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통한 시험 (막 12:13-17)

매일성경(마가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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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가 살펴본것처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그 비유가 자신들에게 해당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두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음모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반목하던 세력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거기에 바리새인들과 헤롯당까지 모두 예수님을 잡기 위해 공동전선을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들이 평소에 친했느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사두개인들에 속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메시야도 믿지 않았으며 로마 통치에도 순응적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고 메시야 사상을 신봉했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헤롯당은 헤롯 왕조의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로마에 동조하는 세속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서로 연합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예수님을 잡는데는 서로 의기투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왜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오늘 본문 13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책잡다’로 번역된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요, 주로 ‘덫을 놓아 사나운 가축을 잡는 것을 말할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말은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덫으로 잡아 꼼짝달싹 못하도록 만들듯이 예수님의 말을 트집 잡아 곤경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가 실추되어 사람들이 더이상 그를 따르지 않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14절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예수님을 한껏 칭찬합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칭찬합니까?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참되셔서 권세 있는 자들을 편애하거나 맹종하지 않고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틀린말이 아니지요. 그러나 이 말은 칭찬이 아닌 아첨입니다. 사실 칭찬과 아첨은 비슷해 보이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요, 가장 큰 차이라면 칭찬이 진심을 담고 있다면, 아첨은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들의 칭찬이 왜 아첨입니까? 목적이 불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몰락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지금 아첨을 떨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아부한 후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묻습니다. 이들이 질문한 납세문제는 예수님을 말로 책잡으려고 하는 그들의 의도에 가장 적합한 문제였습니다.
이 당시 세금 문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뜨거운 쟁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압제자인 로마를 지원하는 일이었고, 그 돈 자체가 굴종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금으로 거둬들인 돈의 상당량이 이교도의 성전 유지나 로마 상류층의 사치에 사용되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세리들이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하여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을 가능케 하는 징수체계도 싫어했습니다. 이당시 로마 정부는 일정한 지역세를 로마에 내면 그들이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기를쓰고 세금을 징수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금 납부를 거부하면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이었고, 예수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이 대답을 원했을까요? 아니요, 그들의 목적은 대답이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이 세금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헤롯당은 정치적인 이유로 세금 납부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둘중에 어떤것을 택하던 곤경에 처할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등을 돌리게 되어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세금 납부를 해서는 안도니다고 하신다면 헤롯당은 예수님을 반역죄로 몰아 지금 바로 헤롯에게 넘겨주게 될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이 더 절묘한 것은 예수님의 대답이 ‘예’나 ‘아니오’ 둘중의 하나로 대답할수밖에 없게 했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이 질문을 던지고 예수님을 완전히 외통수에 걸리게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위선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를 칭찬하고 있지만 그들의 질문은 자신을 시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이 당시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리고 앞면에는 원계관을 쓴 가이사의 초상이 세겨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전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이 적혀 있는지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씨의 주인공이 가이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오늘 본문에서 굳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에게 질문하여 가이사라는 대답을 받아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초상과 글씨가 새겨진 동전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대답처럼 가이사의 초상과 글씨가 새겨진 동전의 주인을 가이사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본문에서는 가이사의 것만 말할뿐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알 수 없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것’은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납세를 인정하시면서도 이 세상 만물에 대한 무한하고도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것’을 동시에 언급하심으로, ‘가이사의 것’이 하나님의 것에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가이사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이사의 세계가 가장 넓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 가이사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가이사보다 더 큰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비록 가이사가 이 땅에서 신처럼 군림하고 있어도 진짜 왕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국민으로 살아가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늘 나라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하나님께 우리의 최고의 순종과 헌신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정부에 대한 합당한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두 의무를 다할 것을 우리에게 주문합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어느것이 먼저 입니까? 국가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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