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으로 새롭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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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되는 날

Notes
Transcript

서론

아주 무더운 날, 산행을 해보셨나요?
한국에는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산들이 꽤 있습니다.
설악산, 관악산, 치악산, 월악산과 같이 주로 그 이름에 ‘악’ 자가 붙은 산들이 그런데요
저 사진은 설악산 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 설악산을 두 세번 정도 올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르는 동안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험했던 기억이 납니다.
산세도 산세 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 입니다.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는데, 얼마 안남았다는 정상은 한참을 올라가도 나오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럴때는 잠시 쉬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입니다.
바위 걸터 앉아서 산을 내려다 보면 오를땐 몰랐던 아름다운 경치도 눈에 들어오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 바람이 땀도 식혀 줍니다.
이럴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간식 입니다. 오이나 과일 같은 가볍고 수분이 풍부한 간식은 다시 산행을 할 의욕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영어로는 “Refreshment” 라고 하는데, 간단한 음료나 다과를 부르는 단어 입니다.
단어 그대로의 느낌으로는 고된 여정 에서 잠시 쉬며 리프레쉬 하게 해주는 음료나 간식이 될 것입니다.
이윽고 산 정상에 이르면, 내가 중간에 포기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반겨 줍니다.
산은 오르기 힘들기에 오르는 것이고 힘든 만큼 정상은 더 아름답습니다.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는 염분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파도 때문 입니다.
계속 해서 휘저어 주어 산소를 공급해주어야 녹조가 생기지 않고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바다로 유지 됩니다.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리프레쉬”는 꼭 필요한 활동 입니다.
과거에는 20대 초반 까지 몰아치며 공부를 해서 그걸로 평생을 먹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자고 일어나면 변화 하는 세상을 살고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리플레쉬 해야 합니다.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정진하고 중간 중간 잘 쉬어주고 리플레쉬 해주어야 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중간 중간 리프레쉬가 필요 합니다. 새로운 신 바람이 필요 합니다.
이것은 단지 쉬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도전이나 미뤄 왔던 일을 찾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는 것과
우리의 영을 소생시키는 영적인 갱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주를 영접하고 우리가 경험 하는 새롭게 되는 날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 입니다.
베드로는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걷어내야 할 것들과 해결해야 할 것들에 대해 기탄 없이 선포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인간의 육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닌 우리의 심령의 존귀함 으로 바라봐야 함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어지는 본문은 그렇다면, 걷지 못하던 그 남자가 겪은 그 놀라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질문 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성경적이고 영적인 설명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 입니다.
우리도 그 남자 처럼 획기적이고 드라마틱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바람이 인생에 신바람을 불어 넣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하면 평범하고 즐거울 것 없는 일상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는지 말씀 속에 발견하는 시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1. 부활의 리프레쉬(Refresh)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에 충만만 상태 였습니다.
십자가 앞에서의 비겁한 배신으로 부터 자유하여 이제 부활의 신앙으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리필되고 리프레쉬된 상태 였습니다.
사도행전의 공통된 구조는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
설교(기적과 표적에 대한 설명,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회심
성전 미문의 걷지 못하는 남자를 걷게 함
그가 걷게 된 의미 설명-설교
5000명 회심
부활의 주님을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들에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 남자를 걷게 한 것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이 부활하신 예수 이름의 권능이라고 전파하는 설교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과정 이었습니다.
부활을 전파하는 그 설교는 눈 앞에서 일어난 강력한 기적을 증거로 삼아 힘있게 전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은 성전의 외곽인 성전 미문에서 성전의 테두리인 솔로몬의 행각 또는 주각 으로 장면은 이동 됩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긴 복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전히 지성소의 외부로서 유대교의 제사와는 거리가 있는 곳입니다.
평소 이곳에서 소그룹의 모임이 많았었고 주님도 이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곤 했었습니다.
본문 2장의 여러 “이적과 표적”의 내용 중에 하나가 걷지 못하던 한 남자의 이야기 였다면,
오늘 3장은 그 이야기의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그 기적과 표적을 본 수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 였습니다.
사도행전 3:11 KRV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놀랄뿐 아니라, 미문에서 뛰어 나와 성전을 둘러 치고 있는 솔로몬의 행각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입니다.
