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 두려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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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27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초저녁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체험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떼주고 또 떼주어도 없어지지 않는 그 기적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또 얼마나 환호했겠습니까? 아마 나누어 주는 제자들의 옷자락을 만져 보려고 밀고 당기고 그랬을 거예요. 우쭐하고 가슴 벅찬 마음으로 그 초저녁을 보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감격이 식기도 전에 엄청난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이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저는 흥분해서 오병이어를 떠올리던 제자들에게 그 뜨거운 감격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이 풍랑을 만나 고통받는 제자들을 보면서 이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또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지금 일이 잘되고 사업도 잘되고 자녀들도 원하는 대로 잘 풀려서 순풍에 돛단 것처럼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아가는 분이 계신다고 할지라도요. 우리가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되는 것이요. 언제 먹구름이 몰려오고 풍랑이 몰려올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반대로요. 지금 먹구름이 몰려와서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고 갑자기 병은 찾아오고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서 답답한 현실에 빠진 분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신다면 소망을 갖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반드시 먹구름이 물러가고 화창한 날씨가 찾아오듯이 그런 인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제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가만히 들여보니까 문제점이 하나 발견이 되는데요. 그게 뭔지 봤더니요.
지금 풍랑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더라는 것입니다. 22절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결과 24절에,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여러분, 이 22절과 24절이 조합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아니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탔는데 이런 결과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등 떠밀 듯이 재촉해서 배를 태우셨잖아요? 그래서 순종했더니 죽을 것 같은 풍랑이 인생에 찾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단지 성경에만 있는 말씀이 아니고요.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요. 그래도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고 주일이면 딴 데 안 가고 예배드리러 오고, 헌금 생활 잘하시고 봉사도 하시고 세금도 제때 다 납부하시는 그런 많은 분들 가운데 말씀에 순종했더니 갑자기 인생에 이런 폭풍이 찾아와서 고통으로 몰고 가는 이런 일들이 우리 삶 가운데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냐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둥, 말씀에 순종하면 물결이 잔잔해 질거라고 설교를 하고 있지만, 현실은 아닌 경우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왕 그렇게 됐다면 예수님이 실수로 풍랑 이는 물가로 재촉해서 몰아넣으셨다면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마가복음에 보면 기도하시던 곳에서 이런 제자들의 상황을 내려다 보신 것 같아요. 제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아셨어요. 그런데 언제 제자들을 구하러 오셨는가 보니까요. 25절에 밤 사경에 오셨다고 합니다. 밤 사경은 로마식으로요. 우리 시간으로 하면 새벽 3~6시 사이를 사경이라고 합니다.
언제부터 풍랑이 일었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요한복음 16장을 보니까 제자들이 해가 저물 때 바다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을 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끝나고 어두워질 때 무렵에 배에 올라서 밤 9시 전후로 풍랑을 만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정말 밤 9시쯤 풍랑을 만나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면 새벽 3시~6시 사이니까 못 잡아도 6시간 정도를 그들이 고통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 앞에 아픔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주의 자녀들이 말씀에 순종하다가 고통을 당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뻔히 아시면서도 고통을 방치해 놓는 것 같은 이런 상황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 내내 이걸 가지고 고심을 했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성의 없이 성경에 있는 한 두 구절 가지고 이론적으로 말해버리면 간단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성도님들이 있어요. 신실하게 살아가 보려고 하는데 수년 동안 건강이 안 좋아서 몸 고생, 마음고생 하시는 분들이 떠오르는데요. 대충 이 본문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좋아질 거라고 얼버무릴 수가 없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고심하고 고심했는데, 답이 나오질 않아요.
그런데요. 여러분, 제가 내린 결론이 뭔지 아십니까? 관점의 차이로 이 문제를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점의 차이.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과 제자들의 관점의 차이. 오늘 우주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관점이라는 게 이런 뜻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파악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이게 관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건을 놓고도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관점이 달라요.
