의 수가 줄어들까요? 그것은 바로 부모의 믿음이 건강하지 못하고 자녀들에게까지 가지 않는 데에 그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은 신앙교육을 받았는데 자녀들에게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신앙 교육을 받은 뒤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제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될 때에 그 자녀들은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의 교회들이 점점 피폐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다시 한번 눈길을 돌려서 봐야겠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하는 것이, 전도의 문이 막혔다 하는 것이 위기가 아닙니다. 더 큰 위기는 자녀들을 성경적으로 교육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사회적으로 대학 입시라는 그 거대한 우상의 관문이 있으면서 그것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의 자녀들조차도 세상적인 삶을 살도록 내몰림을 당하고 있는데, 그 내몰고 있는 주체가 바로 부모들입니다. 일주일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녀들을 교육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그 전에는 그래도 가정 안에서 살았잖아요? 지금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와 학원에 보냅니다. 자녀를 볼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신앙 교육을 합니까? 요즘엔 다 그래야만 한다구요? 그런다고 해서 옛날보다 실력이 훨씬 좋아진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삶의 패턴만이 그렇게 바뀌었냐는 말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떤 시스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에서 25%를 넘게 차지하는 크리스챤 부모들이 각성하고 크리스챤의 방법대로만 한다면,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살고 나라의 교육 시스템도 함께 살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챤의 부모들이 크리스챤 부모 됨을 이미 포기했을 때 그 다음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포기하고 있어요. 크리스챤적 방법으로 교육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중고등부 되면 점점 수가 없어져요. 얼마 전에 전국적으로 큰 교회 목사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지금 중고등부가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중등부, 고등부 학생들이 주일날 학원이 열리면 학원으로 간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봉사하는 법을 그때 배워야 하는데 고등학교만 가면 벌써부터 믿는 부모들이, 중직자 부모들이 와서 은근히 압력을 넣는 거예요. 자기 자녀는 임원에 뽑히지 않게 해 달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우리 교회의 현재 리더로 있는 사람들이 중고등부 때 뭐 했겠습니까? 다 리더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중고등부 때 리더를 해서 대학도 떨어지고 못 살아서 우리 교회의 리더가 됩니까? 부모들이 정말 크리스챤의 방법으로 자녀들을 가르치지 않을 때 이러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부모들이 정말 크리스챤의 방법으로 생활하지 않을 때, 자녀들이 그것을 배우고 부모의 삶에서는 암암리에 나타나던 죄악적 생활들이 자녀에게 가며는 드러나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에 자기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누구보다도 자녀들을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자녀들이 여덟, 아홉 될 때에는 어쩔 수없이 방목을 해야 합니다. 하나, 둘 되니까 끔찍이 여기고 완전히 손 안에 넣고 다 커서도 애기인줄 알고 그러고 있어요. 그 결과, 그 자녀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잘못된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넷은 낳아야 합니다. 너무 손 안에서 내 뜻대로만 키우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 뜻대로 키우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정말 제대로 키우려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정말 누리게 하고 싶으시면 여러분이 먼저 크리스챤의 방법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은 여러분의 뒤꼭지를 보고 배운단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은밀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만, 그것을 본 자녀들은 대낮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행할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축복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께 무릎 꿇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뜻과 다르더라도 순종하겠다고 각오하고 그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믿음을 가지고 가려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 자칫 잘못하면 여러분의 자녀가 아비멜렉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비멜렉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으니까 벌써 자기 마음에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마음속에서 큰 거예요. 기드온이 죽고 나서 드디어 왕이 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자기 외가인 세겜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골육 친척이 아니냐?”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서 군자금으로 은 70개를 받습니다. 아마 자기 형제가 70명이니까 한 명에 은 1개씩 값을 쳐서 암살자를 사려고 했든지 그러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여튼 은 70개를 받아서 그걸로 비류들(깡패들)을 사서 자기 형제들을 죽입니다. 70명을 한 반석위에서 다 죽였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 반석 위해서 다 죽였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이방신에게 자기 형제들을 제물로 바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마침 제일 막내 요담은 빠져서 도망갔어요. 그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왕이 됩니다. 기드온이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기는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겠어요? 아내도 많죠, 자식들도 70명이나 되죠, “야, 우리 집이 앞으로 번성하겠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 대도 못가서 두 명 살아남는데 한명은 살인자요 한명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기구한 운명까지 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세대에 “야, 많은 것을 누렸다.” 이것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심어주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여러분의 자녀들을 가르쳐서 무슨 좋은 대학 가면 부모 품을 떠나게 되고 결국 부모와 같이 살게 되지도 못해요. 