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끝에서 예수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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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 21장 15절(신약 185쪽)
설교제목: 나의 끝에서 예수로 시작합시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서 좋습니다.’
# 축복후
설교에 앞서 영상 한편을 먼저 시청하려 합니다.
# 영상: 약 5분 30초
아시다시피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달리 말하면 부활은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잘 아시다시피 부활주일을 다른 주일보다 화려하고 특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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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에서도 이를 위해 세례식과 성만찬 예식을 했고, 성가대의 칸타타를 비롯하여 여러 기관에서 부활절을 기념하는 다양한 발표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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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건 우리 교회만이 아니고 여러 나라 교회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이는 그만큼 부활을 기념하는 일이 기독교에서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왜 부활이 중요한 일일까요? 그보다 앞서 부활은 대체 무엇일까요? 보통은 이렇게 이해할 것입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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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방금 읽은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부활하셨다는 얘기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이전에는 부활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 말고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이 살린 사람들이고 예수님보다 먼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3명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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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나인성 과부의 아들입니다(눅 7:11-17). 둘째, 야이로의 딸입니다(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셋째, 나사로입니다(요 11:1-44). 이 모두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성경은 이들이 부활의 첫번째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의 첫번째임을 말합니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활도 다른 누군가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성경이 증언하는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왜 기독교에서 또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일까요? 물론 교리적으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또한 부활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영원히 사는 것 또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부활은 신비입니다. 국어사전은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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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이나 지혜 또는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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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신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무스테리온(μυστηριον)’입니다. 이는 ‘감추어진 것’ 또는 ‘비밀’을 뜻합니다. 결국 신비는 인간으로써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부활합니다. 그런데 부활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죽기 전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일까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길 원하시나요? 또 우리가 부활하면 어떻게 살게 될까요?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까요? 아니면 상상 속 천사들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게 될까요? 사실 우리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신비입니다. 그러니 신비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달리보자면, 하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비를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부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로 알게 합니다. 우리가 믿고 예배하며 따르는 분이 얼마나 신비하신 분인지를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알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결코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게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참으로 높고 위대하신 분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그와 같이 놀라운 분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건이기에 특별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밤 하늘을 수놓은 많은 별들을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2014년 6월에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호주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함께 생활하던 이들과 밤에 별을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호주는 워낙 땅이 넓어서 도심지를 벗어나면 가로등도 없고 심지어 비포장 도로에 휴대폰도 안터지는 지역이 있습니다. 정말 무섭도록 깜깜한 그곳에서 저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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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제 평생에 아직까지도 가장 인상적인 광경중 하나입니다. 별이 쏟아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경험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당시의 장면은 아니지만, 함께 생활했던 대만 친구에게서 호주의 유명한 관광지인 ‘울루루’에서 찍은 사진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진이 무척 잘 나오긴 했지만 눈으로보는 광경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여지는 작은 별은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보다 큰 어마어마한 행성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우주에 흩뿌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 없이 거대한 산과 폭포 앞에만 서도 인간이 참으로 작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광경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놀라운 광경 앞에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이 커지며 더 나아가서는 그 앞에서 작아지기에 경외감을 갖지 않습니까? 정말로 그 거대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또 그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이 얼마나 신비로운 분인지를 충분히 깨닫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이러한 신비를 경험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내 인생의 주인이 더이상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이고요. 내 인생의 운전대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내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한편 이는 내 경험과 내 고집을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관해 유명한 지침을 주었던 책은 이런 제목을 달고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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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신앙생활의 핵심을 잘 얘기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내려놓은”, “더 내려놓음”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가 신앙생활에 관해 돌아볼 지점이 생깁니다. 과연 나는 내 생각과 내 뜻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붙들며 따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또 나는 내가 주인인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인인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정직하게 서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렇지 않을 수 있으니 때문입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하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나는 서쪽으로 가서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진실하게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 대부분은 이에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계속 우리에게 반복되는 죄의 모습은 아닌가 합니다. 성경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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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로 말미암아 나라가 멸망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제자들도 타락함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립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성경에 나온 이들과 다르다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되게 살아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은 매몰차게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저는 그것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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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15절(신약 185쪽)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방금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온 장면을 보여줍니다. 아시다시피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히자 모두 달아나 버립니다. 그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간 것에 관한 분풀이나 보복을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식사하시고 특별히 베드로를 위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명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이를 세 번 반복하시는데,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질타하기 위해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 실패했다고 제자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꺼이 제자들을 품으시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따르도록 다시 초청하시고 그 길로 다시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참 좋은 분이라는 것은 잘 알겠는데, 저는 종종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들이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들입니다. 한번 배신했는데, 두 번 배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배신한 제자들을 용서한 것이 좋은 선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또는 하나님의 뜻대로 남은 생을 마쳤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떻습니까? 사업상으로 내 뒤통수를 쎄개 떼리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내 사업이 망했다거나 거의 망할 뻔했다면 그 사람과 다시 손을 잡고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른바 팔복이라고 알려진 것인데요. 마태복음 5장 3절~10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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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10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요즘 세상에 이와 같은 이들이 복을 받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에게 이용당하거나 바보취급 당하거나 소외받기 쉬운 이들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와 같은 이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참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에 책 한 권를 접하면서 이것이 신앙의 신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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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쓰신 분은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이라는 미국의 목사님입니다. 그는 이 책의 시작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신이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어떤 남자와 통화를 한 이야기입니다. 그 남자는 몇 주 전에 18개월된 그의 아들을 사고로 잃었습니다. 더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실은 그 사고는 그 남자가 자신의 차를 후진하다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목사님은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 한 동안 긴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혹시 제게 특별히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건가요?” 목사님이 이런 다소 황당하고 이상한 질문을 한 까닭은 이랬습니다. 이 사고는 몇 주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사고가 일어나고 한참 뒤에 전화를 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목사님의 예상대로 그 남자가 전화를 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라는 의무감 때문에 교회에 가끔 의무감으로 얼굴을 비췄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인해 절실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이 순간에 난생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어요. 이게 이상한 일인가요?’ 목사님은 그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과거엔 ‘페이스북’ 지금은 ‘메타’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글을 올려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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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때. 예수님이 실재가 되었다.’ 여기에 빈 칸을 채워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여러 지인들은 다양한 답을 했습니다. 가령,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등을 돌렸을 때, 말기 암으로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심장박동이 멈춘 것을 확인했을 때’ 등등을 말입니다.
그러다 모든 답을 종합해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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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끝에 이르렀을 때 비로서 나에게 예수가 실재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책의 제목이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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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은 그 책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나의 끝, 예수의 시작”
저는 이것이 신앙의 신비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신비는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통해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과 능력을 넘어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비는 우리의 예상을 뒤흔들고 우리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없고, 가난한 자가 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비는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신비는 우리의 상식과 경험과 능력의 끝에서 경험되어지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신비를 경험한 이들은 변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떠나 실패했던 이들이 주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새로워집니다. 그들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담대히 스승의 가르침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갔고 기꺼이 그것에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임한 신비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끝나는 지점에서 내가 실패하고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나로써는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하는 지점에서 예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라건데, 오늘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대단하고 잘난 사람에게 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고 죄많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나 변화되는 그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붙습니다. 우리가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릴때, 하나님께 운전대를 넘겨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로부터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변화된 삶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