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을 먹여라!
다시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모든 제자 가운데 베드로는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님을 좇겠다고 약속하면서 가장 맹렬하게 헌신을 단언했던 인물이다(13:37). 그러나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옛 어부 생활로 돌아가게끔 주도한 자도 분명 베드로였다(21:1). 이제 그는 자기가 부인하고 버렸던 그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다시 한 번, 세 번이나 배역했던 그 밤처럼 예수님은 ‘숯불’ 건너편에 있는 그를 바라보신다(18:18; 21:9).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은 단순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심중을 꿰뚫는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을 던지신다. 그 질문은 ‘베드로’ 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 반석은 불안정한 모랫더미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제자는 옛 이름, 곧 예수님이 동일한 호숫가에서 그를 만나고 부르시기 전에 가졌던 이름으로 불린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 베드로는 사랑을 긍정하는 대답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사랑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식의 확실성에 근거한 긍정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은 겸허해진 근심 어린 제자에게 사명을 위임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께 속한 양떼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먹이는 목자의 사명이다.
우리는 이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임을 배웠다(10:11).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했으며, 이를 근거로 그분을 좇을 권리를 요구했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13:36–37)고 말씀하셨다. 이제 베드로는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웠다. 과거에는 자기 나름의 소원에 따라 스스로의 힘으로 ‘따랐다.’ 이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곧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18–19절). 그리고 이제는 그가 ‘따른다는 것’ 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이전에는 바랐으나 주어지지 않았던 그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 ‘따름’ 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같이(12:27–28; 13:31–32; 17:1–5), 그와 동일한 영광이 제자들-그분이 세상 속으로 보내는-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이다(17:10, 22–23).
삼중적인 부인은 삼중적인 위임을 통하여 말끔하게 씻기고 용서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의 기록이 상기시키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예수님께 속한 양떼는 의인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부름을 받은 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가 사도들 중 으뜸의 위치에 있다면, 그것은 그가 용서받은 죄인으로 으뜸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베드로라” 는 말을 들었던 자가 다음 순간에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는 말을 들을 것이다(마 16:18, 23). 예수님이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에 압도된 어부다(눅 5:8–10). 그리고 장차 실족할 그 제자를 향해 예수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이자 목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먼저 제자가 되어야만 그 둘 다가 될 수 있다. 이 단락에서 핵심되는 말은 “나를 따르라” 는 것이다. 교회의 리더십은 선교적인 동시에 목회적이어야 한다.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항상 왜곡된 성직자상을 초래한다. 그것들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 곧 제자도, 십자가의 길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그분의 부름을 받은 자가 능력을 받아 따르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되는 길-에 뿌리 박고 있는 한, 하나이기 때문이다(17:20–23).
1.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예수님(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본 단락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강조한다. ‘나타나다’(φανερόω, 파네로오)는 말이 1절에 두 번, 그리고 단락의 마지막 절에 한 번 반복 사용된다. 인클루지오(수미상관) 구조(21:1, 14)를 이루어서, 본 단락이 예수님의 다시 나타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낸다.
1) 예수님 없는 제자들의 곤란한 상황(21:1–3)
요한복음 20장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와도 같다.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성령을 주심,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을 경험하였다. 21장은 이러한 일련의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있은 후의 일이다. 공간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디베랴 호수로 장소가 바뀐다(1절).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이다. 앞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호수에 있다. 다른 복음서를 통해 그 이유를 유추해 보면,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다(마 26:32; 28:7; 막 14:28; 16:7).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갈릴리로 왔던 것 같다.
