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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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저는 어렸을적 손금을 많이 봤었습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손금이 길어 명줄이 길다고 여겼습니다.
중앙에 있는 손금은 성공을 뜻한다는 말에 억지로 손금을 만들려고 펜으로 긁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예전에 손금 많이 보셨죠?
어릴적 이름의 획수를 가지고 점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샤프심으로 부러뜨리는 것으로 점을 쳤던 기억도 있습니다.
네잎클로버를 보물처럼 여기며 책에 끼우고 다녔던 기억도 있습니다.
요즘 TV를 보면 타로점이나 무당점을 보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영화 ‘파묘’가 천만 관객을 넘긴 것도 그만큼 사람들이 이에 관심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점치는 어플도 많이 개발되어 있어서 누구나 언제든지 점을 칠수 있습니다.
무당집을 직접 가야했던 예전에 비해 너무 쉽게 접할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명태인형이 등장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입주 선물로 가져왔는데 명태가 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인형을 특정 방향에 고정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제 그는 중요한 일이 있을때마다 그 명태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명태가 자신에게 복을 주고 안 주고를 결정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에이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라며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인데도 오늘의 운세를 보거나 재미로 점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알던 한 청년은 전도하려고 타로점을 배운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이라는게 그리 가볍게 여길게 아닙니다.
샤머니즘은 굉장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점점 그것에 얽매이게 만듭니다.
삶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요즘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샤머니즘에 빠져들까요?
전에 설교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온갖 저주의 소리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온갖 소식들, 뉴스들이 모두 저주를 퍼붓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두렵고 불안한 것입니다.
이런 샤머니즘은 원시부족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그들의 심리를 보면 샤머니즘이 발생하는 이유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원시부족들에게 큰 문제는 먹고 사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게 아닙니다.
하늘의 비가 내려야 하고, 바다에 물고기가 많아야 합니다.
다른 부족들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예상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인간의 힘으로 예측할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샤머니즘을 통해 그 문제를 통제하여 자신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샤머니즘에 많이 빠지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입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떨까요?
샤머니즘이 판치는 곳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바알, 아세라 같은 우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곳입니다.
그 우상들이 땅에 비를 주고 풍요를 준다고 소문난 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유명한 신들의 영역안으로 들어가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 곳에서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을까요?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적인 3편의 설교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하는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앞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야할 많은 율법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안다고 해서 그냥 지켜지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순종하기 쉬운 민족인지는 광야에서 밑천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배고프고, 힘들면 금새 하나님을 배신하는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고, 곧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확실한 언약을 맺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 산에 모으십니다.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에 모아 축복을 선포합니다.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모아 저주를 선포합니다.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1-14절을 통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러한 복들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3-7절입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여인의 태도, 땅도, 집짐승도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식도 많이 낳고, 농사도 풍년이고, 집짐승이 새끼도 많이 낳습니다.
심지어 곡식 광주리, 반죽 그릇도 복을 받습니다.
먹거리를 풍성하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시도하는 일마다 잘되게 해주시고, 풍요로운 삶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져 이스라엘이 패배하면 그것을 지킬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풍요를 지킬수 있도록 적들까지도 물리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1,12,13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하늘의 문을 여셔서 철을 따라 비를 내려주십니다.
결핍이 없도록 풍성한 삶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특히,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좋아할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남에게 꾸어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궁핍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바라는 삶입니까?
13절에도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신고, 오직 위에만 있게 하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사장 만들어 주시겠다, 어디든 리더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기때문에 모두 그렇게 될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주도하는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암송하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은 구절들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원하는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풍요를 원하고, 그 풍요를 지킬수 있는 안전을 원합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줄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줄수 있는 우상들을 찾습니다.
자신이 무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신만의 우상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많은 열정과 에너지를 쏟는 그것이 우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돈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명예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에로스입니다.
그것들이 풍요와 안정, 행복을 준다고 믿고 따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기루일뿐 행복을 주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 풍요와 안전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우상들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바알과 아세라 신이 가는 곳마다 눈에 보입니다.
그것만 잘 따르면 비를 주고, 풍요를 준다고 유혹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우상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건을 거셨습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주의 깊게 지켜야 합니다.
14절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신들을 좇아 하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들의 유혹에서 벗어날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은 이런 복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그 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삶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복만 바라는 것은 미신일 뿐입니다.
또다른 샤머니즘일 뿐입니다.
또한 단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우상숭배, 샤머니즘입니다.
이렇게 많은 복을 반드시 준다는데 안 믿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의 욕망을 위한 도구나 발판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조차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샤머니즘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9절입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 길로만 걸으면,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맹세하신대로, 당신들을 자기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복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따라오는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맺게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삶의 진정한 행복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내 성공의 도구나 발판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원하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수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발휘해 헌신도, 봉사도 할수 있습니다.
내가 복받는다는데 내 자식이 복받는다는데 그까짓거 못하겠습니까?
막대한 돈과 정성을 들일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나가고, 금식도 해보고, 헌금도 많이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을수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내 열심으로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샤머니즘일 뿐입니다.
아침마다 정안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정성을 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열심은 결국 내가 복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다릅니다.
10절입니다.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께서 당신들을 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보고, 당신들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민족들에게도 자신의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들이 복받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힘없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무력한 이스라엘을 통해 오히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할때 그 분이 더욱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도 나만 잘먹고 잘살라는게 아닙니다.
그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기 위함입니다.
연약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러날때 사람들은 내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인 셈입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들을 선택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복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에서 풍요를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더니 아이를 순풍순풍 낳고 계십니까?
키우던 개가 새끼를 더 많이 낳습니까?
매일마다 진수성찬이 밥상에 올라옵니까?
하나님을 잘믿는다고 해서 교통사고, 재해, 재앙으로부터 안전합니까?
그럴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던 바울을 보십시오.
가난하고 힘들게 살다가 결국 핍박받고 목이 잘려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누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받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복은 그림자이며, 실체가 아닙니다.
구약의 복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으로 성취됩니다.
대표적으로 누가복음의 네가지 복과 네가지 저주를 보십시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굶주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슬피 우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박해받고, 미움받고, 욕먹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반면, 부요한 자에게 저주가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배부른 자에게 저주가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웃는 자에게 저주가 있다고 하십니다.
칭찬받고 있는 자에게 저주가 있다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구약의 말씀과 완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복이 아닌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계실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물질적인 것이야 결국 사라지고 시들고 말 것입니다.
그것들도 필요하지만 결국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더 큰 복이듯, 그리스도 그 분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풍요와 안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풍요로워져도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 증거입니다.
돈이 넘치는 재벌들은 두려움도 없고 불안도 없을까요?
마냥 삶이 행복할까요?
우리 역시 옛날보다 얼마나 잘 사고 있습니까?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안전이 마음의 풍요와 안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 분안에서 우리는 참 행복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다카포 형제, 자매 여러분~
에베소서 1장 3-6 절을 읽으며 설교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풍요와 안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우상들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축복의 그리심산 위에 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저주의 에발산 위에 설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