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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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설교
제목 : 여호와를 아는 것
[호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인트로 :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대해서 나눈다.
인사) 반갑습니다. 성산 청년 여러분. 서로 앞 뒤로 이렇게 인사 합시다. 샬롬~ 샬롬~ 서로 평안의 인사를 함께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방금 인사한 것 같이 이 말씀을 통해 참된 평안을 누리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인트로) 오늘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말씀을 통해 볼 겁니다. 당연히 여호와는 무슨 뜻인지 아신다 생각하지만 혹시나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여호와라는 뜻은 스스로 있는자. (I am who I am)을 뜻하며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교회에서 주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이런 표현들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안다 라는 것을 좀 나누고 싶은데요. 여러분 아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알고 있다! 라고 한다면 바로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내가 배운 것, 혹은 기억나서 말할 수 있는 것? 안다라는 것을 설명하려니까 조금 어렵네요 ㅎㅎ
"안다"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니까. 1) 교육이나 경험, 사고 행위를 통하여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2)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
이렇게 두 가지의 뜻으로 설명됩니다. 굉장히 학문적인 설명입니다 ㅎㅎ 우리는 일상적으로 안다라는 표현을 할때 내가 아는 "지식"을 이야기 합니다. 대상이 사물이 되었든 학문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말이죠.
그리고 그 안다는 개념은 정도의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여기 계신 휘은 회장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것과 제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 박효신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다릅니다. 왜죠? 박효신과는 저와 대화한 적도 없고 같이 뭘 한 적이 없어요 그저 음악만 들었을 뿐, 이에 반해 휘은 회장님과 저는 서로 전화번호도 알고 , 같이 카톡도하고, 커피도 마셔봤고 뭐 다해보면서 소통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친하다 생각합니다 ㅎㅎ 박효신을 아는 것은 일방적인 앎이었고, 휘은 회장님을 아는 것은 쌍방적인 앎 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안다라는 개념을 관계안에서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
오늘 본문인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결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부터보면, 내가(하나님) 네게(하나님 백성)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하나님백성)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하나님 백성) 여호와를 알리라.
19-20절 안에서 계속 이야기되는 것이 하나님으로 지칭되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지칭되는 "네게" 장가든다는 내용이 반복해서 3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게 될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하는 결론은 여호와를 아는 것은 결혼관계안에서 보아야 한다 입니다.
여러분 결혼 하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저는 결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랑, 신부, 결혼식 등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신혼여행, 결혼 생활등이 떠오릅니다.
결혼은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가 합니다. 특별히 서로를 끝까지 사랑하기에, 평생을 함께 하려고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자리가 결혼식 입니다.
요즘은 스몰 웨딩 혹은 더 나아가 결혼식 비용을 기부하고 도장만 찍는 부부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부는 아니고 주로 연예인들이 많이 하는 듯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을 비추합니다.
결혼식이 물론 비용도 많이 들고, 그 돈을 아껴서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정말 좋은 취지로 보이지만, 결혼식은 정말 중요합니다.
결혼식이 왜 중요하냐면? 결혼식은 "약속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은 자신들의 가족부터 친구 지인들을 모두 불러모읍니다. 그들 앞에서 신랑과 신부는 약속합니다. "나는 평생 이 한 사람만을 나의 여자로, 남자로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많은 사람 앞에서 약속 합니다.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겠다는 약속한 것을 보고, 보증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한다면, 부부간의 관계가 공식화 되었기에 비교적 견고한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다투어도, 상대가 미워도 한 번 더 고민하게되고, 다른 이성이 끌려도, 보는 사람들이 있고,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비교적 바람피는 것이 어렵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결혼식 했지만, 바람피거나,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혼식 자체가 절대적으로 이혼을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결혼식을 함으로 약속을 기억할 때 많은 유혹에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결혼과 관련있다고 했습니다. 또 처음에는 누군가를 아는 것은 관계와 관련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결혼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인 우리는 신랑인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라는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다시 한번요, 교회인 우리는 신랑인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라는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호세아서의 핵심 맥락도 하나님과 혼인한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바람을 핍니다. 어떻게요?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신들 도 함께 사랑하면서, 하나님과 다른 신을 함께 더불어 사랑하면서 바람을 핍니다.
우리는 두 개의 사랑을 인정합니까? 우리는 이 것을 불의하다고 생각하고, 분개합니다. 요즘 사회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지만, 두 개의 사랑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외도의 끝판왕 드라마로 알려져 있는 "부부의 세계"를 다들 아시나요? 이 드라마 극중에서 외도를 한 남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랑에 빠진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대사를 합니다. 이는 시청자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명장면으로 손꼽혔습니다.
이렇게 외도는 우리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외도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외도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일반적인 외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혼입니다. 현대시대는 부부간의 관계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간음하지만 그런 이스라엘을 사랑하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과 이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다시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세아서를 읽어보시면 끊임없이, 수도 없이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떠나서 회개하지 않고, 우상숭베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심판이 그들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정 살리려는 것으로, 그들을 돌이키려는 것으로 사용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 여호와의 언약에 따른 신실함
하나님은 자신을 떠나는, 마치 외도를 하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실 때 약속에 따라 신실하게 사랑하십니다. 호세아서 2장 19-20절과 관련된 성경으로 에스겔 16장을보면, 정말 좋습니다.
이스라엘은 음란하게 계속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베를 행합니다.
[겔16:15-17]
15.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16네가 네 의복을 가지고 너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17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행동에 벌을 주십니다.