주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일곱 명의 제자가 등장한다(2절). 특히 앞서 나오는 세 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이름이 분명하게 나올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각각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누구보다 분명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직접 목격하였다(20:1–10). 또한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다(20:19–23). 도마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여, 직접 예수님의 몸을 만져본 제자이다(20:24–29). 나다나엘은 일찍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신을 예수님이 알아주시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한 인물이다(1:45–49).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한 베드로가 갑자기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한다(3절).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간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왜 고기를 잡으러 갔을까? 학자들의 견해는 나뉜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예수님의 소명을 뒤로하고, 베드로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베드로는 단지 먹을 것을 구하는 차원에서 고기를 잡으러 갔을 수도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406)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시도는 허사였다. 밤새 그물질을 하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3절). 심한 좌절과 절망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밤’(νύξ, 뉙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밤’은 고기를 잡는 적당한 시간일지라도, 요한은 여기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카슨은 부활하신 주님의 깊은 진리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뜻한다고 본다. 하일(J.P. Heil)은 예수님을 부재를 상징한다고 보며, 그래서 제자들은 아무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9:4–5; 15:5). 그러나 제자들의 상황이 부정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본문에 나오는 ‘밤’이 정확하게 상징적인 의도로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갈릴리(디베랴) 호수의 고기 잡는 적정 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밤샘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본문은 이렇게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만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물론 제자들의 실패와 밤이라는 시간대가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분명하다.
3절이 말하는 제자들의 이러한 헛수고는 이들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누가복음 5장에 따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그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눅 5:1–11).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이, 예수님을 만나고도 또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는데도, 자기 삶에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성령을 받았는데도 자기 삶에 아무런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2)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심(21:4–8)
드디어 예수님이 등장하신다(4절). 1절과 14절에 언급된 ‘나타나다’는 말이 실제 일어나는 구절이다. 14절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나타나심이 세 번째라 일컫는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계속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이다. 제일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20:19).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포하시며, 부활하신 자신을 보여 주셨다(20:19–23). 두 번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셨다(20:24–29).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이제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셨다.
빛이신 예수님이 어둠 가운데서 고생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5절).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희망이신 예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말씀하신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절) 말씀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고,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당시, 그분이 예수님인 줄 몰랐다. 그러나 엄청난 결과를 얻고 나서, 예수님을 알아본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풍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다시 얻는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15:5).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했을 때, 풍성한 결과를 얻는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요한복음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을 말씀을 순종했을 때, 풍성한 포도주를 경험한다(2:1–12).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을 믿고 돌아갔을 때, 왕의 신하는 아들이 고침 받는 기적을 경험한다(4:46–54).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고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백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심(21:9–14)
밤새 고기 잡느라 수고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물고기와 빵을 준비하시며,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신다. ‘숯불’(ἀνθρακιά, 안뜨라키아)(9절)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등장한다. 이 구절 이외에, 다른 용례는 앞서 대제사장의 집 앞에서 베드로가 쬐던 ‘숯불’을 가리킨다(18:18). 배신의 장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배신도 감싸 안으시면서 베드로에게 음식을 공급하신다. 또한 요한복음 전체에서 ‘물고기’와 ‘떡’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나오는 유일한 다른 곳은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이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굶주린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자상하신,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이 예표하는 그의 살과 피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암시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독자들이 연결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잘 차려진 밥상을 뛰어 넘어, 그의 살과 피를 바쳐서까지 제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원하신다. 예수님의 음식은 그의 희생적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11절에 나오는 물고기 숫자(153)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상징적 의미를 유추하기에는 본문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학자들이 제시하는 그 어떤 상징적 의미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숫자는 다만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은 제자들이 꾸며낸 허구적 에피소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앞서 ‘나타나다’(φανερόω, 파네로오)라는 동사를 통해 이 단락이 인클루지오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14절에서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세 번째’라 분명히 밝힌다. 다시 말하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20:19–23), 도마에게 한 번 더 나타나셨고(20:24–29), 이제 디베랴 호수에서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다(21:1–14).
교훈과 적용
1.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시는 분이다. 엄청난 부활의 은혜를 체험한 후, 다시 위기 앞에 놓인 제자들을 예수님은 다시 찾아 가셨다. 부활 이후에도 변화 없는 자신의 삶을 보며 낙심하는 제자들을 다시 찾아 가셨다. 오늘날 우리도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때때로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신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소망해야 한다.
