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4. 주일4부예배. 죽음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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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로마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서론
서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일, 그래서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죽음입니다. 죽음만큼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하나인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 존재이다.” 참 대단할 것 없는 문장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만약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말로 죽음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쳤다면 하이데거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하며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의 설명은 대략 이런 식입니다. “사람은 대개 다수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도 추구하고, 그것에 나를 맞추며 살아간다. 부, 명예, 권력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죽음은 사람이 세상에서 추구하던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내가 죽으면 모든게 끝이기 때문이다. 이 운명을 건강하게 받아들여보자. 어차피 죽음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거라면, 내 삶을 다수가 의미있다고 여기는 것에 끼워맞춰 살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니 네가 가질 수 있는 너만의 멋진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라.”
이것이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 이 세상 최고의 지혜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어느정도까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어차피 죽어버리고 말거 사는게 무슨 소용이겠냐?”하는 삶을 포기해버리는 태도를 막을 수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이 만들어낸 지혜가 영원을 꿈꾸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결코 만족할 만한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만의 멋진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죽음은 그것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테니까요. 이것이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가장 확실한 운명입니다.
도대체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영원을 꿈꾸며 소망할 수 있는 인간인데 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죽음이라는 운명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며 각기 나름의 답을 내놓았지만, 진짜 답이 될만한 유일한 답은 기독교에 속해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문제의 원인을 알고 계시며, 하나님만이 답을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만이 몸소 그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제가 유일한 답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개인의 확신의 차원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는 죽음으로 끝나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죽음을 뒤집어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것을 몸소 부활로 역사 속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어 자세하게 풀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음의 원인부터 따져들어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도대체 왜 죽게 되었을까요? 창세기는 첫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 죽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려가 자초지종을 다 따져본 후에 곧장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죠?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들이 꽤나 밝혀집니다. 먼저 죽음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것, 곧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를 잘 해결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을 갑작스럽게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아까 말했듯 하나님과의 끊어짐이며, 이후로 지속되는 삶은 죽어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의 끝에 완전한 멈춤이 옵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만을 죽음이라 생각할 때가 많죠.
조금 더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나무에 사과 열매가 아주 탐스럽게 맺혔습니다. 사과를 하나 따서 쟁반 위에 올려두고 이 사과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봅시다. 자기 생명의 근원과 끊어진 사과 열매는 점점 생기를 잃고 썩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다 썩어 사라져버리게 되지요. 이것이 죽음입니다. 근원과 끊어지면 죽음이 시작되고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끝에 이르게 되구요. 사과의 경우에는 단순히 겉모습에서만 이런 죽음의 과정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인간은 육체 외에도 영과 혼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훨씬 더 고급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자기 생명의 근원과 끊어진 후에 점점 생기를 잃고 늙어갑니다. 이렇게 육체에 죽음의 증상이 나타남과 동시에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에도 죽음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고민하고 감정을 품고 결정을 내려 하는 모든 행동이 떳떳하고, 멋지고, 자랑스럽고, 명예롭기보다 치사하고, 구차하고, 비열하고, 멋대가리 없는 것들로 가득해지지요. 이런 행동들이 삶을 채워 만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이란 어떻습니까? 이미 썩었으며, 더욱 썩어가고, 완전히 썩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고가는 모든 세대의 인간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씁하십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모든 인간들에게서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죽음의 증상들 뿐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어있어 눈을 돌리는 곳곳마다 썩은 것들 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죄가 우리 속에 들어앉아 다시 그 관계가 이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곧 죄에 있는 것이지요.
