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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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좋은) 목자다

10장은 언뜻보기에는 쉬운 내용처럼 보이지만 지난 주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죠.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문’ ‘ 선한 목자’라고 비유하고 있는 이런 비유는 양을 지키는 목자라는 이미지를 설명없이 우리를 위하시는 예수님으로 결론적으로 말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차례대로 살피는 과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고 기존에 알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와 뒤엉켜 오히려 복잡하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9장 날 때부터 맹인된 자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고침 받은 동료를, 이웃과 바리새인들의 거부가 당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공동체에서 출교되는 엄중한 상황을 배경에 두고 있는데. 부모조차도 법이 두려워 쉽게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눈뜬 맹인은 이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함으로써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에 의해 고발 당하고 출교될 상황에서 이어집니다. 더 복잡한 것은 예수께서는 ‘내가 심판하러 이세상에 왔다’고 하는 즉 ‘죄에 대한 심판’을 말씀을 하시는 방식은 계속해서 양의 문, 선한 목자 비유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 비유를 시작하면서 중요한 말씀은 ‘문을 통하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문을 통하여’라는 말씀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문에 대하여 문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하면 이야기 흐름의 이해가 쉽겠지만 저자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말함으로 현장에서 듣는 이들 즉 예수를 거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을 대상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통하지 않는 자들을 ‘절도, 강도’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문은 문지기에 의해 목자만 양을 꺼내기 위해 출입한다는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설명이 굳이 필요없는 ‘뭔 당연한 이야기를 해’라는 분위기에 지난 주 6절에 ‘이런 당연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지난주 문장에서 ‘메’라는 의문사를 써 ‘내가 아니죠’라고 묻듯 말하면 상대는 ‘그래 아니지’라는 답을 전제하는 수사적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담을 넘어 들어가는 건 아니다’라고 말할 때 듣는 청중도 ‘그래 그건 아니지’ 라는 답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자는 문지기의 허락하에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동시에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관계를 목자와 문지기,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표현된 바리새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1차적인 결론을 맺습니다.
7절부터 예수께서 자신을 문지기가 아닌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6절까지 비유의 중심에는 ‘문을 통하여’이기 때문에 더 상세하게 예수께서 심화하시는 것이죠. 이제 자신을 문이라고 했다면 자신을 통하지 않는 자들은 앞서 말씀하신 ‘절도,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구원과 연결합니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진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이 갖는 의미는 ‘꼴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구원의 풍성함이 드러납니다. 10절 하반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구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목자의 인도에서 문을 통해 구원의 방식이 어떠한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비유 그리고 이어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구조를 아시겠죠)
하지만 절도와 강도 즉 문을 통하여 다시 말씀드려 예수님을 통하지 않는 자들의 결과는 생명과 반대되는 멸망이죠. 도둑이 양을 위하여 행할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는 구약의 메시야관이 함의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부분에서 자연스럽지가 못하기 때문에 빠른 이해가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1절의 선한 목자는 12절의 삯꾼으로 비교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한 ‘문을 통하여’라는 중요한 맥락은 갑자기 ‘선한 목자’와 ‘삯꾼’으로 바뀌므로 글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을 통하여’는 하나님께서 믿음(마치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서로 알고 따르는 것)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구원하시는데 무엇에 대한 믿음이냐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식을 말합니다. 하지만 앞서 유대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이어 등장할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은 이런 방식을 거부하는 합니다. 다시말해서 기존 그대로의 제사 제도와 율법을 지키고 율법의 핵심인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메시야가 오신다는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죠. 더 복잡한 것은 그렇다면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왜 예수께서는 ‘죄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10장은 익숙한 양의 우리, 목자 비유뿐만 아니라 이면에 유대인 뼈속에 새겨진 구약의 메시야관에 대한 잘못된 믿음까지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뼈속에 새겨진 걸 정의해보면, 구약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백성 삼으시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왕과 백성의 관계를 맺는 일종의 계약(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계약의 증명인 계약서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사는 것이고 이 계약에 짐승 제사를 드려 피를 뿌림으로 계약의 중차대함을 서로의 생명으로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약이 파기되면 위약금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죠.