나중에 또 유학까지 가게 되면 사실은 영영 헤어지게 됩니다. 그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식 좋으라고요? 뭐가 진짜 행복입니까? 제가 미국에 있다 15년 만에 돌아와서 보니까 가정 가정마다 변화가 참 많아요. 어려서 조그맣던 사촌동생들이 이미 결혼해서 애 안고 있는 걸 보니까 정말 변화가 많더라구요. 그런데 가정마다 보니까 오히려 공부 잘 했던 집안은 대개는 부모와 떨어져 살아요. 그런데 좀 모자라다 싶던 자녀들은 부모 곁에서 참 효도 잘하고 오순도순 재미있게 잘 살더라고요. 뭐가 진짜 행복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자식을 키우는 것이 제일 잘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금 기준으로 이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 시간이 지나서 보면 아닐 가능성도 대단히 많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최선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자식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나는 열심히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는 겁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에는 우리 집 자녀가 다른 집 자녀들보다 더 늦게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지막 종착역은 모르는 겁니다. 축구경기 보셨잖아요? 게임은 끝나 봐야 알아요. 우리의 자녀들도 마지막 그 인생이 끝나는 때에 비로소 잘잘못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두고 산다면, 왜 우리 자녀들에게 천국 소망이 아니고 당장 눈앞의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것만 가르치냐는 말입니다. 정말 그 면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 생각해 봅시다. 정말 여러분의 자녀들을 사랑할 때에 먼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으십시다.
드디어 이제 아비멜렉이 자기 고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최초의 왕은 사울이 아니고 사실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 난 다음에 그 왕을 세우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도망갔던 말째 아들 요담의 입을 빌어서 요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게 7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7절부터 봅시다. “혹이 요담에게 그 일을 고하매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로 가서…” 사실 그리스심산이면 세겜에서 바로 가까운 산이잖아요? 눈 아래에 있는 세겜을 보고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소리를 칩니다. 이 그리심산이라는 말이 축복의 산이라는 뜻인데 축복의 산에서 요담이 하는 말은 그리 축복된 말이 아니에요. 산꼭대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그러한 모양새입니다. 그렇게 전해서 나무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자, 나무들이 나무의 왕을 세우려고 합니다. 왕을 세우려고 감람나무에게 가서 이야기했더니 “내게서 나는 기름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는데 왜 내가 나무 위에서 요동하리요.” 합니다. 무화과 나무에게 갔더니 “내가 열매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는데 왜 내가 나무 위에서 요동하리요.” 포도나무에게 갔더니 “내게 나는 포도와 또 거기서 나는 포도주로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데, 그게 내 삶의 목적인데 뭐 하러 다른 나무들 위에 가서 요동하리요.” 마지막에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라고 했더니 가시나무가 이야기합니다. “다 누구든지 내 밑에 오라. 내 밑에 오지 않으면 불사르리라.” 그런데 가시나무에게 다른 나무들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어떻습니까? 가시가 있어서 아프고 가시나무라 잎이 없어서 그 밑에 가서 쉴 수도 없어요. 햇볕을 피할 수도 없고 괴로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 사사기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가시나무를 왕으로 세운다는 말입니다. 그 일차적인 가시나무가 아비멜렉이예요.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이것이 예언적 비유에요. 사사기의 제일 큰 주제 중의 하나가 뭐냐면 “너희가 하나님을 진정 너희의 왕으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 질문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이 말씀을 볼 때에도 여러분이 항상 여러분의 마음에 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이 진짜 왕이신가? 내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이 정말 왕이신가?” 바로 이 요담의 비유 내용이 그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계속 읽어보면 바로 이 나무의 비유, 특히 이 가시나무의 비유가 그대로 적용이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전부 인간적인 왕이에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왕입니다. 그런 왕들이 세워졌을 때 오히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밖에는 그들에게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어떻습니까? 당장 여기서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의 제일 처음에 어떤 일이 나오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워서 은혜를 베푼 기드온과 그 가족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과 하나님이 세우셔서 내게 은혜를 베풀게 하신 그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리더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에게 복음을 증거한 전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은혜를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여러분에게 도움을 준 그 사람들을, 물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주셨지만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한 은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고마움을 느끼고 고마움을 표현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 그 처음의 마음, 고마웠던 마음, 하나님께 가까이 갔던 그 초심이 여러분에게 더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크리스챤들은 누구보다도 은혜를 받은 그 사람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 내 모든 은혜의 뿌리들입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기관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한국 교회가 서게 된 게 뭡니까? 많은 서구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목숨도 버리고 그들의 모든 인생길도 바꿔가면서 100년 전에 척박한 땅에 와서 복음을 증거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 선교사들의 노고, 그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 그리고 그 때 한국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던 서구 교회들의 헌신, 잊으면 안 됩니다. 