본론
본론
우리가 실상은 죽어있다는 것도 좌절스럽지만, 죽음의 원인이 죄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좌절을 안겨줍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이 죄의 굴레를 벗어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아주 강력합니다. 모든 인간들을 손쉽게 장악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아 죽음의 끝까지 이르게 합니다. 죄는 단 한 번도 이런 자신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을 만큼 강하고 인간은 연약합니다. 죄라는 것의 강력함, 죽음이라는 운명의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법이라는 것은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 그래서 우리가 거기에 얽매이고 다스림을 받는 일반적인 원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아 우리 가는 길의 끝이 결국 죽음일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죽음의 문을 열면 누구나 다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죄인들에게 내려질 판결이 무엇일지 예상하기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죄의 권세로부터, 누구도 떨쳐낼 수 없는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영원한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대신해서 다 삼키시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 대신 죽으시고 영원한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부활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에 부으시는 능력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길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는 죽음조차 뒤집을 수 있으시고, 죽음을 가지고 부활을 만들어내실 수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자랑하듯 펼쳐보이신 일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이 딛고 살아가는 기초를 죄와 죽음이 다스리는 땅에서 은혜와 생명이 다스리는 땅으로 바꾸어내신 일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힘과 권세가, 우리가 속한 세상이, 우리의 운명이 뒤바뀌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아무 대가 없이 죄인들을 용서하셔서 자신과 화목을 이루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은혜를 받는 입장에서야 아무 치를 값이 없지만, 은혜를 베푸시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값을 치르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어떤 값을 치르셨습니까? 무엇을 대가로 삼으신것이었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댓가로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이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하신 그 순종의 기초 위에 창조의 능력을 부으셔서 이제 죄가 다스릴 수 없고 죽음이 끝장낼 수 없는, 반대로 말하자면 은혜가 다스리고 영생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세상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서 부패한 삶을 살며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가던 우리를 은혜의 지배 아래 거룩한 삶을 살며 영생이라는 새로운 종착점을 향하도록 바꾸어내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희생과 순종으로 인해 죄와 죽음은 힘을 잃었습니다. 아니, 힘을 잃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죄와 죽음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끊어낼 수 없고, 죽음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잔인한 운명일 수 없습니다.
이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기쁨과 감격에 벅차 외치는 선포의 의미가 이해가 가십니까? 바울이 무엇을 전해내려 하고 싶었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바울은 은혜가 다스리는 땅 위에 굳게 서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성령께서 다스리는 땅 위에 굳게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고백은 정말 복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고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삶의 현실이 결코 자랑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어마어마한 삶을 살아내며 이 고백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그는 계속해서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는 와중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장과 8장 사이에는 일종의 말도 안되는 도약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에 우리도 함께 뿌리내려야 합니다.
바울에게 로마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어떤 능력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람 사이를 끊어버린 온 인류의 죄악을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로 삼아내셨습니다. 모두가 결국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죽음의 한복판에 다시 살아남을 꽃피워 내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가능해보이는 그런 일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악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을 가지고도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능력이겠거든 우리 한 사람의 죄악과 죽음을 가지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과 순종으로 우리를 값주고 사셔서 하나님께 우리를 드렸습니다. 아까 언급한 말들로 표현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다시 이은 것이요, 우리를 은혜가 다스리는 기초 위에 세우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대로 마음껏 일하실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언제말입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 선한 열매라고는 하나 내지 못하던 그 때에 하셨습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아니 영원을 다 써도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우리 쪽에서의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저 사랑했기에 그랬다고 말씀하시니까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하던 때에 시작하신 사랑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원에 이르기까지 신실하실 것이라고 하셨지요. 이 모든 구원의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근거가 되는 순간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잘함과 못함이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거나 걸림돌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까? 바울은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셔서, 하나님이 완성해내신다.” 이것이 바울이 믿는 복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은혜라고 부르지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에 가득 흐르게 된 것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러한 것들로만 자신의 삶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종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기초가 되는지 날마다 맛보며 누리며 감탄하고 자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그런 고백입니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무너져보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 완벽한 것인지 알게되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불만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말로는 부족해 보입니다. 저같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이 그치지 않는다”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결론
결론
예수께서 만나신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통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함께 살펴보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부끄러운 죄악이 그녀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부끄러운 죄악이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가 이렇게 뒤바뀌어 쓰일 수 있듯이, 우리의 부끄러운 지금의 실수와 실패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얼마든지 놀랍게 뒤바뀌어 선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선하신 뜻과 엮어내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살든 천국은 가겠네?”라는 수준낮은 데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내시려는 것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우리의 삶에 매일, 매 순간 기적을 일으키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십시오. 날마다 은혜 위에서 자라가며 하나님의 걸작품들이 되어 가십시오.
죄는 힘을 잃었습니다. 죽음마저도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고 우리의 마침은 영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이 운명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마저도 하나님 손에서 선하게 쓰여 우리를 한 걸음 더 성장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어나 이번 한 주간을 멋있게 살아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