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을 먹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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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Lexham 성경사전 (사도 베드로)
도 베드로(Πέτρος, 페트로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며 예루살렘의 초기 교회의 세 명의 거명된 기둥들 중에 한 명.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향한 첫 번째 기독교 선교사, 유대인들을 향한 기독교 선교사, 그리고 로마에서의 기독교 순교자. 또한 게바라고도 불려짐.
베드로에 대한 소개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 중에 한 명이고 나중에 열 두 제자들의 대변자가 된다. 비록 예수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지만-베드로 (“바위”;Πέτρος, 페트로스; 마 16:18; 막 3:16에서;Κηϕᾶς, 케파스; 요 1:42에서), 그 이름에 부합하게 사는 그의 능력은 종종 복음서들 속에서 회의적으로 묘사된다. 베드로가 주님을 꾸짖고 (마 16:22–23; 막 8:32–33),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에 빠져 들고 (마 26:40; 막 14:37), 말고를 공격하고 (막 14:47; 요 18:10–11),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마 26:69–75; 막 14:66–72; 눅 22:55–61; 요 18:15–27) 이 모든 것이 베드로에 대한 이런 인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요 21:15–17에서 베드로를 재위임하시는 예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먹이라")의 모습은 그가 여전히 베드로를 신뢰하시며 그를 초기 교회의 수장으로 선택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를 증명하는데, 여기서 누가는 베드로를 대범한 복음의 선포자 (행 2:14–41; 3:12–26; 4:8–21), 기적 행하는 자 (행 3:1–11; 9:32–35, 38–42), 초기 교회의 권위 있는 인물 (행 1:15–26; 5:3–10; 8:14–17; 15:7–11), 이방인들을 향한 첫 번째 선교사(행 10:1–45), 예루살렘 밖의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사 (행 12:17)로 묘사한다. 궁극적으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할 때 예수의 추종자로서의 자신의 전적인 헌신을 증명한다(클레멘트 1서 5:4).
신약 성경의 베드로
신약 성경은 제자로 부름 받기 이전의 베드로의 생애와 배경에 관한 제한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시몬 혹은 시므온이다 (참고 행 15:14).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 해변의 어촌인 벳세다에서 성장했고 (Βηθσαϊδά, 벳사이다), 세베대의 형제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하여 어업에 종사했다 (또한 예수의 제자들; 요 1:44; 막 1:16; 눅 5:10). 그는 분명히 기혼자였으며 (막 1:30; 고전 9:5) 나중에 가버나움에 살았다.
도행전 속의 베드로
초기 교회 안에서의 베드로의 리더십은 사도행전의 첫 번째 절반을 지배한다. 사도행전 15장의 베드로에 관한 묘사는 그 장의 나머지 내용에 대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15장 이후로 베드로는 이방 세계를 향한 복음의 진전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제자들이 함께 기도할 때 제자들 가운데서 그의 리더십을 증명한다. 베드로는 (대략 120명)의 무리들이 유다를 대체할 한 사도를 그들 가운데서 선택하도록 이끈다. 베드로에 동의하면서, 무리들은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마침내 맛디아를 나머지 11사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도로 선택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오순절 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는다. 베드로는 11명의 사도들과 함께 서서 무리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설교한다. 베드로의 리더십은 3,000명의 사람들이 초기 교회에 더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주요한 인물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으로 향하다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한 사람을 만난다. 베드로가 그 사라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자 그는 치유된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이 기적을 통해 축적된 주의를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사용한다.
사도행전 4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된 상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다음 날 그들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포함한 예루살렘의 모든 통치자들, 장로들 및 서기관들이 배석한 모임으로 이끌려져 온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와 그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선포한다. 지도자들은 그들을 위협하고 그들이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거절하지만 마침내 풀려난다.
사도행전 5장은 베드로를 분별 있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아나니아는 기반적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교회 앞에 예물을 바친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지적하고, 아나니아는 이어서 그의 발 앞에서 죽는다. 세 시간 후,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도 같은 방식으로 죽는다. 베드로는 점점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은 단지 그의 그림자가 스치고만 지나가도 치유를 받는다 (5:15). 5장 후반에서,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의 공회를 꾸짖고 (5:29),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신자들과 함께 채찍을 맞는다 (5:40).
사도행전 8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간다. 마술사 시몬으로 확인된 한 사람이 베드로의 안수로 성령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금전적인 수단으로 이 은사를 얻고자 한다. 그 기사는 베드로가 부적절한 요구를 한 시몬을 심하게 꾸짖는 것으로 끝난다.
사도행전 9장에서, 베드로는 룻다의 신자들을 방문하고 중풍병으로 8년 동안 마비된 사람을 치유한다. 근처 욥바 성의 죽은 신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베드로는 그녀가 죽어 누워 있는 침상으로 간다. 그는 기도하고 여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고 그녀는 다시 소생한다. 베드로의 능력 있는 행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환상을 본 후, 고넬료의 집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자신들의 손님으로 초대한다. 베드로는 이에 동의하고, 고넬료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되고, 예수의 메시지를 모든 열방에게 적절한 것으로 선포한다 (ἔθνος, 에쓰노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이방인들을 포함한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부어진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령의 부어주심에 개입한 세 번째 사건이다-예루살렘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사마리아의 사마리아인들 가운데서 그리고 가이사랴의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러나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일부 유대인들로부터 그가 이방인들을 방문한 것에 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사도행전 11장은 그들의 의혹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을 기록한다. 다시 한 번,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자신의 동료들 가운데서 어떻게 대단히 존경을 받는지를 보여주는데, 베드로의 보고를 듣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신 것에 경이로워한다.
사도행전 12장은 걸음마 단계의 교회와 그 리더인 베드로를 향한 헤롯 왕 (아그립바 1세)의 적대적인 박해를 기록한다. 헤롯은 처형할 의도로 베드로를 체포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천사에 의해 구출되었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감옥에서 벗어났다. 몇몇 신자들과의 짧은 만남 후에, 베드로는 다른 장소로 출발했다 (12:17). 비록 이야기는 그의 목적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에 관한 많은 추측들이 있어 왔다; 로마, 안디옥, 메소포타미아, 고린도 및 에데사가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최후의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다. 베드로의 연설은 이어지는 많은 논쟁을 야기하는 문제를 개입시킨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사용하셔서 어떠한 추가적인 "멍에" 없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하셨는지를 상술한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의 증거로 베드로의 결론을 확언한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하나님의 일을 확증하고 이방인들 중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입하기 위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추가적인 선포를 한다. 베드로의 영향력은, 히브리 성경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과 함께, 영구적인 효과를 가진 초기 교회의 결정적인 변화를 알린다.
서신서들 속의 베드로-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베드로전서
신약 성경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및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의 사도적 사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바울은 자신의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를 광범위하게 언급한다.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기간 동안 만난 첫 번째 사도로 베드로를 언급한다 (1:18). 비록 바울이 자신을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베드로와의 만남이 바울의 최우선 순위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2장에서 바울은 야고보 및 요한과 함께 베드로를 "기둥"으로 묘사한다 (2:9). 그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교는 유대인들에게로, 바울의 선교는 이방인들에게로 향해져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보고한다 (2:9–10). 2장에서, 바울은 안디옥에서 있었던 이방인들에 대한 베드로의 위선에 관해 상술한다. 이 기술은 바울과 베드로가 서로 심한 다툼 가운데 있었다는 대중적인 신념을 야기하지만, 벧후 3:15와 같은 다른 본문들은 그 두 사람 간의 상호적인 원조를 확증한다 (이에 관한 더 구체적인 정보를 위해서는, 참고 Dunn, “The Incident,” 3–57; Kilpatrick, “Peter, Jerusalem and Galatians,” 319–26.)
