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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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죽고 로호보암이 왕이 되자 북쪽 지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대처로 북쪽 지파들은 독립할 명분을 얻어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북이스라엘로 분리된다.
1-4절: 르호보암은 반란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소집하여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 스마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쟁을 중단한다.
선지자 스마야는 ‘이 일이 내게로(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하였고, 르호보암을 비롯한 모든 유다 백성은 그대로 돌아갔다.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하나 된 나라를 둘로 나눈 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무리를 몰아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의 한 마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라는 말에 순종하여 돌아선다.
그들에게 명분 뿐 아니라 실리도 있었다. 나라가 둘로 나누어질 때 입을 큰 경제적 손실은 당연하다. 또, 갓 왕이 되었는데 왕의 권위를 세워야 통치에 수월하다. 처음부터 왕이 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한 마디에 돌아섰다.
르호보암을 그닥 좋은 평가를 받은 왕은 아니다. 그런 르호보암도 하나님의 말씀에 돌아섰다. 자기 생각, 이익, 입장 등 수많은 이유와 핑계가 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것이 르호보암의 나라가 이후 빛을 발하는 시기의 이유가 되었다.
사람은 불확실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하나님 관계서도 확실하고 예상 가능하길 원한다. 신앙에서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며 만족해하기 쉽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할 선을 정하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대표적은 신앙에 일종의 루틴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는 태도이다. 신앙의 루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순종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냥 따르는 그 ‘마음’이다.
어떤 이에게는 이 말이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 안다면 이 말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한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길 바란다.
5-12절: 이후 르호보암은 나라에 방비하는 성읍을 많이 세웠다. 이 성읍들은 북쪽이 아닌 동쪽, 남쪽, 서쪽의 길을 방어한다. 이 성읍들은 이집트에서 오는 애굽왕 시삭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12장에 르호보암은 애굽 왕 시삭의 침공으로 큰 곤경을 겪는다.
르호보암은 자신이 방비하는 성읍을 세웠기에 이방 나라가 침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르호보암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자 그가 세운 성읍들이 무색하게 애굽 왕 시삭이 침공한다. 르호보암은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큰 곤경을 당한다. 르호보암이 회개하자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약간의 회복을 허락하셨다.
아무리 준비하고, 계획하고, 지혜롭게 대처해도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으시면 안전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렇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다. 지금 계획하는 일이 있는가, 애써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는가, 잘 준비되고 있는 어떤 행사가 있는가. 여러분의 노력에 의한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모든 노력이 힘을 잃게 된다. 그 일과 프로젝트, 행사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지지 않고, 상황이 도와주지 않는다. 어렵게 어렵게 헤쳐나가지만 결과는 초라하게 된다.
먼저 하나님을 의지해라. 그 안에서 여러분에게 있는 지혜와 능력, 노력으로 일하라.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정하기를 잊지 말라. 그러면 여러분이 노력한 것에 열매를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
13-17절: 여로보암이 제사장들을 직분에서 쫓아내고, 우상을 섬기자 제사장을 비롯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르호보암에게 돌아온다. 덕분에 유다 나라는 강성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 기간을 3년이라 못 밖아 말한다.
여로보암이 왜 우상을 선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다에서 분리되어 세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유다와 차별을 택한 것같다. 여로보암의 선택은 북이스라엘의 영적 흐름을 결정했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갔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되었다. 여로보암이 우상을 선택하자 북이스라엘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이 남유다로 이주한다. 북이스라엘은 더 우상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과 상관없어졌다. 이는 성경에서 반복되는 두 가지 흐름을 보여준다. 가인와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갈라디아서에서는 하갈과 사라로 비유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그런 흐름의 하나이다.
성경 전체에 두 흐름이 존재한다. 우리는 생명의 흐름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 성령을 따라 난 자, 은혜 아래 있는 자.
물론 남유다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징계를 받지만, 북이스라엘과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 앞에 질적으로 다르다. 겉으로는 죄를 범하는 것이 비슷해 보이지만 동일하지 않다. 성령으로 난 자, 은혜 아래 있는 자, 순종하는 자, 모두 죄를 짓는다.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여러분 항상 이 은혜 아래 머물기를 바란다. 이것은 그냥 그렇게 되었고,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바울의 경고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갈 5:1-4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교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된 경고에 귀 기울이자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은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로 살아가기 바란다.
18-23절: 이후 르호보암이 얻는 아내들과 자녀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르호보암은 장자를 통해 왕위를 잇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첩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것은 신명기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신명기 21:15-17
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르호보암이 신명기의 율법을 어겼다. 대단한 불순종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2장 1절에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다고 기록되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흘히 여기는 태도가 결국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버리는 지경으로 확장되었다. 둑이 무너지는 시작은 작은 구멍이다. 우리가 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중심의 문제다. 11장 초반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르호보암이었으나 작은 말씀을 어기면서 율법을 버리는 지경까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작으냐, 크냐의 문제가 아니다, 쉽게 여기느냐 중히 여기느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다. 하나님을 귀히 여기길 바란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