2.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풍성한 결과를 주셨다. 예수님은 늘 말씀하는 분이시다.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늘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이제 부활하신 후에도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 이천년 전에 말씀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고, 공부하므로,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겠다.
3. 예수님은 다시 채우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수고한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셨다. 예수님은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채우시며, 배고픈 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신앙 생활하는 동안 예수님은 때마다 시마다 우리를 은혜로 채우셨다. 따라서 지금 영육 간에 궁핍한 우리를 주님께서 다시 채우시는 것을 소망해야 한다. 다시 채우시는 예수님을 늘 생각하며 오늘도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2.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과 명령(21:15–17)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이 알고 계시다고 세 번 대답한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왜 세 번씩이나 하셨을까? 이는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대조되는 장면을 연출하시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수치요, 상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굳건하게 하셔서, 그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세우신다. 앞 단락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셔서 그의 부활을 확신시키시고, 그들을 격려하셨다(21:1–14).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으로 그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격려하신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격려하시기 위해 반복적인 질문을 하신다. 그러한 회복과 격려 위에, 위대한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사명 위임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세 번 질문 – 세 번 대답 – 세 번 사명 위임은 서로 연결되어, 어떤 함의를 지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은 ‘회복’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회복을 넘어, 선교적 사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베드로의 회복과 사명은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의도하신 것 같다.
1)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21:15–17)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이라 부르신다(15절).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이미 1:42에 등장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 즉 ‘요나의 아들’로 묘사한다(마 16:17). (자세한 설명은 1:42 주해를 참조하라)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베드로에게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이나 아픔을 지우시고, 의도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 사람들 보다’(15절)는 문법적으로 3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말로는 ‘이 사람들보다’라고 하였지만, 헬라어 원어(τούτων, 투톤)는 남성과 중성의 뜻이 다 가능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다음의 3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 네가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이것들’이란 물고기 혹은 물고기 잡는 것과 관련한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시고, 질문하실 수 있지만, 학자들은 어느 하나의 의미일 것이라 주장한다.
위더링턴(Witherington)은 두 번째 견해를 피력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과 다른 사람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모든 사람들과 단절되더라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느냐를 질문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강조하는데(13:34; 15:12), 이는 좀 모순이 있다. 키너(Keener)는 문맥에서 볼 때, 세 번째 견해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그의 소명을 확신시키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의 원래 직업을 떠나, 사람을 돌보는 사역에 집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견해는 전혀 일리가 없지 않다. 만약 앞 단락에 나오는,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는 것(21:1–14)을 부정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키너의 견해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주장한다(카슨, 모리스, 쾨스텐버거, 마이클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베드로의 헌신은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진다(6:67–69; 13:36–38; 18:10; 21:7, 18–19). 베드로는 누구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다짐했다. 그러나 배신의 추억은 그를 움츠리게 했고,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이에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사랑과 헌신을 불러일으키신다.