고린도전서는 또한 베드로에 관한 일부 전기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 안의 분열에 관한 자신의 우려로 서신을 연다. 1:12에서 바울은 게바를 사람들이 따르기로 선택한 어떤 존재로 언급한다. 마르틴 헹엘과 다른 학자들은 이것을 소위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갈등으로 불려지는 주제를 더욱 심화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Hengel, Saint Peter, 66–79). 하지만, 아볼로와 예수 자신이 바울이 언급한 그 목록에서 함께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한다. 이 목록이 가리키고 있다고 보이는 것은 베드로의 여정 속에서 어떤 시점에, 그가 고린도에 도착했으며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바울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자신들의 선교적 노력들 속에서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여행했다는 것이다 (9:5). 마지막으로, 미리 형성된 전통이 될 것이 확실한 목록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주님이 자신의 부활에 이어 나타나신 첫 번째 인물로 열거한다 (15:5).
비록 베드로전서는 소아시아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격려의 서신이기는 하지만, 그 저자에 관한 내장된 정보를 제공한다. 만약 베드로전서가 베드로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면, 독자들은 동료 장로로서 교회들을 향해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의 사도를 발견하는 셈이다.συμπρεσβύτερος, 쉼프레스뷔테로스; 5:1에서). 베드로가 머물던 잠재적인 위치는 5:13에서 사용된 암호 "바벨론"을 통해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아마도 로마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게다가, 베드로에 대한 베드로전서의 모호한 언급은 사도에 관한 어떠한 실제적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향해 베드로의 이름으로 쓰여진, 단지 권면의 메시지를 담은 서신일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참고 Perkins, Peter, 120–22).
성경 외적인 작품들 속의 베드로
신약 성경을 넘어, 일부 성경 외적인 작품들은 베드로를 언급한다. 예를 들어, 클레멘트 1서는 로마에서의 베드로의 순교를 상술한다 (참고 Bauckham, “The Martyrdom of Peter,” 549–95). 클레멘트 1서는 AD 1세기 말 어간에 로마 감독 클레멘트에 의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쓰여졌다. 클레멘트는 베드로가 고난을 겪었고 영광스러운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진술한다 (5:4). 초기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세부적 내용을 추가하면서 클레멘트의 진술을 확증한다; 에우세비우스는 교부 오리겐이 이 세부 내용을, 지금은 분실된 오리겐의 Commentary on Genesis 파편에서 기록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3.1.2).
베드로는 또한 베드로 행전과 베드로와 열 두 사도들의 행전을 포함한 일부 비정경 본문들 속에서 주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늘 반석처럼 단단하지 않아도, 시몬처럼 실수하고 연약할지라도 다시 어린 양을 먹여라하신다.
반석처럼 단단한 믿음의 사람이 지금 아니여도,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만은 반석처럼 단단하다. 변함없는 나를 그 사랑으로 나를 다시 일어나라, 다시 제자로 자리를 회복해랴. 다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가라. 다시 예수님이 목숰처럼 사랑하는 어린 양들을 먹여라, 어린 양들을 돌봐라.
실수하고 보잘것없는 베드로를 다시 수제자의 자리로 회복하여 세워주신다. 베드로는 이 사랑을 힘입어서 다시 일어났다. 사도행전에 반석같은 초대교회의 리더가 되었다.
부잘것없는 우리를 다시 회복하여 세우시는 예수님이 계시다. 도망가도 숨어도 찾아보셔서 따뜻한 장작불로, 따뜻한 사랑으로 녹여주신다.
맛난 조반으로 먹이신다. 허기지고 구멍난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먹이신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배불리 채워서 그 힘으로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신다.
보잘것없고 실수투성이 내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배불리 먹고 그 사랑으로 나누워주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이제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친구를 어떤 모습으로 사용하시듯 비교하며 무너지지 않을것이다.
나에게 먹이라고 주신 어린 양을 먹이기로 하였다. 나에게 걸어가라고 주신 그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다. 모두가 목회자가 되지 않아도 되어요. 모두가 의료선교사가 되지 않아도 되어요.
작가, 사업가, 모험가, 디자이너, 음악가, 목수, 건축기, 농부 모두가 다른 길을 주셨어요. 내게 주신 그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길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그 길에서 만나는 어린양을 먹이며 살아갑시다.
내가 먹여야할 어린양은 따로 있어요. 내가 서있어야할 자리는 따로 있어요. 그 자리에서 주신 어린양을 먹이는 내가 되기로 베드로는 결심했어요.
도 베드로(Πέτρος, 페트로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며 예루살렘의 초기 교회의 세 명의 거명된 기둥들 중에 한 명.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향한 첫 번째 기독교 선교사, 유대인들을 향한 기독교 선교사, 그리고 로마에서의 기독교 순교자. 또한 게바라고도 불려짐.
베드로에 대한 소개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 중에 한 명이고 나중에 열 두 제자들의 대변자가 된다. 비록 예수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지만-베드로 (“바위”;Πέτρος, 페트로스; 마 16:18; 막 3:16에서;Κηϕᾶς, 케파스; 요 1:42에서), 그 이름에 부합하게 사는 그의 능력은 종종 복음서들 속에서 회의적으로 묘사된다. 베드로가 주님을 꾸짖고 (마 16:22–23; 막 8:32–33),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에 빠져 들고 (마 26:40; 막 14:37), 말고를 공격하고 (막 14:47; 요 18:10–11),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마 26:69–75; 막 14:66–72; 눅 22:55–61; 요 18:15–27) 이 모든 것이 베드로에 대한 이런 인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요 21:15–17에서 베드로를 재위임하시는 예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먹이라")의 모습은 그가 여전히 베드로를 신뢰하시며 그를 초기 교회의 수장으로 선택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를 증명하는데, 여기서 누가는 베드로를 대범한 복음의 선포자 (행 2:14–41; 3:12–26; 4:8–21), 기적 행하는 자 (행 3:1–11; 9:32–35, 38–42), 초기 교회의 권위 있는 인물 (행 1:15–26; 5:3–10; 8:14–17; 15:7–11), 이방인들을 향한 첫 번째 선교사(행 10:1–45), 예루살렘 밖의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사 (행 12:17)로 묘사한다. 궁극적으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할 때 예수의 추종자로서의 자신의 전적인 헌신을 증명한다(클레멘트 1서 5:4).
신약 성경의 베드로
신약 성경은 제자로 부름 받기 이전의 베드로의 생애와 배경에 관한 제한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시몬 혹은 시므온이다 (참고 행 15:14).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 해변의 어촌인 벳세다에서 성장했고 (Βηθσαϊδά, 벳사이다), 세베대의 형제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하여 어업에 종사했다 (또한 예수의 제자들; 요 1:44; 막 1:16; 눅 5:10). 그는 분명히 기혼자였으며 (막 1:30; 고전 9:5) 나중에 가버나움에 살았다.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
복음서들 속의 베드로에 관한 언급은 많고 종종 열 두 제자들 중에서 그의 걸출함을 입증한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도록 부름 받다
마 4:18-20; 눅 5:1-11
예수가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다
마 8:14–15; 막 1:30–31; 눅 4:38–39
베드로는 열 두 제자들 목록에서 언급되는 첫 번째 제자이다
마 10:2–4; 막 3:16-19; 눅6:14-16
베드로는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를 만졌을 때 대변인 역할을 한다
눅 8:45
베드로는 야고보 및 요한과 함께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시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막 5:37; 눅 8:51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
마 14:28-31
많은 제자들이 떠나간 이후에 베드로의 고백
요 6:66-69
베드로가 예수에게 비유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다
마 15:15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다
마 16:13–19; 막 8:27–30; 눅 9:18–21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다
마 16:21–23; 막 8:31–33
예수가 변형되신 현장에 베드로가 함께 하다
마 17:1–9; 막 9:1–9; 눅 9:27–36
예수가 성전세에 관한 질문에 베드로를 개입시키다
마 17:24–27
베드로가 예수에게 용서의 한도에 관해 질문하다
마 18:21-22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주장하는, 자기 자신과 제자들을 위한 대변인으로서의 베드로
마 19:27–30; 막 10:28–31; 눅 18:28–30
베드로가 마른 무화과 나무를 기억하다
막 11:20-25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도록 보내어지다
눅 22:7-13
베드로의 발을 씻으려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
요 13:6-1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것에 대해서 예수가 예언하다
마 26:31–35; 막 14:27–31; 눅 22:31–34; 요 13:36–38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이 들다
마 26:36–46; 막 14:32–42
베드로가 예수를 체포하는 대제사장의 종을 공격하다
막 14:47; 요 18:10-1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다
마 26:69–75; 막 14:66–72; 눅 22:55–61; 요 18:15–27
예수가 갈릴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듣다
막 16:7
베드로가 비어 있는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가다
눅 24:12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
눅 24:34
베드로가 예수의 격려에 물고기를 잡다
요 21:3-14
베드로가 예수에 의해 복권되다
요 21:15-19
사도행전 속의 베드로
초기 교회 안에서의 베드로의 리더십은 사도행전의 첫 번째 절반을 지배한다. 사도행전 15장의 베드로에 관한 묘사는 그 장의 나머지 내용에 대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15장 이후로 베드로는 이방 세계를 향한 복음의 진전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제자들이 함께 기도할 때 제자들 가운데서 그의 리더십을 증명한다. 베드로는 (대략 120명)의 무리들이 유다를 대체할 한 사도를 그들 가운데서 선택하도록 이끈다. 베드로에 동의하면서, 무리들은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마침내 맛디아를 나머지 11사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도로 선택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오순절 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는다. 베드로는 11명의 사도들과 함께 서서 무리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설교한다. 베드로의 리더십은 3,000명의 사람들이 초기 교회에 더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주요한 인물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으로 향하다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한 사람을 만난다. 베드로가 그 사라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자 그는 치유된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이 기적을 통해 축적된 주의를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사용한다.