광주에서도 양림동 근처 전체가 사실은 선교사들이 구입해 준 땅들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러한 그 모든 복음의 성지가 바로 양림동 근처에 있습니다.그 선교사들의 헌신을 잊지 않는 행동들이 뭘까요? 우리도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열심히 우리도 우리에게 와서 복음을 증거한 그 선교사들을 잊지 않고, 우리도 선교사로 가고, 선교사를 보내고, 우리도 같이 거기에 헌신하고, 금전적으로, 기도로, 내 몸으로, 노력으로, 100년 전 우리나라와 같았던 나라들, 민족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더욱 더 그러한 면에 힘쓸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세워진 것도, 광주 시내에 먼저 세워졌던 교회들이 세웠잖아요. 그러면 그 은혜도 또한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 하나님의 흐름 속에서 우리도 해야 될 일은 우리도 그와 같이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 우리 교회가 세워질 때에도 그 먼저의 교회에서 성도들도 떼고 교역자도 파송하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일들이 거듭거듭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는 행동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에 개척하기가 점점 더 힘들다고 해요. 전에는 소명을 받은, 사명에 투철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한 분이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어디로 가서 사모님과 둘이서 지하든지 어디든지 개척을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그래서 부흥하고 그랬습니다. 오늘날에는 점점 그게 힘들어집니다. 우선 일차적인 문제가 전세금이 없어요. 옛날에는 그렇게 비싸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무슨 돈으로 전세를 얻어서 교회를 세웁니까? 거기서부터 걸림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도 많아지니까 개척교회 갈 일이 없습니다. 점점 개척교회가 제대로 세워질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희박해집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교역자들이 가더라도 그 교회가 제대로 세워지기는 엄청나게 힘들단 말입니다. 요즘에는 성도들이 약아서 교회에 찾아가서 사모님 한 분만 있으면 얼른 나와요. 몇 명만 있으면 부담되니까 안 가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게 바로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또 큰 교회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들을 세워나가는 것이 우리 교회를 세웠던 그 분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우리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매진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 교회 개척팀이 생겨야 하고 최소한 2년 동안은 함께 교역자와 모든 부서를 맡아 줘야 합니다. 처음에 제가 개척교회 하는데, 절대로 교회는 혼자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제가 앞에서 설교하고, 제 아내는 반주하고, 앞에 서너명 앉아 있는데 주일학교는 누가 해요? 혼자 할 수 없는 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아예 교회 개척팀이 있어서 그것을 다 맡아주고 해 주는 사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워지기 쉬어져요. 그러면 한 2년 정도 있어서 어느 정도 교회가 세워져서 ‘아, 이 교회에서 내가 계속해서 봉사해야겠다.’ 이런 은혜가 그 심령에 있으면 거기 눌러 앉고, ‘여기서의 일차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이 끝났다.’ 하면 본교회로 다시 돌아와요. 그리고 또 다른 데에 개척팀으로 나가는 거예요. 저는 이런 개척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100년 전에는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만 있으니까 한나절 걸어와서 예배드리고 또 한나절 가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모이는 것이 힘들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쪽 동네,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처음에 했어요. 우리도 그 일을 하자 이겁니다. 우리도 원래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니까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해 봅시다. 우리에게 할 일이 많이 있어요. 교회 와서 ‘나를 잘 돌봐주나, 안 봐주나….’ 그러다가 심방도 안 온다 싶으면 시험 들고 말하고 왕왕거리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런 봉사할 곳이 있는가 생각해서 함께 열심히 같이 한번 봉사해 봅시다. 일을 할 때 시험들 일도 없고 말할 일도 없고 어떻게 하면 이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까 그걸 가지고 한마음이 되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인생길 가면서 세상 고민만 머릿속에 들고 가는 사람을 일찍 늙어요. 세상 고민이 머릿속에 있으면 그 속에 천국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고민을 한번 해 보십시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고민을 하게 하고 싶어요. 그럼 여러분이 일을 하려고 노력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요. 머릿속에 하나님의 고민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천국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고민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또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를 통해서 왔던가를 깨닫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여러분이 할 일도 저절로 생깁니다.
오늘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반대의 길로 가지 않습니까? 기드온을 잊어버려요. 은혜를 준 대상을 잊어버립니다. 잊으니까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깁니다. 드디어 기드온의 자식 70명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게 된 마음의 발단이 뭡니까? 세겜 사람들이 그렇게 같이 아비멜렉의 일에 동조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우리 형제라.” 1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오늘날 일어나서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 칠십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의 왕을 삼았도다.” 리더를 세우고 왕을 세우는 데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고 인간의 기준, 내 기준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에요.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 기준은 뭡니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세상적 기준은 그렇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인가 아닌가?” 계속 고향을 가지고 가르는 것을 보면 무서워요. 꼭 가를 때, 먼저 남북으로 갈라요. 남북으로 가르고 나면 동서로 갈라요. 한번 동서로 가르고 나면 남북으로 또 갈라요. 