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10~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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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베드로는 성도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3~9절을 통해 교회가 가지는 구원의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예언과 천사들을 등장시키며 이 구원에 대해서 거듭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선 내용(3~9절)은 영광스러운 구원의 영적 실상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구원이 무너지지 않는 토대(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베푸실 전능한 능력으로 인해 결국 우리는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유업을 가지게 될 것임을 밝혔습니다. 이 산 소망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올 실재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언자를 등장시킴으로 역사 속에 예언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구원에 관해’(10절)는 앞선 내용을 받아 더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1세기 당시에 만연한 ‘또 다른 구원’과는 구별되고 전혀 다른 것임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해오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 산 소망이야말로 진실되고 참된 구원임을 말했습니다. 그가 이 편지(베드로전서)의 서두(3~12절)를 한 호흡으로 이 구원의 영광스러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이 조롱하며 부르는 그 이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넉넉한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벧전4:16).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세상이 사용하던 조롱섞인 표현인데도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성도들을 세상은 왜 비방하고 핍박합니까? 유대인의 왕을 자처하던 예수라는 청년은 로마의 사형틀 위에 처참하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그 청년을 기리며, 그를 따르는 자들로 생각하니 그들에게는 성도들이 어리석게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당시의 지중해 근방은 모두 로마 제국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로마의 황제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이 안겨다주는 평화를 사랑하고 원하는 물결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나톨리아라 불리는 소아시아(베드로전서의 수신자)는 35개의 도시가 황제숭배 지역의 신전관리인(νεωκόρος)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열렬했습니다.
로마라는 강력한 제국의 출현은 그 시대의 구원이자 복음으로 여겨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의 범접하지 못할 군사력과 풍부한 경제력은 어느 정도 질서와 법규, 평화와 안정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힘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어리석은 이름일 뿐입니다. 반면 지혜로운 이름이요, 미쁘게 여겨지는 이름은 로마인 것입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외면하면서 ‘나 혼자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와 같은 회색지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섞이거나, 지키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1장에서 긴 호흡을 가지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을 자처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일깨워주며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물결과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

베드로는 예언자(선지자)들이 ‘이 구원’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고(ἐξεζήτησαν, 간절히 찾다) 찾았다고(ἐξηραύνησαν, 샅샅히 뒤지다) 말합니다(10절). 단순히 호기심에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전부 빼앗겨 열심을 내어 연구할 뿐 아니라 찾기까지 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처참하게 망가진 인류를 한 의로운 종을 통해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사53:11) 복음에 대해 그들은 온 마음을 빼앗겨 일생을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소아시아의 성도들도 세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 함으로 비방을 당했습니다(벧전4:4). 예언자들은 이들보다도 먼저 열심히 세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들은 소아시아를 넘어 신약성도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 예언하며 연구했습니다. 알면 알수록 밭에 감추인 보배를 발견한 것과 같이 그것이 너무 사랑스럽고 흠모할만큼 가치로운 것이어서 열심을 낸 것입니다.
이들의 열정과 열심은 세상에서는 꽤나 이목을 끌었을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모든 열심과 관심을 로마에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로마의 일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불만족을 느끼던 이교도들과 노동자들도 로마를 전복해야할 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로마 제국의 사회 생활에 포함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로마는 모두가 선망하는 브랜드와 같이 자리를 잡아나갔습니다. 이런 물결 속에 지중해 세계를 가로질러 신분의 정점이 된 것이 “로마의 시민권”입니다. Goldworthy라는 역사가는 ‘로마와 그것의 황제는 그렇지 않은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까지 대중의 삶의 모든 측면을 잠식했다’고 평가합니다. 로마의 일원이 되는 것과 그들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따라 사는 것은 일종의 ‘복음’이자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예언자들은 세상이 선전하는 복음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으로 우리를 반전시키실 그리스도의 출현만 기다렸습니다. 도대체 언제일까, 어느 때일까 고민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달음박질과 다른 예언자들의 열심과 열정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된 구원의 위대함을 일깨워주고자 합니다.