사도행전 4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된 상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다음 날 그들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포함한 예루살렘의 모든 통치자들, 장로들 및 서기관들이 배석한 모임으로 이끌려져 온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와 그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선포한다. 지도자들은 그들을 위협하고 그들이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거절하지만 마침내 풀려난다.
사도행전 5장은 베드로를 분별 있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아나니아는 기반적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교회 앞에 예물을 바친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지적하고, 아나니아는 이어서 그의 발 앞에서 죽는다. 세 시간 후,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도 같은 방식으로 죽는다. 베드로는 점점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은 단지 그의 그림자가 스치고만 지나가도 치유를 받는다 (5:15). 5장 후반에서,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의 공회를 꾸짖고 (5:29),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신자들과 함께 채찍을 맞는다 (5:40).
사도행전 8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간다. 마술사 시몬으로 확인된 한 사람이 베드로의 안수로 성령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금전적인 수단으로 이 은사를 얻고자 한다. 그 기사는 베드로가 부적절한 요구를 한 시몬을 심하게 꾸짖는 것으로 끝난다.
사도행전 9장에서, 베드로는 룻다의 신자들을 방문하고 중풍병으로 8년 동안 마비된 사람을 치유한다. 근처 욥바 성의 죽은 신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베드로는 그녀가 죽어 누워 있는 침상으로 간다. 그는 기도하고 여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고 그녀는 다시 소생한다. 베드로의 능력 있는 행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환상을 본 후, 고넬료의 집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자신들의 손님으로 초대한다. 베드로는 이에 동의하고, 고넬료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게 되고, 예수의 메시지를 모든 열방에게 적절한 것으로 선포한다 (ἔθνος, 에쓰노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이방인들을 포함한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부어진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령의 부어주심에 개입한 세 번째 사건이다-예루살렘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사마리아의 사마리아인들 가운데서 그리고 가이사랴의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러나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일부 유대인들로부터 그가 이방인들을 방문한 것에 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사도행전 11장은 그들의 의혹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을 기록한다. 다시 한 번,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자신의 동료들 가운데서 어떻게 대단히 존경을 받는지를 보여주는데, 베드로의 보고를 듣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신 것에 경이로워한다.
사도행전 12장은 걸음마 단계의 교회와 그 리더인 베드로를 향한 헤롯 왕 (아그립바 1세)의 적대적인 박해를 기록한다. 헤롯은 처형할 의도로 베드로를 체포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천사에 의해 구출되었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감옥에서 벗어났다. 몇몇 신자들과의 짧은 만남 후에, 베드로는 다른 장소로 출발했다 (12:17). 비록 이야기는 그의 목적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에 관한 많은 추측들이 있어 왔다; 로마, 안디옥, 메소포타미아, 고린도 및 에데사가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최후의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다. 베드로의 연설은 이어지는 많은 논쟁을 야기하는 문제를 개입시킨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사용하셔서 어떠한 추가적인 "멍에" 없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하셨는지를 상술한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의 증거로 베드로의 결론을 확언한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하나님의 일을 확증하고 이방인들 중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입하기 위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추가적인 선포를 한다. 베드로의 영향력은, 히브리 성경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과 함께, 영구적인 효과를 가진 초기 교회의 결정적인 변화를 알린다.
서신서들 속의 베드로-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베드로전서
신약 성경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및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의 사도적 사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바울은 자신의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를 광범위하게 언급한다.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기간 동안 만난 첫 번째 사도로 베드로를 언급한다 (1:18). 비록 바울이 자신을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베드로와의 만남이 바울의 최우선 순위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2장에서 바울은 야고보 및 요한과 함께 베드로를 "기둥"으로 묘사한다 (2:9). 그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교는 유대인들에게로, 바울의 선교는 이방인들에게로 향해져야만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보고한다 (2:9–10). 2장에서, 바울은 안디옥에서 있었던 이방인들에 대한 베드로의 위선에 관해 상술한다. 이 기술은 바울과 베드로가 서로 심한 다툼 가운데 있었다는 대중적인 신념을 야기하지만, 벧후 3:15와 같은 다른 본문들은 그 두 사람 간의 상호적인 원조를 확증한다 (이에 관한 더 구체적인 정보를 위해서는, 참고 Dunn, “The Incident,” 3–57; Kilpatrick, “Peter, Jerusalem and Galatians,” 319–26.)
고린도전서는 또한 베드로에 관한 일부 전기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 안의 분열에 관한 자신의 우려로 서신을 연다. 1:12에서 바울은 게바를 사람들이 따르기로 선택한 어떤 존재로 언급한다. 마르틴 헹엘과 다른 학자들은 이것을 소위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갈등으로 불려지는 주제를 더욱 심화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Hengel, Saint Peter, 66–79). 하지만, 아볼로와 예수 자신이 바울이 언급한 그 목록에서 함께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한다. 이 목록이 가리키고 있다고 보이는 것은 베드로의 여정 속에서 어떤 시점에, 그가 고린도에 도착했으며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바울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자신들의 선교적 노력들 속에서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여행했다는 것이다 (9:5). 마지막으로, 미리 형성된 전통이 될 것이 확실한 목록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주님이 자신의 부활에 이어 나타나신 첫 번째 인물로 열거한다 (15:5).
비록 베드로전서는 소아시아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격려의 서신이기는 하지만, 그 저자에 관한 내장된 정보를 제공한다. 만약 베드로전서가 베드로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면, 독자들은 동료 장로로서 교회들을 향해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의 사도를 발견하는 셈이다.συμπρεσβύτερος, 쉼프레스뷔테로스; 5:1에서). 베드로가 머물던 잠재적인 위치는 5:13에서 사용된 암호 "바벨론"을 통해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아마도 로마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게다가, 베드로에 대한 베드로전서의 모호한 언급은 사도에 관한 어떠한 실제적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향해 베드로의 이름으로 쓰여진, 단지 권면의 메시지를 담은 서신일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참고 Perkins, Peter, 120–22).
성경 외적인 작품들 속의 베드로
신약 성경을 넘어, 일부 성경 외적인 작품들은 베드로를 언급한다. 예를 들어, 클레멘트 1서는 로마에서의 베드로의 순교를 상술한다 (참고 Bauckham, “The Martyrdom of Peter,” 549–95). 클레멘트 1서는 AD 1세기 말 어간에 로마 감독 클레멘트에 의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쓰여졌다. 클레멘트는 베드로가 고난을 겪었고 영광스러운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진술한다 (5:4). 초기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세부적 내용을 추가하면서 클레멘트의 진술을 확증한다; 에우세비우스는 교부 오리겐이 이 세부 내용을, 지금은 분실된 오리겐의 Commentary on Genesis 파편에서 기록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3.1.2).
베드로는 또한 베드로 행전과 베드로와 열 두 사도들의 행전을 포함한 일부 비정경 본문들 속에서 주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모든 제자 가운데 베드로는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님을 좇겠다고 약속하면서 가장 맹렬하게 헌신을 단언했던 인물이다(13:37). 그러나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옛 어부 생활로 돌아가게끔 주도한 자도 분명 베드로였다(21:1). 이제 그는 자기가 부인하고 버렸던 그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다시 한 번, 세 번이나 배역했던 그 밤처럼 예수님은 ‘숯불’ 건너편에 있는 그를 바라보신다(18:18; 21:9).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은 단순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심중을 꿰뚫는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을 던지신다. 그 질문은 ‘베드로’ 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 반석은 불안정한 모랫더미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제자는 옛 이름, 곧 예수님이 동일한 호숫가에서 그를 만나고 부르시기 전에 가졌던 이름으로 불린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 베드로는 사랑을 긍정하는 대답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사랑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식의 확실성에 근거한 긍정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은 겸허해진 근심 어린 제자에게 사명을 위임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께 속한 양떼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먹이는 목자의 사명이다.

