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의 끝에서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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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1:5-7(신약 165쪽)
설교제목 : 주님은 우리의 끝에서 일하십니다.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최근에 흥미롭게 읽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은 미국의 목회자로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 목사님입니다. 일전에 제가 이분이 쓴 다른 책 곧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에 관해 소개한 적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앞서 ‘제자’에 관한 주제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분이 쓴 다른 책을 감명 깊게 읽게 되어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늘 얘기를 나누려 합니다.
제가 아직 그 책의 제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의 제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책의 제목이 책 내용의 전체를 잘 요약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제가 오늘 나눌 이야기에 핵심이 되기 때문에 좀 뜸을 들여서 강조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말하기에 앞서 그 책의 제목이 지어진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책에서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책의 저자인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있었던 한 남자와의 통화를 소개합니다. 그는 몇 주 전에 18개월된 아들을 잃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남자가 자신의 차를 후진하다가 아들을 보지 못하고 차로 치어버린 것입니다. 전화로 이 소식을 들은 목사님은 무슨 말로 어떻게 해서 위로해야할지 몰라 한 동안 서로 간에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섣부른 위로가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더러 오히려 그 남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긴 침묵을 깨고 목사님이 그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제게 특별히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건가요?” 목사님도 이 질문을 내뱉고서 순간 적절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한 까닭은 이러했습니다. 그 남자는 불행한 사고를 겪고나서 바로 연락한 것이 아니라 몇 주가 지나 목사님에게 연락했습니다. 거기에는 아마도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목사님의 짐작은 맞았습니다. 그 남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래 자신은 교회를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기독교인으로써 의무감으로 가끔씩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이 순간에 난냉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어요. 이게 이상한 일인가요?’ 참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그 남자와 그 남자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러고나서 목사님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즐겨하던 페이스북이라는 인터넷사이트에 이와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ㅇㅇㅇ 할 때. 예수님을 만났다’라는 문장을 쓰고 여기에 언제 예수님을 만났는지 문장을 완성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응답하여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 전체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주는 댓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끝에 이르렀을 때 비로서 나에게 예수가 실재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나누는 책의 제목으로 다듬어 졌습니다. 곧 ‘나의 끝, 예수의 시작’이 바로 오늘 나눈 책의 제목입니다.
저는 일찍이 ‘펜인가, 제자인가’라는 책도 흥미롭게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 읽은 ‘나의 끝, 예수의 시작’이 같은 분이 쓴 책이라는 것을 알고 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책 제목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을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내가 주인이던 삶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내가 끝나고 예수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 곳곳에서 확인되는 신앙인의 모습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예를 들면, 병들었거나 귀신이 들렸거나 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음을 얻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나 물고기와 떡 조금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사건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자 예수님은 이를 해결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기에 이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도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다시금 오늘 성경 구절을 같이 읽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5-7(신약 165쪽)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방금 읽은 구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나사로와 그의 가족인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 곧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초대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식사도 같이 했습니다. 물론 식사 준비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갈등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문화에서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관계를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밥먹는 것이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밥을 함께 먹는 것은 그와 매우 친밀한 관계 또는 특별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일찍이 나사로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들과 얼마나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좀 뜻밖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머물던 곳에서 오히려 이틀을 더 머물고 나사로에게 가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또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아프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면 모든 일을 제처놓고 먼저 달려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틀이나 지체하여 나사로에게 갑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거기엔 이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하나님이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하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줄여 말하면 예수님이 이틀을 더 머무신 까닭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은 나사로를 살리셔서 무덤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하십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은 더 이상 아무런 손을 쓸 방법이 없을 때, 예수님이 비로소 일하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끝에서 예수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말입니다. 달리 보자면, 내가 나의 생각과 욕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은 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올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끝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저는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문제를 먼저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오른손이 멈출 때 주님의 오른손이 움직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문제는 해결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우리가 언제나 주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이 도움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내 힘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