여기서 ‘사랑하다’는 표현을 위해 헬라어 ἀγαπάω(아가파오)와 φιλέω(필레오)가 교대로 사용된다(15–17절). 혹자는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 신적 사랑(아가페)을 나타내는 아가파오는 ‘하나님 차원의 사랑’을, 친구간의 사랑(필리아)을 나타내는 필레오는 ‘인간 차원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님이 아가페 사랑을 요구하였지만, 베드로는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한다. 두 번째 질문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 사랑을 기대하셨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한다. 마침내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필리아 사랑으로 낮추어 베드로에게 질문하셨고, 이에 베드로는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하였다. 요컨대 처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수준 높은 신적 사랑을 요구하셨지만, 베드로는 계속 인간적 차원의 사랑만을 고백한다. 그러나 마침내 예수님은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춰 인간적 차원의 사랑을 요구하시고, 베드로도 이에 화답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넓은 마음과 자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최근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세기 당시 두 단어는 구분 없이 많이 사용되었고, 특히 요한복음 자체가 구분 없이 두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5:20과 16:27은 필레오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17절에 의하면, 문맥에서도 요한복음 저자가 아가파오와 필레오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시므로”라는 말을 통해, 저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는 예수님의 질문이 세 번째라는 것을 밝히며, 앞에서 아가파오로 물으신 것까지 다 포함한다. 더욱이 문맥에서 비슷한 의미의 두 단어를 서로 바꿔 쓰는 용례가 두드러진다. ‘어린양’(ἀρνίον, 아르니온)과 ‘양’(πρόβατον, 프로바톤)이 함께 쓰이고, ‘먹이다’(βόσκω, 보스코)와 ‘치다’(ποιμαίνω, 포이마이노)가 함께 사용된다. 이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문학 기법이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서론에서 ‘알다’와 ‘영접하다’와 ‘믿다’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1:10–12). 또한 ‘믿다’와 ‘순종하다’도 같이 사용된다(3:36). 예수의 ‘말씀’을 나타내는 λόγος(로고스, 8:37)와‘ρῆμα(레마, 8:20)는 뜻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두 단어(아가파오/필레오)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문체를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
2)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21:15–17)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실 때마다, 그에게 사명을 주신다. ‘양을 먹이라’ 혹은 ‘양을 치라’는 말씀은 목자의 사명을 암시한다. 양을 먹이는 것은 원래 예수님의 사명이셨다(10:1–18; 참고. 겔 34:23; 37:24).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들을 위탁하시며, 자신을 대신하는 목자가 되라고 하신다. 신약에서 ‘먹이다’(βόσκω, 보스코)가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참고. 마 8:30).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집나간 탕자가 돼지를 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눅 15:15). 그는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한 후에, 돼지를 먹이는 비참한 직업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놀라운 직분을 받는다. ‘치다’(ποιμαίνω, 포이마이노)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설명하기도 하고(마 2:6; 계 7:17), 교회의 지도자의 역할을 나타내기도 한다(행 20:28). 문자적인 뜻은 양을 먹이고, 지키고, 인도하는 목자의 전반적인 목양 활동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먹이다’와 ‘치다’는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어떤 목양을 일컫는 말일까? 요한복음 10장에 따르면, 목자로서 예수님은 양들에게 꼴을 제공하셨다(10:9). 그리하여 양들을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도하셨다(10:10). 또한 삯꾼과 달리, 예수님은 이리로부터 목숨을 다해 양들을 지키셨다(10:12–15). 그리고 양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도 인도하셔서, 두 종류의 양들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10:16). 이러한 목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델이 된다. 물론 예수님의 독특한 기독론적 역할을 베드로가 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이라는 위대한 목자의 위임을 받아, 양들이 예수님의 목양을 잘 받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을 목양하는 예수님의 자세를 본 받아야 한다.
첫째, 양들을 꼴로 먹여야 한다. 양이 꼴을 먹고 자란다면, 성도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요한복음 10장 주해에서, 우리는 ‘꼴’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생명)을 주신다고 보았다(10:9). 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의 양들에게 ‘꼴’을 주시므로, 종말론적 구원과 안식을 성취하신다는 말이다(참고. 사 49:9–10; 겔 34:12–15). 요한복음에서 성도에게 구원을 위해 필요한 꼴(양식)은 무엇인가? 생명의 양식(떡)이신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6:35),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의미할 수도 있다(4:14; 7:37–39). 그러므로 목자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도들을 예수님과 성령께로 인도하여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6:63), 목자들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먹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파하고 가르쳐서, 성도들을 먹여야 한다.