우리는 이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임을 배웠다(10:11).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했으며, 이를 근거로 그분을 좇을 권리를 요구했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13:36–37)고 말씀하셨다. 이제 베드로는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웠다. 과거에는 자기 나름의 소원에 따라 스스로의 힘으로 ‘따랐다.’ 이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곧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18–19절). 그리고 이제는 그가 ‘따른다는 것’ 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이전에는 바랐으나 주어지지 않았던 그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 ‘따름’ 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같이(12:27–28; 13:31–32; 17:1–5), 그와 동일한 영광이 제자들-그분이 세상 속으로 보내는-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이다(17:10, 22–23).

삼중적인 부인은 삼중적인 위임을 통하여 말끔하게 씻기고 용서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의 기록이 상기시키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예수님께 속한 양떼는 의인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부름을 받은 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가 사도들 중 으뜸의 위치에 있다면, 그것은 그가 용서받은 죄인으로 으뜸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베드로라” 는 말을 들었던 자가 다음 순간에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는 말을 들을 것이다(마 16:18, 23). 예수님이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에 압도된 어부다(눅 5:8–10). 그리고 장차 실족할 그 제자를 향해 예수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이자 목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먼저 제자가 되어야만 그 둘 다가 될 수 있다. 이 단락에서 핵심되는 말은 “나를 따르라” 는 것이다. 교회의 리더십은 선교적인 동시에 목회적이어야 한다.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항상 왜곡된 성직자상을 초래한다. 그것들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 곧 제자도, 십자가의 길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그분의 부름을 받은 자가 능력을 받아 따르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되는 길-에 뿌리 박고 있는 한, 하나이기 때문이다(17:20–23).

