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을 주님께(막 12: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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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불신앙적인 위선과 과부의 신앙적인 태도를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과부는 이 당시 사회에서 매우 대조적인 신분과 위치에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서기관들은 존경을 받았지만 과부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체계를 깨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을 비판하십니다. 이 당시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말씀하시며 그들의 해석이 틀렸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서기관들의 해석을 거부하셨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한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는 자신들을 이방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할 다윗의 자손을 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비록 다윗의 자손이지만 다윗마저도 ‘주’라고 부를 만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주권을 가진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서기관들도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를 유대인들을 위한 정치적인 메시아로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자기들의 바라는 기대를 메시아에 투영해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을 고집할때가 많습니다. 세계 제 2차대전때 독일은 그리스도가 자기편이라고 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예수님이 자기 편이라 승리를 주실것이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스포츠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승리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상대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편이 되어야 합니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라는 것이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고요, 우리의 기대대로 움직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기대할때, 우리는 예수님을 우상으로 삼는 것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살아갈때에, 내 마음대로 내 기대대로 예수님을 고집하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깨달아서 그 뜻대로 살아가기에 힘쓰기를 소망합니다.
서기관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을 비판하셨던 예수님은 이어서 서기관들의 위선도 지적하십니다. 이 당시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위세를 돋보이게 하는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여기서 긴 옷이란 종교지도자들이 입는 돗, 특별히 종교행사가 있을때 입는 옷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옷을 입고 으스대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옷을 입고 성전이나 회당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에도 나타났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도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마태 복음 23장 7절에 의하면 사람들로부터 ‘랍비’라는 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회장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이 얼마나 허영심과 교만함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인 과부들의 재산을 집어삼키는 탐욕스러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옛날에 우리 나라 양반들이 집에서 글이나 읽으면서 가난하게 살았던 것처럼 이들도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상업활동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별히 서기관과 랍비는 가르쳐도 그 대가를 받을 수 없었기에 수공업에 종사하며 생활비를 벌거나 성전에 고용되어 급료를 받거나 그것도 아니면 구호금에 의지하여 생활했습니다. 이런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얼마나 타락했던지 예수님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라는 아주 노골적인 표현을 쓰실정도록 서기관들의 약자 착취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오늘날 변호사나 법무사의 역할을 했는데, 과부가 서기관에게 죽은 남편의 재산 처분과 관련하여 부탁하면 이 과정에서 지나친 수임료를 요구하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집을 가로채는 것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과부를 속여 이득을 취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탐욕이 기도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경건한지 자랑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서기관이 자신의 경건함을 자랑하여 ‘저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면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돈을 내고 서기관에게 기도를 부탁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종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자신을 경건하게 포장하고 안수 기도를 받으려면 아주 당당히 돈을 내 놓으라는 목사들이 있고, 가난한 사람 도와 줄것처럼 접근해서 사기를 치는 목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또 얼마나 교만한지 상석에는 자기가 앉아야 하고, 선교 여행을 가면 자기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배치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거나 오늘날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 지도자라는 위치는 존중을 받아야 하지만, 그 지도자가 무조건 잘못이 없고, 부당한 일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됨을 알고 그러한 일에 유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를 살리는 것은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의 탐욕을 추구하고 교만하며 경건한채하며 성도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거짓된 자들에게 속지 마시고, 혹시라도 이런 일들을 추구하고 따르는 자들이 있다면 속히 거기서 나올 것을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는 반대로 두렙돈을 넣은 여인은 칭찬하십니다. 41절은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 지를 지켜 보셨을 때에, 거기에 많은 액수를 넣는 부자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자들이 많은 액수를 넣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당시 성전 안 뜰 주변을 따라 삼면의 벽에는 13개의 연보궤가 있었는데, 이 연보궤는 돈을 넣는 입구는 좁고 밑받닥은 넓어습니다. 특히 여기에 동전을 던질때면 소리가 많이 나게 되는데, 많은 액수를 던질수록 큰 소리가 나서,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헌금하는 사람들 가운데 유독 예수님의 눈길을 끄는 한 과부가 있었는데, 얼마나 이 과부를 보고 감동을 받으셨던지 일부러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과연 이 과부는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감동을 주었을까요? 과부가 낸 헌금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두 렙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돈은 참새한마리도 살수 없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감동을 받으신 이유는 가나나한 중에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헌금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생활비’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생명’을 뜻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면서까지 돈벌이에 연연했고, 심지어 과부의 가산에도 손을 대며 자기의 배를 불리기에 여념이 없을때, 이 과부는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두 렙돈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 나라는 “많이” 헌금하는 부자가 아닌,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며 드리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금을 많이 하는 것도 좋겠지만, 모든 것이 주님으로 부터 왔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재물의 주권을 돌려드리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사랑이 너무 커서 이것을 부족하지만, 내가 가진 것들을 주님께 힘껏 드린다는 마음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과부의 헌금처럼 우리의 헌금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감동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서기관과 과부를 비교하며 어떤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겉모습이 거룩하지만 뒤로는 온갖 죄를 지은 서기관들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바로 그 과부를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