둘째, 양들을 지켜야 한다. 10장의 문맥에서 이리는 제자들을 향해 가해지는 세상의 위협이나 공동체의 어려움이다(10:12–15).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괴롭히는 세상을 이리(뤼코스)와 연결시킨다(마 10:16).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어린양을 이리(뤼코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눅 10:3).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법정에 넘기기도 하고, 회당에 채찍질하기도 할 것이 때문이다(마 10:17).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리(뤼코스)를 언급한다(행 20:28–30).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침투하여,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묘하게 유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사나운 이리’라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협과 거짓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들을 지키신 선한 목자이셨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께로부터 양들을 위임 받은 목자들도 위협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
셋째,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 하나 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그의 우리로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우리 안의 양들과 우리 밖의 양들이 하나 되게 하셨다(10:16). 앞서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목자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까? 이는 선교론적 그리고 교회론적 함의를 지닌다. 제자들은 복음 전도를 통해 우리 밖의 다른 양들이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한다. 전도되어 공동체에 새로 들어 온 사람들과 기존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한다.
요컨대 본문에서 예수님이 목양을 위임한 대상은 베드로이지만, 이는 제자들 전체를 향한 명령이다. 제자들의 리더십에 의해 세워지는 모든 교회들을 향한 사도적 사명을 가리킨다. 교회는 사도적 사명을 이어 받은 공동체로서 예수님의 목자 역할을 계승, 발전 시켜야 한다. 이런 면에서 목자 기독론은 목자 교회론과 연결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목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양들에게 꼴을 먹여야 하며, 양들을 지켜야 한다. 또한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한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10장에 이어 자신을 양의 목자로 나타내시고(10:11, 14), 그 양은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양 무리를 치되, 양들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목자이신 주님을 본 받아, 자신의 목숨을 다해, 주님의 소유를 지켜야 했다(10:15; 21:18–19).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님의 교훈에 따라 권면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장로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고 한다(벧전 5:2–3). 물론 양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인 목자에게 순종으로 화답해야 한다(히 13:17).
교훈과 적용
1. 예수님은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베드로는 자칫 배신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고통 가운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고, 영혼을 강건하게 하신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의 제자들이 그를 닮은 목자가 되게 하신다.
2. 예수님은 아시는 분이다. 베드로는 사명을 받기 전에,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의지한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상황을 아시며, 우리 마음의 중심을 아신다. 사람들은 비록 몰라주더라도,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을 믿고, 꿋꿋하게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한다.
3. 예수님은 사명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최종적 목표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양들이 예수님을 만나 영생을 누리도록 꼴을 먹여야 한다. 양들이 위협이나 거짓에 휘둘리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그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많은 양들이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자들은 먹이고, 지키고, 확장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3.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과 운명(21:18–25)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1) 베드로의 사명과 운명(21:18–19)
예수님은 젊었을 때 베드로의 모습과 늙었을 때 베드로의 모습이 다를 것이라 예언하신다(18절). 젊었을 때는 베드로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닐 수 있다. ‘띠를 띠다’(ζωννύω, 존뉘오)는 옷을 입는다는 뜻인데, 신약에서는 이 구절과 사도행전 12:8에만 나온다. 사도행전에서도 주의 천사의 인도를 받아,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베드로가 띠를 띠는 모습이 나온다(행 12:8). 따라서 베드로의 젊었을 때의 모습은 곧 그가 체포되어 순교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앞서 고기 잡는 장면에서, 베드로는 스스로 옷을 입고(7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11절).
그러나 그가 늙었을 때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네 팔을 벌리리니’(18절)는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18절은 예수님이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예언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저자와 독자들은 이러한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도 베드로의 순교를 언급하고(1 Clement 5:4),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증언한다(Scorpiace 15). 베드로 행전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고 한다(벧 행 37–38).
이어지는 구절에서 요한복음 저자 자신이 베드로가 팔을 벌리는 것과 그의 죽음을 연결시키고 있다(19절). 베드로의 죽음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앞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영광을 얻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13:31–32).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17:1). 예수님은 사명을 성취하시므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17:4).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를 암시한다. 문자적으로 이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제자도를 암시하기도 한다(13:36).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제자도로서의 십자가 삶을 생각나게 한다(마 16:24; 막 8:34; 눅 9:23).