[겔16:43] 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겔16: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우상숭베를 만연하게 하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약속을 하셨기에 그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돌려 말하면, 신랑이 신부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 신랑이 신부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신부가 모자라니 신랑이 상대방의 조건을 보고 그 약속을 지키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준비시킨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결혼은 남녀가 각각 자기의 여건에 맞게 결혼을 준비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집을 해오면, 여자는 혼수를 해오는 것이 이전세대 결혼의 관례였습니다. 지금은 이런 관례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어느정도는 통용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느냐가 결혼을 결정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의대를 나온 엘리트 남자와, 주어진 재산이 많은 여자의 결혼, 젊고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과 돈이 많은 남성의 결혼, 현대에는 각자 저마다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모든 결혼을 이렇게 세속적으로 금전적으로만 볼 수 없지만,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신만의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상대방을 향해서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상대방을 회복시키기 위해 결혼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금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을 본다면, 우리의 신랑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조건을 넘어서 상대방의 어떠함에 따라, 혹은 정해놓은 기준이 충족되었기에 사랑하시는 분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회복시키시고, 신랑의 온전한 신부로서 준비시키시고 만들어 가시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토대로 사랑하시지, 상대방의 행동을 토대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 그럼 우리는?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이러한 여호와의 신실하게 대해주신 것에 짝을 이루어 우리도 여호와께 신실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신실하게 대해주신것에 짝을 이루어 우리도 여호와께 신실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처럼 "내가 너에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우리는 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때 그저 성경적인 지식을 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혹은 오래 교회를 다니면서 배운 것들을 통해서 여호와를 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달달달 성경말씀을 많이 외우고 성경의 배경 역사를 잘 아는 것이 여호와를 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바라본 본문을 통해서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신실하신 것에 대해 우리도 신실하게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 자체만으로 여호와를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그 지식을 통해서 여호와의 신실하신 언약에 따라 사는 것이 우리가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죠.
그냥 머리로만 알고, 믿음대로 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여호와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냥 교회 오래 다녀서 교회에 대한 지식 늘어나고, 설교를 통해서 말씀에 대한 지식도 늘어났는데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삶에서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그 것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종교적 만족을 위한 지식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도 아니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도 아닌 것입니다.
"삶이있는 신앙" 우리 교회의 표어입니다. 이 표어는 여호와를 안다는 것을 정말 잘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살아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요일 마다 말씀을 듣게 되는데 이 듣는 말씀으로 세상으로 삶으로 돌아가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이 이런 실재적인 것이 여호와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지켜야 한다. 이런 말들이 여러분이 듣기에 따분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하는데,, 쉽지않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사는 것, 말씀을 지키는 것은 당시에는 정말 어렵습니다, 지금 내 눈으로 보기에는 나에게 좋은 것이 없고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침해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어린아이를 돌볼 때 위험한 길을 못가게 하는 것, 전기 플러그에 젓가락 같은 쇠붙이를 넣지 못하게 하는 것, 외출하고 손 발을 씻게 하는 것은 아이들의 자유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런 위험한 것들로부터 아이를 진정 자유롭게 해주는 부모의 지혜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신 분께서 우리게 말씀을 주시고, 이 말씀을 지켜 행하라라고 하셨는데, 이런 말씀들이 나를 망치고, 나의 자유를 빼앗고, 부당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시겠습니까? 아이의 부모처럼 우리를 진정으로 보호하시고,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에 참여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따라 살기를 소망하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며, 삶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청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와를 아는 것에 대해 보았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관계와 관련있고 결혼과 관련있음을 나누웠습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게 참여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게 참여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말헸습니다.
여기서 이제 좀 나아가길 원합니다. 여러분 그럼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면서 살아가고 계신지 질문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여호와를 진정 아십니까?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으리라 생각 됩니다. 우리는 말씀에 참여하는 삶을 살기보다,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간음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의지 합니다.
다른 것은 돈, 명예 혹은 영향력, 인간관계를 더욱 의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다. 자기 만족을 더 우선순위로 여깁니다. 오늘 말씀에서 말해드렸듯 여호와께서 우리를 향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한 반응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럼 반대로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호와를 모르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간음의 핵심입니다. 돈, 명예, 영향력 그것이 자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가 만족하는 돈, 명예, 영향력이 우상숭베라는 것이죠.
나의 만족, 나의 결단, 나의 의지, 나의 생각이 우리의 우상의 핵심이 됩니다... 절망적이죠...
하나님은 21세기 우리를 보면서 심판하시길 원하실 겁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신뢰하는 우상숭베를 만연히 하고 있으니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고 주로 말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의미를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까 위에서 설명했듯 하나님은 신부인 이스라엘을 신부로 준비하게 하시고, 결국 회복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서 빠뜨린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삯은 사망, 죄의 결과는 심판 이란 것을요.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사랑하니까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조건을 채우시지 않으시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 정의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다시요. 하나님이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면, 그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지키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거짓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공의를 정의의 하나님 이십니다. 조건을 성취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무조건 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기시기 위해서 희생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신 분께서 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마땅할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권한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을 모두 내어주시고, 죄라고는 모르시던 분이 죄의 삯인, 죄의결과인 십자가의 저주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십가가를 깊이 감사해야합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귀한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말씀에 참여하고, 말씀을 지키는 것에 분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신부로써 우리는 매순간 신실하지 못하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매순간 신실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삶이 있는 신앙, 기도하는 청년, 말씀에 참여하는 성산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