어떤 주석에서는 이때 모인 큰 무리의 성격을 “구경꾼” 이라고 표현하는 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수 많은 이적과 표적은 이스라엘 온 나라를 들석이게 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더 이상의 역사는 없을 것이라고 믿던 사람들에게 또 한번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권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죽은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났는가 보다 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또 다른 선지자가 아니다”
나를 주목하지 말라!
사도행전 3:12 KRV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주 충격적인 증언을 합니다.
이 날때 부터 걷지 못하던 이가 걷게 되는 역사는 나 베드로가 아니라, 너희가 죽인 예수의 능력이다!!
너희가 죽인 이가 바로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의 아들이다!!
사도행전 3:13 KRV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이 말을 들은 군중 중에는 분명 “예수는 죽었다” 라고 외치는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내려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맞다 나사렛 예수는 죽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라고 선포 합니다.
사도행전 3:15 KRV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눈 앞에 보라! 그 예수의 능력이 나타났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는 그 믿음의 능력이 너희 눈 앞에 이 사람을 완전하게 낫게 했다!
내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 이 기적이 일어났다!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3:16 KRV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 어떤 새로운 선지자를 준 것도 아니고 오직 너희가 죽인 그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 하셨다는 증거가 바로 오늘 눈 앞에 나타났다는 강력한 메세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부활을 들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그저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제사하고 절기에 모이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 였습니다.
예배 같으면서도 명절 같기도 하고 제사 같으면서도 축제 같기도 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통념적으로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는 예수를 믿지 않았기때문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깨끗한 옷을 갈아 입고 남자들은 밤을 깍고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대문과 방의 문을 다 열어 놓고 조상 귀신들이 오시도록 하였습니다.
제사가 끝이 나면 대문 밖까지 나가서 배웅 하면서 제사는 끝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조상을 기리고 조상님들이 음식을 드시고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도 나이가 드시고 제사 횟수도 많이 줄고 여러 가지로 간소하게 되고 예전에 보였던 조상에 대한 믿음도 약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그냥 형식만 남고 선산에 묫자리 이장하는 일에 더 전념 하시는 아버지를 보곤 했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오래 되면 문화가 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기독교 신앙도 가풍이 되고
사순절, 부활절, 성탄절은 절기 축제나 명절이 되는 것일까요?
성전 미문 앞 그 남자의 기적과 부활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요?
그 남자를 일으켜 세울때, 베드로가 외친 말을 상시 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3:6 KRV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누구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였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했습니다.
베드로도 아니고 다른 선지자의 이름도 아닙니다. 너희가 죽인 그 이름,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이름의 능력이 지금 이 가망 없고 소망 없는 인생을 새롭게 하였다. 걸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인생이 되게 하였다.
오늘 이 남자를 걷게한 이유,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너희들도 이 남자 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신앙을 문화 처럼 가풍처럼 예배를 명절 처럼, 모임 처럼 여기던 너희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바람이다.
이제, 진정한 신앙의 “리프레쉬”로 인해 천국 소망하는 구원 받은 인생 살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이 걷지 못하던 남자를 들어 쓰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 기적과 표적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과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께 주시는 메세지 입니다.
미문 앞의 그 남자에게는 그날은 여느날과 다를 바 없는 구걸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능력이 기적적으로 나타날 복된 날이요 오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올 놀라운 날이었습니다. 항상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그의 부활의 능력을 전하기 위해 높은 영적 집중력으로 무장되어 있는 상태 였습니다.
그 농짙은 영적 방향성은 한 사람의 인생을 더 나아가 그날의 5000명의 인생을 송두리채 리프레쉬 하는데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새롭게 되는 방법

베드로는 이 삶을 리프레쉬 하는 방법을 제시 합니다.
사도행전 3:19 KRV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지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 입니다.
헬라어 단어로만 보면 ‘메타노여’ “마음을 고쳐먹다” 입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마음에서
누군가를 죽이라고 악다구니 치던 모습에서
형제여 어찌 할꼬?!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여 살려 주시옵소서! 로 마음을 고쳐 먹는 것을 말합니다.
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분이 외국 살때는 “나 잘해낼 수 있어” 하며 자신감을 갖고 살아서 몰랐는데,
한국에 올 일이 있어서 왔는데,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산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면서다니던 초등학교 옆을 걷는데, 담장에 핀 꽃이며 운동장 놀이터를 보는데 “잘 해낼 수 있어!” 하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 내리고 긴장이 풀리고 아늑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몰랐는데, 자기 어깨에 힘이 엄청 들어가 있었고 항상 긴장상태였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고 내 능력으로 다 헤쳐 갈때는 예민하고 긴장된 상태 입니다.