요한복음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1.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예수님(21:1–14)

1.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예수님(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본 단락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강조한다. ‘나타나다’(φανερόω, 파네로오)는 말이 1절에 두 번, 그리고 단락의 마지막 절에 한 번 반복 사용된다. 인클루지오(수미상관) 구조(21:1, 14)를 이루어서, 본 단락이 예수님의 다시 나타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낸다.

1) 예수님 없는 제자들의 곤란한 상황(21:1–3)

요한복음 20장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와도 같다.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성령을 주심,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을 경험하였다. 21장은 이러한 일련의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있은 후의 일이다. 공간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디베랴 호수로 장소가 바뀐다(1절).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이다. 앞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호수에 있다. 다른 복음서를 통해 그 이유를 유추해 보면,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다(마 26:32; 28:7; 막 14:28; 16:7).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라 갈릴리로 왔던 것 같다.

주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일곱 명의 제자가 등장한다(2절). 특히 앞서 나오는 세 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이름이 분명하게 나올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각각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누구보다 분명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직접 목격하였다(20:1–10). 또한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다(20:19–23). 도마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여, 직접 예수님의 몸을 만져본 제자이다(20:24–29). 나다나엘은 일찍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신을 예수님이 알아주시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한 인물이다(1:45–49).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한 베드로가 갑자기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한다(3절).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간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왜 고기를 잡으러 갔을까? 학자들의 견해는 나뉜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예수님의 소명을 뒤로하고, 베드로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베드로는 단지 먹을 것을 구하는 차원에서 고기를 잡으러 갔을 수도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406)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시도는 허사였다. 밤새 그물질을 하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3절). 심한 좌절과 절망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밤’(νύξ, 뉙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밤’은 고기를 잡는 적당한 시간일지라도, 요한은 여기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카슨은 부활하신 주님의 깊은 진리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뜻한다고 본다. 하일(J.P. Heil)은 예수님을 부재를 상징한다고 보며, 그래서 제자들은 아무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9:4–5; 15:5). 그러나 제자들의 상황이 부정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본문에 나오는 ‘밤’이 정확하게 상징적인 의도로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갈릴리(디베랴) 호수의 고기 잡는 적정 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밤샘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본문은 이렇게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만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물론 제자들의 실패와 밤이라는 시간대가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분명하다.

3절이 말하는 제자들의 이러한 헛수고는 이들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누가복음 5장에 따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그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눅 5:1–11).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이, 예수님을 만나고도 또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는데도, 자기 삶에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성령을 받았는데도 자기 삶에 아무런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2)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심(21:4–8)

드디어 예수님이 등장하신다(4절). 1절과 14절에 언급된 ‘나타나다’는 말이 실제 일어나는 구절이다. 14절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나타나심이 세 번째라 일컫는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계속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이다. 제일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20:19).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포하시며, 부활하신 자신을 보여 주셨다(20:19–23). 두 번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셨다(20:24–29).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이제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셨다.