곧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는데요. 정치적인 문제를 두고도 보세요. 어떤 사건이나 이슈를 두고도 여당이 보는 관점과 야당이 보는 관점이 너무 달라요.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는 답을 찾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의 결과를 놓고도 예수님의 관점과 제자들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요. 오병이어 앞에 열광하는 군중들, 예수님을 왕으로 삼자고 군중심리에 떠들썩하던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예수님의 반응을 보세요. 22~23절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인간의 관점으로는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런 상황을 만나면 대박이 터졌다고 할 것입니다. 대박이 터져서 가만히만 있어도 유대인들의 왕이 될 상황이에요. 보편적으로 우리가 이런 일을 경험하면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저 같으면 제자들을 시켜서 출입구를 봉쇄할지도 몰라요. 이런 열광적인 분위기에 군중심리를 더해서 더 열광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관점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주님께서는 그 현장을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판단하시는 거예요. 심지어 할 수만 있으면 그 현장을 떠나기를 원하시더라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게 주님의 관점이에요.
지금 그 열광하는 군중들을 보면서 제자들을 여기에 내버려 두면 큰일 나겠다 싶으셔서 황급히 제자들을 풍랑 이는 바다로 몰고 가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무리와 격리되어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 고독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 사건 앞에 13절을 보시면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여러분, 빈 들은 고독을 상징하는 장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박수치고 열광하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위험하다고 판단하셨는지 그 자리를 떠나 빈 들로 가버리세요. 고독한 자리에 가세요.
인간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것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사람은 이 고독이라는 게 대인관계에 실패한 무능한 사람들이 얻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고독의 길로 찾아가시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게 뭘까요? 지금까지 익숙한 내 관점,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을, 말씀을 통해 깨달아서 그분의 관점에 내 관점을 맞추려고 애쓰고 교정하면서 몸부림치는 게 신앙생활 아닙니까?
세상의 가치관에 익숙해 있던 우리의 과거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천국의 가치관, 천국의 관점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 아니냐고요. 그렇다면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관점으로 보는 성공, 우리의 관점으로 보는 실패에 많은 교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목사니까 이런 관점으로 저에게 적용해 보는 거예요. 원치 않는 풍랑을 만나서 죽을 것 같은 고생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의 관점을 재수 없거나 자주 받아서 그런다고 하는 생각을 지우시고 이런 극심한 인생의 풍랑이 진정한 축복을 누리기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던졌던 두 번째 문제 제기요. 왜 그 위험에 처한 제자들을 빨리 구하러 오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한 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제자들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제자들이 그 현상을 보고 콧방귀를 뀌고 있었을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 배에 타고 있는 제자들 대부분이 전직 어부 출신이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갈릴리 바다는 자기들의 주 무대에요. 나와바리! 설교 강단에서 이런 말 쓰면 안 되는데…. 아무튼 그래요.
그런 풍랑을 한두 번 만났겠냐는 거예요.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물결이 치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에 계산이 다 나와요. 이럴 때는 키를 이렇게 조작하고 이렇게 저렇게 배를 움직이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자신만만한 거죠. 만약에요. 예수님께서 그 시점에서 찾아오셨다면 100%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참, 예수님, 오실 필요 없는데, 우리가 다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데’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언제 오셨다고요? 밤 사경요. 저는 밤 사경. 새벽 3~6시 사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면은요. 제자들이 풍랑이 막 일기 시작한 그 자신만만한 할 때는요. “내가 이거 다 경험해 본 일”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수고하고 애를 써 보는데, 상황이 좋아지질 않아요. 점점 더 불안해져요. 자기들의 노하우와 기술을 다 동원했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요. 이 밤 사경이라는 표현을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밤 사경이라는 것은 어느 시점인가?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의 노력, 내가 가진 노하우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그 시점. 이것이 바로 밤 사경입니다.
모든 인간의 노력,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들은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풍랑 앞에 무용지물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절망하는 그 한계의 상황. 이게 바로 밤 사경이에요.
놀라운 것은요. 주님은 그때야 일하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저는 제 머릿속에 담고 있는 몇몇 단어 중에 ‘밤 사경’이라는 단어를 제 머릿속에 담고 있습니다. 교만이 삐져나올 때마다, 제 목회 노하우를 가지고 문제를 풀려고 노력할 때마다 ‘밤 사경’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 보시길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요. 아직도 내 노하우가 있고, 내가 가진 힘이 있고, 학창 시절부터 늘 인정받아왔던 내 능력과 경험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팔짱] 팔짱 끼고 밤 사경까지 기다리십니다. 지켜보시는 거예요.