여기 본문에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를 이해하시겠죠. 그리고 죄가 있다는 말이나, 죽이고 멸망 시키는 것 등 부정적인 면은 죄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심판과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를 위해 부모가 간혹 자녀들에게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너하고 싶은대로 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한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고 훈육을 하는 관계 아래에서 책망이지만,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는 것은 책망을 더 듣지 않으려는 자녀에게 관계까지 걸고 하는 높은 강도의 책망인 것이죠. 그말을 듣고 있는 상태는 매우 위급한 상태이지만 자녀들은 잘 모르죠. 죄의 상태는 즉 심판적인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계약에는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있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사랑으로 계약을 이행하시는데 이것을 ‘은혜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둘째로 계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으로 ‘에메트, 요한복음에서는 진리로’라고 합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의롭게’됨을 입는 관계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깨뜨려 이런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당연히 계약 파기자로 ‘생명’으로 심판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백성을 향한 헤세드 와 신실하심이 작동을 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은혜와 진리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동방식이 구약 예레미야는 새 언약이며 그리고 새 언약 안에는 죄를 용서하는 과정까지 담고 있다는 이 방식이 ‘문을 통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내가 양의 문이라고 할 때 새 언약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과하는 것만이 올바른 믿음의 방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은 여전히 다시 내가 율법대로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심판 받아야 하는 옛 방식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여전히 죄가 그대로 있는 방식’입니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양을 잡아 먹는 방식으로 그길로 따라가면 그 결과는 패망에 이르는 방식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시간에 자세하게 설교하겠습니다. (다른데 가서 사줄께, 계속 우는 아이)
이제 새 언약에 포함된 죄를 용서하는 과정이 11절부터 소개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입니다. 하나님과의 계약 그리고 깨져버린 계약의 결과는 죽음에 해당되는 피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선한’이라는 말씀은 즉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양들을 위하여’ 여기 위하여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문지기는 목자를 알기에 문을 열어줍니다.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 꼴을 먹고 살을 찌웁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이것이 삯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삯군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13절 결과적으로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리로 부터 지킵니다. 다윗이 목동이었고, 물 맺돌을 잘 던지는 것을 알고 계시죠. 본문에서 오히려 삯꾼으로 부터 지키는 것이 맞아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삯꾼과 비교되고 있습니다.(구약) 목자의 소임은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양을 위해 목숨까지 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지 맡아 키우는 동물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지 모릅니다. 최근 소개된 대만의 지진 현장에서 어린 아기들을 흔들리는 건물 속에서 자기의 몸으로 막는 간호사들의 영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 자기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려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당연함을 넘어 보편적인 생명을 존중하는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동물을 살리기 위해 위험에 뛰어 드는 장면도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보편성 넘어의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양을 위해 생명을 살리는 목자를 ‘선하다’라고 하는 비유를 통해 이러한 관계성이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을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15절에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말할 때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비유처럼 서로 아는 관계에서 친밀함은 ‘아버지’로 표현합니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다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좋다’, ‘선하다’는 것이죠. 상황이 그러니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양을 위하여’ 죽는 죽음은 ‘우리의 양 뿐만 아닙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포함합니다.(아멘) 그들 조차도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한 무리가’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파기자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복음이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전히 모르는 ‘죄 가운데’ 있었지만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다른 양들 즉 우리에 들지 않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흔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당사자야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고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그리고 앞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으심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은 죽으심으로 이루신 성취와 다시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보십시오.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17절 ‘다시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누군가에게 의해 빼았기는 죽음이 아니라 18절 ‘스스로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17절의 다시 얻기 위함은 본문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직역하면 ‘이유가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이유이다’는 아버지 하나님의 방법인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방법을 순종하고 받아들이시기 때문인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두 가지 방법으로 지키고 계신다 했습니다. 하나는 은혜(헤세드)이고 또 하나는 신실함(에메트) 즉 진리 입니다. 계약 파기에 따른 당연한 죽음이라는 심판을 ‘ 양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대신하여’ 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위하여, 대신하여’ 두 표현을 모두 사용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인간의 모습만 보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스스로’하실 수 있는 분,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미하는 것이죠. 한참 지났지만 기억해보면 5장 19절 이하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그러한 능력을 하나님의 아들로 연결해 아버지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 하심으로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씌우는 상황이 되었고 이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출교를 당하는 상황에서 안식일에 고친 맹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방식 즉 ‘문을 통하여’ ‘양의 문’을 통하지 않는 그 방식이 무엇인지를 비유에서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유대인들에게 폭탄을 던진것처럼 분쟁이 일어났고 그들은 귀신 들려 미쳤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눈에 보이는 증인 ‘눈 뜬 맹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21절 하반절에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는 말로써 맹인을 고친 사건과 믿음과의 관계를 예수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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