남북으로 가르고 나면 또 동서로 갈라요. 그리고 마직막에는 자기 집에서 형제끼리도 갈라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리더를 뽑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와 관계가 있냐 없냐 그것만 가지고 뽑게 될 때 진정 하나님이 세우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세워지겠냐는 말입니다. 저는 그게 참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온 사회의 리더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앞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어느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현 대통령과 앞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대요. “하나님, 정말 대통령의 자질에 맞는 사람을 뽑게 하옵소서. 우리 지역의 시장도 마찬가지고, 국회의원도 마찬가지고, 가장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들을 뽑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리더가 될 때에 우리 삶도 평안해집니다. 그것은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리더를 세울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우자는 말입니다. 요즘에 많은 큰 교회들이 담임 목사님이 은퇴하고 새로운 목사님으로 채워지는데, 재미있는 현상들이 많습니다. 그 새로운 목사님의 조건에 보면, 물론 오래 해야 하니까 나이제한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게 “박사” 일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면 오히려 교회에서 안 뽑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가르치려고 배웠기 때문에 목회와는 서로 안 맞지 않습니까?” 하면서 안 뽑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 타이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정말 좋은 목회자를 발견했는데 박사 학위가 없다고 그 분을 청빙 안 했어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어느 교회는 청빙조건에 “목사님, 사모님 양쪽의 친가 외가까지도 다 믿을 것” 목회하는 것하고 외갓집이 예수님 믿는 것하고 무슨 관계입니까. 그리고 영어를 어떻게 해야 하고, 외국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고, 학위가 어떻고 해서 진짜 거기에 딱 맞는 목사님 한 분을 모셔다 놨는데 그 분이 지금 목회를 잘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이 실제로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이야기한 기준이 아니라 세상적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자질을 잘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에서 장로님 뽑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님, 안수 집사님, 모든 중직자들을 뽑는 것에서도 인간적 기준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무슨 인기투표 하듯이 해 가지고, 계를 최소한 10개는 들어야 뭐가 된다는 말도 있고…. 매일 계만 다니는데 언제 교회 일을 하고 언제 무슨 일을 합니까? 그리고 계 할 때 보면 가서 무슨 얘기 하겠어요? “우리 교회 잘 돼야지.” 그 얘기 합니까? 말하기 좋은 헛소문, 입소문들만 그냥 증폭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 인기투표 식으로 누가 중직자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중직자들을 뽑을 때 봐야 할 기준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리에 대한 야망이 있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여기 지금 비유에 나오는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는 전부 어떤 사람입니까? ‘어찌하든지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생활을 할 것인가? 어찌하든지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유익한 삶을 살 것인가?’ 이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리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그 분들은 열심히 일을 잘 할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뽑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궁극적인 질문이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왕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교회의 왕은 하나님이시냐?” 바로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왕으로 모셔진 교회라면 우리가 함께 교회의 지도자를 뽑을 때 기도하며 누가 가장 합당한 사람인가 기도하며 뜻을 모으고 세워야죠. 그렇게 되면 정말 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일을 맡게 될 때 모든 성도들이 거기서 복을 받습니다. 내 손으로 뽑지만 그게 결국 심는 대로 거둡니다.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지금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뽑았잖아요? 결국 그 아비멜렉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할 때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면을 우리가 잘 생각해 봅시다. 정말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그 교회가 가는 방향과 비전을 정하는 것은 리더들이 정합니다. 이 리더들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그 교회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도 이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훈련 받아야 되고, 또 훈련 받으면서 그 안에서 가장 그 자질에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들이 리더가 될 수 있는 시스템도 갖고, 그런 사람들을 뽑으려는 그러한 은혜로운 마음들이 온 성도들에게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앞으로 10년, 20년, 100년이 탄탄합니다. 우리가 든든한 교회로 세워갈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부터 20년, 30년 전에 한국 교회에서 뿌린 씨앗을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뿌리는 것이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말년, 이 때에 우리가 또한 그 열매를 거둡니다. 마음을 다해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 교회에 세워진 리더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에 세워질 직분자들, 중직자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우리 한국 교회에 세워질 리더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 전체 한국 사회가 은혜롭게 변할 것이고 우리가 믿음 생활 하는데 부족함 없이 평안하게 변할 것이고, 또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교회, 수많은 사역자들이 우리 교회에서 나와서 앞으로 한 교회를 짊어질 수 있는 목회자들도 많이 나오고 사모들도 많이 나오고, 또 교회 안에서 일을 하는 아주 대표적인 가장 존경받는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나올 수 있는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