저는 오늘 말씀 앞에 여러분들의 밤 사경을 빨리 단축시키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수고를 내려놓고 우리의 자신감을 내려놓고 내 가정을 내가 책임질 수 있고 내 자식은 내가 일류로 키울 수 있고 직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그 순간이 꺾이는 게 바로 밤 사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참 많이 묵상을 해봤습니다. 예전에도 많이 읽었던 말씀이지만, 아예 제 책상에 이 본문을 펼쳐놓고 일주일 내내 묵상을 해봤어요. 그 성경책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하나님이 이 미숙한 저에게 어떤 영감이라도 주실까 봐 계속 묵상하고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읽고 또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이 고난은 이유 없는 고난도 있겠지만, 어떤 고난은 내 범죄의 결과일 수도 있고 내 지혜 없음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불순종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애매한 고난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고난이에요. 그리고 이런 고난의 과정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축복이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축복이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능력 경험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일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일하시되 우리가 원하는 타이밍이 아니라, 우리의 조급함 때문이 아니라, 밤 사경. 그분의 시간에 일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론으로만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오늘 한 가지 확실히 믿는 것.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다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 그 풍랑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풍랑은 반드시 잠재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말씀에 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특징 두 번째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요. 이 앞에서의 예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시지만, 이 위로하심이라는 것은 예외 없이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제가 본문을 묵상하다가 발견한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요. 예수님께서 고통하는 현장에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폭풍을 잠재우는 일이 아니었고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27절을 보세요.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합독]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은요. 이런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고통 자체의 무게보다도 이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요. 아무도 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을 것이라는 이 버림받은 느낌이 자기를 괴롭히는 게 그게 인간이에요. 친하던 사람들이 슬슬 피합니다. 도와주고자 하던 사람들이 주변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버린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럴 때 [손 내밀며] 하나님은 위로의 손을 내밀면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없지만,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 한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이게 뭔가 하면은요.
여러분, 인생길 가운데 이런 풍랑을 만나고 고통을 만나잖아요? 근데 그 고통이 과연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재수가 없어서, 저주받아서 일어나는 고통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써 일어나는 고통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압니까?
제가 중요한 구분법을 알려 드릴게요. 오늘 여러분들이 당하는 이 고통이 이게 정말 저주와 재수 없음에 결과인지, 오히려 훗날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인지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하나 있는데, <교회오빠>라는 책과 다큐 영화로 유명했던 이관희 집사님 부부 이야기를 해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진)
이관희 집사님과 오은주 집사님은 신실한 믿음의 가정으로 결혼 3년 만에 첫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데요.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하던 날 남편인 이관희 집사님이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시어머니는 아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며 우울증으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죠.
그 다큐 영화 초반부를 보면은요. 여느 가정처럼 분위기 좋고 화목한 모습만 보여요.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암 판정 그것도 말기암. 풍랑도 이런 풍랑이 없죠.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을 거예요. 실제로 이관희 집사님도 욥기 10장 8절에 “당신의 손으로 나를 빚어 만드시고 아제 나를 아예 없애려고 하십니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요. 그 어머니의 차가운 시신을 안고 눈물과 고통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관희 집사님이 겨우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자 이제는 아내인 오은주 집사님이 혈액암 4기 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제 막 겨우 항암을 끝냈는데 부부가 모두 말기암 환자로 투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정말 숨 쉴 틈조차 없이 고난이 밀려오는 것 아닙니까?