한편 서두에 말한 것과 같이 이와 같은 풍조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트렌드에 맞춰 로마를 찬양함으로써 무리와 조화를 이루거나,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임을 타협하지 않는 반문화적인 고백으로 사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복음이요 구원으로 자리잡은 로마와 신의 대리인으로 신격화되던 로마 황제를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숭배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잘 산다’는 것은 로마의 문화대로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교도들과 같이 일종의 종교생활을 하고자 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유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살아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상숭배요 하나님과 로마를 겸하는 타협인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요합니다. 하지만 바르게 산다는 것은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추앙하는 시민들과의 연대를 나타내는 제의적 표현들과, 도시의 안녕을 보장하는 로마를 향한 충성과 감사를 중단함으로 인해 사회 위험 요소로 여겨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마땅한 선택은 성경이 예고한 무겁고 다양한 어려움들을 야기했습니다(벧전1:5).
하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선택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 마음이 두 마음으로 갈라지기도 하고(약1:2,8) 깊이 근심하기도 했습니다(벧전 1:6). 한편 마게도냐 지방에 빌립보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대한 권면이 나타납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며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눈여겨 볼 것을 교훈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따라 달음질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자들에 대해 눈물흘리며 오직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만 기다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로 살 것을 권합니다(빌3:17~20).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

다시 베드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1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영께서 예언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에게 있을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가리키는게 분명해 보입니다. 베드로가 굳이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성령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해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메시야’를 그리스어 음역을 따른 표기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왕, 선지자 등 하나님께 구별된 일꾼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 칭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선지자요, 왕이며, 제사장으로서 세 가지 직분을 모두 부여받으신 분임을 분명히보여주는 호칭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할 메시야의 영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자들에게 계시했다는 것은 제사장이자 왕, 선지자이신 예수께서 친히 고난 당하시는 것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정하신 방법이자 통로라는 뜻입니다.
벧전 2:24-25) 이거도 삽입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한채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찾아오시며 십자가의 고난과 그 후에 있을 영광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더딤을 지적하시며,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를 들어 예수님에 관한 성경 말씀을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었다”고 말합니다(눅24:25~27).
이사야 53장 등 모든 만물을 회복시키실 그리스도의 사역
> 이를 위해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 로마의 복음과는 차별적인 그리스도의 복음
> 내걸고 있는 회복은 죄와 사망 아래 신음하고 있는 자유와 해방의 회복임
>하지만 이 고난과 영광은 우리가 걸어가야할 이정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나그네셨다. 잘 살아보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잠시 목적을 따라 오셨고, 목적을 이루셨고, 다시 본향으로(아버지의 나라)로 가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마가복음).
베드로의 의도는 무엇인가?
베드로는 우리가 고무되기를 원하고 있다. 힘과 격려를 주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정표다. 그리스도가 도달한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함으로 도착하게될 우리의 경주의 종착점이다.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은 자신과 상관없는 하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이자 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시작해서 결국 영광의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으니(벧3:18,22), 그가 우리에게 보이신 나그네로의 여정은 곧 우리가 걸어갈 길인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성도들이 만났던 여러 가지 어려움은 갑작스레 만나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을 걷게 될 교회에게 먼저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고난)을 참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기쁨(영광)을 위해 참으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고, 결국 영광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12:2). 따라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교회는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 잠시 근심할 수 밖에 없을지라도, 그것이 절대 끝이 아닙니다. 선한 목적이 있고, 우리가 참여할 영광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복음을 만나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1세기 소아시아 지방에만 있었던 이슈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처럼 우주적 교회에 대한 이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나와, 세세토록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할 자들입니다(계7:14,22:5).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처럼 영광에 이를 자들입니다. 전능한 장인이신 하나님께서 고난의 밤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친히 함께 하십니다. 지금도 능력을 베풀어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빚어갑니다(벧전1:5,7). 그러니 우리의 여정은 베드로가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구약의 예언자들이 흠모하는 은혜의 때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10절).
(히 11:13)을 통해, 멀리서 약속의 성취를 환영하던 사람들도 그 영광스러움과 위대함에 스스로를 나그네로 자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 시대는 더욱이 스스로를 나그네로,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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