빛이신 예수님이 어둠 가운데서 고생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5절).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희망이신 예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말씀하신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절) 말씀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고,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당시, 그분이 예수님인 줄 몰랐다. 그러나 엄청난 결과를 얻고 나서, 예수님을 알아본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풍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다시 얻는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15:5).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했을 때, 풍성한 결과를 얻는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요한복음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을 말씀을 순종했을 때, 풍성한 포도주를 경험한다(2:1–12).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을 믿고 돌아갔을 때, 왕의 신하는 아들이 고침 받는 기적을 경험한다(4:46–54).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고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백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심(21:9–14)

밤새 고기 잡느라 수고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물고기와 빵을 준비하시며,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신다. ‘숯불’(ἀνθρακιά, 안뜨라키아)(9절)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등장한다. 이 구절 이외에, 다른 용례는 앞서 대제사장의 집 앞에서 베드로가 쬐던 ‘숯불’을 가리킨다(18:18). 배신의 장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배신도 감싸 안으시면서 베드로에게 음식을 공급하신다. 또한 요한복음 전체에서 ‘물고기’와 ‘떡’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나오는 유일한 다른 곳은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이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굶주린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자상하신,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이 예표하는 그의 살과 피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암시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독자들이 연결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잘 차려진 밥상을 뛰어 넘어, 그의 살과 피를 바쳐서까지 제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원하신다. 예수님의 음식은 그의 희생적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11절에 나오는 물고기 숫자(153)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상징적 의미를 유추하기에는 본문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학자들이 제시하는 그 어떤 상징적 의미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숫자는 다만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은 제자들이 꾸며낸 허구적 에피소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앞서 ‘나타나다’(φανερόω, 파네로오)라는 동사를 통해 이 단락이 인클루지오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14절에서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세 번째’라 분명히 밝힌다. 다시 말하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20:19–23), 도마에게 한 번 더 나타나셨고(20:24–29), 이제 디베랴 호수에서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다(21:1–14).

교훈과 적용

1.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시는 분이다. 엄청난 부활의 은혜를 체험한 후, 다시 위기 앞에 놓인 제자들을 예수님은 다시 찾아 가셨다. 부활 이후에도 변화 없는 자신의 삶을 보며 낙심하는 제자들을 다시 찾아 가셨다. 오늘날 우리도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때때로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신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소망해야 한다.

2.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풍성한 결과를 주셨다. 예수님은 늘 말씀하는 분이시다.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늘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이제 부활하신 후에도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신다. 이천년 전에 말씀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고, 공부하므로,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겠다.

3. 예수님은 다시 채우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수고한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셨다. 예수님은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채우시며, 배고픈 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신앙 생활하는 동안 예수님은 때마다 시마다 우리를 은혜로 채우셨다. 따라서 지금 영육 간에 궁핍한 우리를 주님께서 다시 채우시는 것을 소망해야 한다. 다시 채우시는 예수님을 늘 생각하며 오늘도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2.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과 명령(21:15–17)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이 알고 계시다고 세 번 대답한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왜 세 번씩이나 하셨을까? 이는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대조되는 장면을 연출하시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수치요, 상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굳건하게 하셔서, 그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세우신다. 앞 단락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셔서 그의 부활을 확신시키시고, 그들을 격려하셨다(21:1–14).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으로 그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격려하신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격려하시기 위해 반복적인 질문을 하신다. 그러한 회복과 격려 위에, 위대한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사명 위임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세 번 질문 – 세 번 대답 – 세 번 사명 위임은 서로 연결되어, 어떤 함의를 지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은 ‘회복’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회복을 넘어, 선교적 사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베드로의 회복과 사명은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의도하신 것 같다.

1)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21:15–17)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이라 부르신다(15절).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이미 1:42에 등장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 즉 ‘요나의 아들’로 묘사한다(마 16:17). (자세한 설명은 1:42 주해를 참조하라)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베드로에게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이나 아픔을 지우시고, 의도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 사람들 보다’(15절)는 문법적으로 3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말로는 ‘이 사람들보다’라고 하였지만, 헬라어 원어(τούτων, 투톤)는 남성과 중성의 뜻이 다 가능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다음의 3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 네가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이것들’이란 물고기 혹은 물고기 잡는 것과 관련한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시고, 질문하실 수 있지만, 학자들은 어느 하나의 의미일 것이라 주장한다.

위더링턴(Witherington)은 두 번째 견해를 피력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과 다른 사람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모든 사람들과 단절되더라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느냐를 질문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강조하는데(13:34; 15:12), 이는 좀 모순이 있다. 키너(Keener)는 문맥에서 볼 때, 세 번째 견해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그의 소명을 확신시키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의 원래 직업을 떠나, 사람을 돌보는 사역에 집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견해는 전혀 일리가 없지 않다. 만약 앞 단락에 나오는,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는 것(21:1–14)을 부정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키너의 견해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주장한다(카슨, 모리스, 쾨스텐버거, 마이클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베드로의 헌신은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진다(6:67–69; 13:36–38; 18:10; 21:7, 18–19). 베드로는 누구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다짐했다. 그러나 배신의 추억은 그를 움츠리게 했고,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이에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사랑과 헌신을 불러일으키신다.