이들 부부가요. 이때 당시에는 서로 보는 앞에서는 절대 안 울었대요. 서로 너무 불쌍하니까 안 보이는 데서만 우는 거예요. 아내는 어떻게든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병간호하는데요. 그럴수록 남편의 상태는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분들의 다큐가 방영이 되자 많은 기도의 동역자들을 붙여주셔서 감사한 마음도 컸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함께 말씀을 붙잡으며 서로를 위로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 부부를 보고 현대판 욥과 같다고 하니까 욥기 말씀을 많이 묵상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아내는 욥기의 결말을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갑절의 복을 부어주실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을 하면 남편은 진지하게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은주야, 너는 욥기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야. 욥기의 진수는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에 있는 거야. 우리가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변하여지고 단련되는지 하나님은 그걸 보시는 거야”
관점의 차이 아닙니까? 우리가 익숙하게 해석하는 욥의 말씀을요. 밤 사경. 고통 중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자 이분이요.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결국 암 전이가 심각해져서 이관희 집사님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요. 이분이 얼마나 끝까지 말씀을 붙들려고 했는지,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깨끗한 정신으로 말씀을 붙잡기 위해 모르핀 주사도 거부한 채 눈을 감는 순간까지 말씀과 기도로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제가 <교회오빠>라는 책도 제가 읽어봤는데요. 책의 겉표지에 이관희 집사님의 어록이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눈부신 삶을 사는 사람을 증거로 삼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서 주님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도 증거로 삼는다.” [다시 한번] 그러면서 욥기 42장 5절의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합독]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러분, 저는요. 이렇게 살고 싶어요.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품에 안긴 이관희 집사님이 너무 부러워요. 오늘 말씀 준비하면서 그 책을 다시 한번 보는데요. 이 욥기 42장의 말씀이 너무도 다르게 다가오는 거예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크게]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 말씀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얻은 故이관희 집사님의 죽음이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어떻게 결과론적으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길 가운데 겪는 그 고통, 인생길 가운데 겪는 좌절스러운 그 풍랑이 저주받은 결과인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축복의 통로인지를 아는 구분법 하나. 그 고통 중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으면 그것은 축복의 통로임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고통의 경중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 이 말씀이 들려지는 분들이라면, 그 고통은 故이관희 집사님 부부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이기에 수많은 성도님을 이런저런 상황에서 만납니다. 정오의 햇살처럼 한창 봄날을 보내는 것 같은 분들도 계시지만, 1년, 2년, 3년 도대체 이 문제는 언제 풀릴 것인지, 이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밤 사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오래 씨름하시는 분들도 만납니다.
저같이 의지가 약한 사람은 열 번도 떨어져 나갔을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떤 분은 너무도 답답하시니까 “목사님, 너무 힘들어요. 내가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는 게 두려울 정도로 힘들기만 합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목사로서 저는 너무 안타까워요.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웬걸요? 그렇게 밤 사경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나니까 회복되어 계세요.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나면 회복되어 있으세요. 이 비밀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고통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의 비밀이더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꼭 한밤에 날아오는 비수와 같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래서 인생은 꼭 나그넷길 같습니다. 정착할 곳도 마음 둘 곳도 없어요. 이런 인생길 가운데 오병이어 축복, 이다음에 찾아오는 이 풍랑 속에서 절망하던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험한 물결이 찾아올 때 여러분들의 삶 속에 두 가지의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첫 번째 확신! 언젠가는 이 풍랑이 반드시 그친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이 풍랑을 잠재워 주실 날이 있다. 여기서 내 인생 끝나지 않는다. 이 한 가지를 확신하시고요.
또 한 가지의 확신!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 이 위로하심이야말로 나그넷길 같은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따뜻한 음성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위로와 사랑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후찬양 : 아무것도 두려워말라
❙합심기도
여러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우리 인생이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시 이 자리에 광풍을 만난 배처럼 밤 사경까지 낙심하고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 이 위로의 말씀이 새 힘을 주시길 바랍니다.
이관희 집사님처럼요.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간증을 하나님께서는 증거삼아 주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실 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밤 사경까지 잘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관점이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 하시면서 그 죽음의 두려움 속에 밤 사경까지 고통 당하던 제자들을 찾아와 손 내밀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우리도 경험하길 원합니다.
인생의 험한 물결이 찾아올 때 언젠가는 반드시 이 풍랑이 끝날 것이다. 내 인생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시고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 하시면서 손 내밀어 주시는 그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간증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밤 사경이 지나면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정오의 햇살처럼 찬란한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이관희 집사님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관점을 바로 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 복된 인생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감사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밤 사경에도 “나니, 두려워말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의지하여 다시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길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