2)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21:20–23)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여쭙는다(21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운명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데 집중하라고 하신다(22절). ‘따르다’를 뜻하는 ἀκολουθέω(아콜루떼오)는 이미 19절에서 언급되었다. 19절에서는 문자적인 뜻이 조금 더 강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다분히 상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자도를 상징한다(참고. 1:43; 8:12; 12:26). 일찍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고별 강화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려 했다(13:36–38). 그러나 예수님은 나중에 베드로가 그를 따를 것이라 하셨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수님은 정식으로 베드로에게 그를 따를 것을 명령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목양의 삶을 의미한다.
한편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는 10장에서도 아콜루떼오가 사용되었는데,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을 소개한다(10:4–5, 27). 그 양은 타인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목자의 음성을 따른다. 앞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목자로 부르셨다. 자신의 양들을 베드로에게 위임하셨다. 베드로는 자칫 자신을 예수님과 동등한 목자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역할은 예수님과 동등한 목자의 역할이 아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르는 양에 불과하며, 그의 목자 역할은 위임된 역할이다. 따라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항상 ‘목자’와 ‘양’이라는 자신의 두 가지 신분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는 목자이면서 양이다.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양이면서, 동시에 다른 양들을 돌보아야 할 목자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사랑하시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킨다(23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가 살아 있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23절). 따라서 본 단락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을 다루지만, 사실은 베드로의 사명을 계속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가 맡은 사명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21:24–25)
‘이 일들’(24절)은 요한복음 전체를 가리키며, 예수님에 관한 모든 증언을 의미할 것이다. 요한복음은 ‘증언’에서 시작해서 ‘증언’으로 끝을 맺는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하였다(1:6–9). 이제 끝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전체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다. 요한복음의 중심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있다. 세례 요한의 주된 사역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었다(1:7–8, 15, 32, 34; 3:26; 5:33).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했고(4:39), 예수님의 사역이 예수님을 증언했다(5:36; 10:25).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증언하셨다(5:37; 8:18). 그리고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며(5:39),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저자는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자로 묘사한다(19:35; 24절). 이러한 증언들을 통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 것을 증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다(20:30–31).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이 구분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21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지만,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살아남아서, 예수님을 증언하였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들이지만,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부르심은 달랐다. 베드로에게는 순교하기까지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다. 다른 한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는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라는 증언의 사명을 주셨다. 물론 이 말은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이 배타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즉, 베드로도 증언의 사명이 있고, 사랑하시는 제자도 목양의 사역을 했다. 다만, 예수님께 중점적으로 쓰임 받은, 각각의 독특한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참고. 17:4; 21:19).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이 참되다고 말하는 ‘우리’(24절)는 누구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교회 공동체로 본다. 그의 교인들이 그의 증언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있다. 마치 복수의 증언자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복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을 지지하고 있다. 또 다른 제안은 ‘우리’를 요한복음 저자인,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자신으로 본다. 이는 요한복음이나 신약에서 종종 1인칭 복수 형태를 통해 저자는 화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예. 1:14; 3:2, 11; 20:2; 요일 1:2, 4, 5, 6, 7; 요삼 12; 고후 12:2–4).
교훈과 적용
1.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이다. 제자로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좇아가듯이, 제자인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가야 한다. 심지어 목양의 삶을 살 때도,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의 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도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진정 목자의 삶을 살 수 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증언자로 부르신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증언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증언을 통해 그의 사명을 감당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의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각자 처한 환경이나 직업은 다르더라도,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증언의 삶을 살아야 한다.
3.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신다. 목자로 부르시든 증언자로 부르시든, 제자로 부르시든, 그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도 한 평생을 그것을 위해 사셨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힘써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서로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