여기서 ‘사랑하다’는 표현을 위해 헬라어 ἀγαπάω(아가파오)와 φιλέω(필레오)가 교대로 사용된다(15–17절). 혹자는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 신적 사랑(아가페)을 나타내는 아가파오는 ‘하나님 차원의 사랑’을, 친구간의 사랑(필리아)을 나타내는 필레오는 ‘인간 차원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님이 아가페 사랑을 요구하였지만, 베드로는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한다. 두 번째 질문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 사랑을 기대하셨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한다. 마침내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필리아 사랑으로 낮추어 베드로에게 질문하셨고, 이에 베드로는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하였다. 요컨대 처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수준 높은 신적 사랑을 요구하셨지만, 베드로는 계속 인간적 차원의 사랑만을 고백한다. 그러나 마침내 예수님은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춰 인간적 차원의 사랑을 요구하시고, 베드로도 이에 화답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넓은 마음과 자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최근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세기 당시 두 단어는 구분 없이 많이 사용되었고, 특히 요한복음 자체가 구분 없이 두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5:20과 16:27은 필레오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17절에 의하면, 문맥에서도 요한복음 저자가 아가파오와 필레오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시므로”라는 말을 통해, 저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는 예수님의 질문이 세 번째라는 것을 밝히며, 앞에서 아가파오로 물으신 것까지 다 포함한다. 더욱이 문맥에서 비슷한 의미의 두 단어를 서로 바꿔 쓰는 용례가 두드러진다. ‘어린양’(ἀρνίον, 아르니온)과 ‘양’(πρόβατον, 프로바톤)이 함께 쓰이고, ‘먹이다’(βόσκω, 보스코)와 ‘치다’(ποιμαίνω, 포이마이노)가 함께 사용된다. 이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문학 기법이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서론에서 ‘알다’와 ‘영접하다’와 ‘믿다’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1:10–12). 또한 ‘믿다’와 ‘순종하다’도 같이 사용된다(3:36). 예수의 ‘말씀’을 나타내는 λόγος(로고스, 8:37)와‘ρῆμα(레마, 8:20)는 뜻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두 단어(아가파오/필레오)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는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문체를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

2)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21:15–17)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실 때마다, 그에게 사명을 주신다. ‘양을 먹이라’ 혹은 ‘양을 치라’는 말씀은 목자의 사명을 암시한다. 양을 먹이는 것은 원래 예수님의 사명이셨다(10:1–18; 참고. 겔 34:23; 37:24).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들을 위탁하시며, 자신을 대신하는 목자가 되라고 하신다. 신약에서 ‘먹이다’(βόσκω, 보스코)가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참고. 마 8:30).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집나간 탕자가 돼지를 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눅 15:15). 그는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한 후에, 돼지를 먹이는 비참한 직업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놀라운 직분을 받는다. ‘치다’(ποιμαίνω, 포이마이노)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설명하기도 하고(마 2:6; 계 7:17), 교회의 지도자의 역할을 나타내기도 한다(행 20:28). 문자적인 뜻은 양을 먹이고, 지키고, 인도하는 목자의 전반적인 목양 활동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먹이다’와 ‘치다’는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어떤 목양을 일컫는 말일까? 요한복음 10장에 따르면, 목자로서 예수님은 양들에게 꼴을 제공하셨다(10:9). 그리하여 양들을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도하셨다(10:10). 또한 삯꾼과 달리, 예수님은 이리로부터 목숨을 다해 양들을 지키셨다(10:12–15). 그리고 양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도 인도하셔서, 두 종류의 양들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10:16). 이러한 목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델이 된다. 물론 예수님의 독특한 기독론적 역할을 베드로가 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이라는 위대한 목자의 위임을 받아, 양들이 예수님의 목양을 잘 받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을 목양하는 예수님의 자세를 본 받아야 한다.

첫째, 양들을 꼴로 먹여야 한다. 양이 꼴을 먹고 자란다면, 성도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요한복음 10장 주해에서, 우리는 ‘꼴’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생명)을 주신다고 보았다(10:9). 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의 양들에게 ‘꼴’을 주시므로, 종말론적 구원과 안식을 성취하신다는 말이다(참고. 사 49:9–10; 겔 34:12–15). 요한복음에서 성도에게 구원을 위해 필요한 꼴(양식)은 무엇인가? 생명의 양식(떡)이신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6:35),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를 의미할 수도 있다(4:14; 7:37–39). 그러므로 목자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도들을 예수님과 성령께로 인도하여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한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6:63), 목자들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먹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파하고 가르쳐서, 성도들을 먹여야 한다.

둘째, 양들을 지켜야 한다. 10장의 문맥에서 이리는 제자들을 향해 가해지는 세상의 위협이나 공동체의 어려움이다(10:12–15).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괴롭히는 세상을 이리(뤼코스)와 연결시킨다(마 10:16).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어린양을 이리(뤼코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눅 10:3).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법정에 넘기기도 하고, 회당에 채찍질하기도 할 것이 때문이다(마 10:17).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리(뤼코스)를 언급한다(행 20:28–30).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침투하여,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묘하게 유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사나운 이리’라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협과 거짓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들을 지키신 선한 목자이셨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께로부터 양들을 위임 받은 목자들도 위협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

셋째,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 하나 되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그의 우리로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우리 안의 양들과 우리 밖의 양들이 하나 되게 하셨다(10:16). 앞서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목자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까? 이는 선교론적 그리고 교회론적 함의를 지닌다. 제자들은 복음 전도를 통해 우리 밖의 다른 양들이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한다. 전도되어 공동체에 새로 들어 온 사람들과 기존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한다.

요컨대 본문에서 예수님이 목양을 위임한 대상은 베드로이지만, 이는 제자들 전체를 향한 명령이다. 제자들의 리더십에 의해 세워지는 모든 교회들을 향한 사도적 사명을 가리킨다. 교회는 사도적 사명을 이어 받은 공동체로서 예수님의 목자 역할을 계승, 발전 시켜야 한다. 이런 면에서 목자 기독론은 목자 교회론과 연결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목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양들에게 꼴을 먹여야 하며, 양들을 지켜야 한다. 또한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한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10장에 이어 자신을 양의 목자로 나타내시고(10:11, 14), 그 양은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양 무리를 치되, 양들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목자이신 주님을 본 받아, 자신의 목숨을 다해, 주님의 소유를 지켜야 했다(10:15; 21:18–19).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님의 교훈에 따라 권면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장로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고 한다(벧전 5:2–3). 물론 양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인 목자에게 순종으로 화답해야 한다(히 13:17).