하지만 어느날 불꺼진 교회당에 와서 무릎을 꿇고 “주여 ~” 뱉으면 나도 몰래 눈물이 하염 없이 흐르고 한바탕 통성기도 하고 나면 그때 만큼 마음이 녹고 편안할 수 없는 경험을 해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같지만 사실 하나님이 보호 하시고 계셨구나 알게 되면
우리 마음이 정화 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잊었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영혼이 하나님에게 돌아왔으니, 이것도 일종의 회개 인것입니다.
재밌는 번역이 있는데, 개역한글판에서는 “유쾌하게 되는 날”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아낙식시스’ 회복하다 휴식하다 라는 뜻인데, 또다른 뜻은 “숨쉴 틈을 주다" 입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인데, “주 앞으로부터” 라고 하는 뜻은 바로 구원의 날을 의미 합니다.
구원의 날 회복되고 휴식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쉴 틈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등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중학생때 행복했니? 네.
중학생에게 묻습니다. 초등학교때 행복했니? 네.
그러면 대학생이 되면 지금 너희 고등학생때가 행복하다고 기억할까?
식견이 좁아 행복하게 느끼는 것일뿐,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지옥이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박찬호씨가 아주 힘들때, 친구의 위로의 말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야 친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 사업이 망해서 나쁜 마음 먹고 마포대교로 올라갔덴다.
다리 난간을 넘고 있는데, 갑자기 “내일 아침에 박찬호 경기 있는데” 하는 생각이 나더란다.
그래서 “죽더라도 박찬호 경기는 보고 죽자” 하고 생각을 했데,
그런데, 네가 경기를 죽을 쓰고 지더란다. 문득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4일 후에 다음 경기는 이기겠지?”
“에이, 저렇게 죽을 쓰고 4일 후에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에 생각을 고쳐 먹고 마포대교에 안갔단다.
그니까 너도 힘내라 친구야.
박찬호씨는 홈런 맞고 경기 지면 참 기분이 안좋겠지만 세상일이 알 수 없는게 그 실패하는 모습에 새 힘을 얻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마포대교 갔던 그 사람에게 박찬호가 숨쉴 틈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구세군 시드니 한인 교회는 규모나 출석 인원으로는 작은 교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규모에 비해 전반적으로 봉사자와 리더가 턱없이 부족한 구조 입니다.
사관 두명으로는 커버가 안되는 상황 입니다. 그래서 매일 허덕입니다.
그래도 저는 목회자 라고 해서 무턱대고 성도님들 교회 모든 사역에 순종하여 참여 하라는 말을 잘 못합니다.
이민 생활이 만만치 않고 아이들 뒤쳐지지 않게 키우는 일이 꽤나 버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 입니다.
바쁜 중에도 힘든 중에도 그저 자원하여서 헌신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뒤에서 기도 해드립니다.
동시에 헌신할 틈을 내지 못하는 성도님들 위해서도 동일하게 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전체 등록 교인이 주일 성수 하기를 위해 기도 합니다.
그 인생 가운데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새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피곤하지만 오늘 길이 번거롭지만 수요일 저녁 하루만 이라도
일주일의 중간시간을 예배와 경배로 올려드리는 신실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 합니다.
눈뜨면 유투브 열어서 아침의 첫시간 첫 10분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는 성도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숨 쉴틈이 되어 줄것이기 때문 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와 기도는 지옥 같은 세상을 살 힘을 주기 때문 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3:3 KRV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우리는 육안으로 세상을 보며, 사람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은 믿음에 맞서는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장자의 오상아 라는 말은 나를 장사지낸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 스스로를 장사 지내야 새롭고 높은 경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 KRV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과 그 중력에 끌려가는 것을 멈추고 메타노여 마음을 고쳐 먹고
막막하고 지옥 같은 일상의 틈바구니 가운데 예수로 숨쉴틈을 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새바람을 불어주시기를 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상중턱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2 KRV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지금도 저 보좌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며 성령을 통해 힘주시고 밀어주시고 일으켜세우시고 우리를 응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예배는 열심이 아니라, 오히려 숨구멍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 예배를 드려야 하고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주님, 저의 굳은 마음을 돌이키시고 새롭게 하소서.
힘든 세상에 숨쉴 틈으로 교회로 나아오게 하소서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게 하소서
봉사의 자리에 나아오게 하소서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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