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아닌 최선의 삶을 사는 사람

사도행전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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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몇달동안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과정과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눴습니다. 사도행전 11:18 의 마지막은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였습니다. 그동은 복음은 유대인들의 전유물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방인 고넬료와 그 집에 있던 사람들이 구주를 영접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사건은 지난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확실히 그러므로>
본문 19절을 보니
사도행전 11:19 NKRV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앞의 이야기와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가 동시에 또는 동시대에 진행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문맥과 상황에 따라서 앞 뒤의 사건이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무거운 짐을 옮기는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도와줬다.”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무거운 짐을 옮기는 그때 갑자기 멧돼지가 튀어 나왔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말로는 앞뒤의 상황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정확히 알기에는 부족합니다.
오늘 본문을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확실히’를 뜻하는 ‘멘’이라는 단어와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라는 뜻을 가진 ‘운’이란 단어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를 연결지어 해석하면 “그 때에”가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를 뜻하는 “확실히 그러므로”가 됩니다. 이전 사건의 필연적인 결과로 이후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19절에서 누가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베니게는 현재의 레바논 지역이고 구브로는 이스라엘 서쪽 해안에서 제일 가까운 섬입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수도였습니다. 현재는 터키(튀르키예)에 속한 도시입니다. 특히 수리아 안디옥은 지금은 약 3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이지만, 당시에는 50만 여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19절에서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빌립이 복음을 전했던 사마리아나 베드로가 돌아 다녔단 룻다, 욥바, 그리고 가이사랴모두 유대지역 내에 위치한 도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19절에 나온 세 지역은 모두 유대 땅 밖 있는 곳들입니다. 그러나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이 실현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실현이었습니다. 이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 이들 역시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처럼 복음은 유대인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 끝을 보면 “유대인에게만 말씀은 전하였는데”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전히 초대교회가 복음이 품을 수 있는 곳을 제한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그 시작이 대다수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빌립과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은 온 세계 열방을 품는다는 것을 확인 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빌립 집사가 유대인들이 상종하기를 극도록 꺼려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사마리아 성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전도여행 코스는 룻다와 욥바와 가이사랴였습니다. 이미 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의 임재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였던 베드로였지만, 그는 예루살렘에서 선교사역을 보고한 이후 더 이상 비유대인인 이방인들과 비유대지역인 유대 땅 밖에서 복음을 전한 모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이방인들과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가 반쪽짜리 복음 전파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비록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로 가지 않았지만, 이름 없는 성도들을 통하여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사도행전 11:21 NKRV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님의 손이 이름 없는 전도자들과 함께 해주셨다고 합니다. 성령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함께 역사여 주셨습니다. 다수의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안디옥에서 일어났습니다. 한번 터진 뚝의 물을 쉽게 막지 못하는 것처럼 한번 터진 성령의 역사는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바나바를 보내어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을 확인하고 교회를 돌보게 했습니다.
<역사를 바꾼 안디옥 교회>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사건은 초대교회 역사에서 있어서 정말 중요합니다. 먼저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세계에 세워진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애 가서 복음을 전한 것도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20 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갔던 여섯 명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고넬료의 가정에 있었던 여러 이방인들 그들이 함께 구주를 영접하고 찬양한 것은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집에서 시작된 이방인 교회는 유대 땅 안에서 시작된 교회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수리아 안디옥도 이방인 교회였지만, 그 시작이 유대 땅이 아닌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을 위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두번째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을 배출한 교회였습니다.
본문 25~26절을 보면
사도행전 11:25–26 NKRV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고 말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바나바는 그동안 자신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에 머물던 사울을 안디옥으로 부르고 그곳에서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사울은 사도 바울의 옛 이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열심히 1년 동안 섬긴 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세계 선교에 나섰습니다. 바울의 전도는 교회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바꿔놓았습니다. 로마제국이 복음화 될 수 있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 26b절을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뜻은 크리스티아노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그 시대에 있었습니다. 헤롯의 사람들이란 뜻의 “헤로디아노이”, 황제의 사람들이란 뜻의 “카이사리아노이”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헤롯과 황제의 사람들은 각각 그 이름을 가진 자를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헤롯의 사람들은 헤롯에게 충성하고 황제의 사람들은 황제에게 충성하고 그 명령을 목숨을 다해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헤롯의 사람들과 황제의 사람들과 차이점이 있었다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헤로디아노이, 카이사리아노이라고 불렀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안디옥의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졌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지키며 따랐습니다. 율법주의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갔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크리스티아노이,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성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어느정도 유추는 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4-47 을 보면 서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재산도 나눠주고, 마음을 같이하여 매일 성전에 모이고, 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나눴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6:1-7 에서 구제문제로 헬라파 성도들과 유대파 성도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출신을 따져 사람을 세워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은 사람을 세워서 일을 아주 원만하게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돌보기 위해 파송된 바나바도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행 11:24)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습니다.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 닮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들이 바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이 소금과 빛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최고만 되고 싶은 그것만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예수님처럼 살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박수와 칭찬을 주시며,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어 가실 겁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최선을 다하는 신앙, 안디옥 교회와 같은 칭찬받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 213장 나의 생명 주께 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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