교훈과 적용

1. 예수님은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베드로는 자칫 배신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고통 가운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고, 영혼을 강건하게 하신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의 제자들이 그를 닮은 목자가 되게 하신다.

2. 예수님은 아시는 분이다. 베드로는 사명을 받기 전에,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의지한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상황을 아시며, 우리 마음의 중심을 아신다. 사람들은 비록 몰라주더라도,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을 믿고, 꿋꿋하게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한다.

3. 예수님은 사명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최종적 목표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양들이 예수님을 만나 영생을 누리도록 꼴을 먹여야 한다. 양들이 위협이나 거짓에 휘둘리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그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많은 양들이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목자들은 먹이고, 지키고, 확장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3.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과 운명(21:18–25)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1) 베드로의 사명과 운명(21:18–19)

예수님은 젊었을 때 베드로의 모습과 늙었을 때 베드로의 모습이 다를 것이라 예언하신다(18절). 젊었을 때는 베드로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닐 수 있다. ‘띠를 띠다’(ζωννύω, 존뉘오)는 옷을 입는다는 뜻인데, 신약에서는 이 구절과 사도행전 12:8에만 나온다. 사도행전에서도 주의 천사의 인도를 받아,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베드로가 띠를 띠는 모습이 나온다(행 12:8). 따라서 베드로의 젊었을 때의 모습은 곧 그가 체포되어 순교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앞서 고기 잡는 장면에서, 베드로는 스스로 옷을 입고(7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11절).

그러나 그가 늙었을 때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네 팔을 벌리리니’(18절)는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18절은 예수님이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예언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저자와 독자들은 이러한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도 베드로의 순교를 언급하고(1 Clement 5:4),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증언한다(Scorpiace 15). 베드로 행전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고 한다(벧 행 37–38).

이어지는 구절에서 요한복음 저자 자신이 베드로가 팔을 벌리는 것과 그의 죽음을 연결시키고 있다(19절). 베드로의 죽음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앞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영광을 얻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13:31–32).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17:1). 예수님은 사명을 성취하시므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17:4).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를 암시한다. 문자적으로 이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제자도를 암시하기도 한다(13:36).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제자도로서의 십자가 삶을 생각나게 한다(마 16:24; 막 8:34; 눅 9:23).

2)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21:20–23)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여쭙는다(21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운명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데 집중하라고 하신다(22절). ‘따르다’를 뜻하는 ἀκολουθέω(아콜루떼오)는 이미 19절에서 언급되었다. 19절에서는 문자적인 뜻이 조금 더 강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다분히 상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자도를 상징한다(참고. 1:43; 8:12; 12:26). 일찍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고별 강화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려 했다(13:36–38). 그러나 예수님은 나중에 베드로가 그를 따를 것이라 하셨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수님은 정식으로 베드로에게 그를 따를 것을 명령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목양의 삶을 의미한다.

한편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는 10장에서도 아콜루떼오가 사용되었는데,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을 소개한다(10:4–5, 27). 그 양은 타인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목자의 음성을 따른다. 앞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목자로 부르셨다. 자신의 양들을 베드로에게 위임하셨다. 베드로는 자칫 자신을 예수님과 동등한 목자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역할은 예수님과 동등한 목자의 역할이 아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르는 양에 불과하며, 그의 목자 역할은 위임된 역할이다. 따라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항상 ‘목자’와 ‘양’이라는 자신의 두 가지 신분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는 목자이면서 양이다.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양이면서, 동시에 다른 양들을 돌보아야 할 목자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사랑하시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킨다(23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가 살아 있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23절). 따라서 본 단락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을 다루지만, 사실은 베드로의 사명을 계속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가 맡은 사명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21:24–25)

‘이 일들’(24절)은 요한복음 전체를 가리키며, 예수님에 관한 모든 증언을 의미할 것이다. 요한복음은 ‘증언’에서 시작해서 ‘증언’으로 끝을 맺는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시작하였다(1:6–9). 이제 끝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전체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다. 요한복음의 중심에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있다. 세례 요한의 주된 사역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었다(1:7–8, 15, 32, 34; 3:26; 5:33).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했고(4:39), 예수님의 사역이 예수님을 증언했다(5:36; 10:25).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증언하셨다(5:37; 8:18). 그리고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며(5:39),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저자는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자로 묘사한다(19:35; 24절). 이러한 증언들을 통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 것을 증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다(20:30–31).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이 구분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21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지만,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살아남아서, 예수님을 증언하였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들이지만,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부르심은 달랐다. 베드로에게는 순교하기까지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셨다. 다른 한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는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라는 증언의 사명을 주셨다. 물론 이 말은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명이 배타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즉, 베드로도 증언의 사명이 있고, 사랑하시는 제자도 목양의 사역을 했다. 다만, 예수님께 중점적으로 쓰임 받은, 각각의 독특한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참고. 17:4; 21:19).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이 참되다고 말하는 ‘우리’(24절)는 누구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교회 공동체로 본다. 그의 교인들이 그의 증언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있다. 마치 복수의 증언자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복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을 지지하고 있다. 또 다른 제안은 ‘우리’를 요한복음 저자인,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자신으로 본다. 이는 요한복음이나 신약에서 종종 1인칭 복수 형태를 통해 저자는 화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예. 1:14; 3:2, 11; 20:2; 요일 1:2, 4, 5, 6, 7; 요삼 12; 고후 12:2–4).

교훈과 적용

1.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이다. 제자로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좇아가듯이, 제자인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가야 한다. 심지어 목양의 삶을 살 때도,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의 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도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진정 목자의 삶을 살 수 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증언자로 부르신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증언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증언을 통해 그의 사명을 감당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의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각자 처한 환경이나 직업은 다르더라도,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증언의 삶을 살아야 한다.

3.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신다. 목자로 부르시든 증언자로 부르시든, 제자로 부르시든, 그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도 한 평생을 그것을 위해 사셨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힘써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서로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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