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내리는 단비를 맞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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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역사 가운데 20세기 초기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이 당시 스페인은 정치 경제에 군부 독재와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시기에 스페인의 문화와 예술은 오히려 붐이 일었는데 피카소와 같은 세계적인 화가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가 바로 이때다.
당시 스페인의 화가 중에 피카소 말고도 초현실의 세계를 그린 사람이 있다. 살바드로 달리라는 사람이다. 그는 초현실의 세계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표현하려는 시도를 많이했다. 그의 작품중에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기억의 지속’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림에는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와 공간을 상징하는 바위가 있다.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는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반면 공간을 상징하는 바위는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굳어진 채로 놓여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대비하여 현실과 꿈의 경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시편은 찬송시다. 찬송시인 시편은 여러 장르로 되어있다. 여기에는 찬양, 지혜, 감사와 같은 긍정적이고 밝은 노래들이 있다. 그런데 시편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장르는 사실 슬픔을 노래하는 ‘애가’다. 시편은 우리 삶의 기쁨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아픔을 노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을 통해서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났다. 신학교때 교회사 교수님은 영적인 회복이 필요할 때마다 시편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메시지 성경으로 잘 알려진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목회 실패 후 시편 묵상을 통해 기독교 영성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시편 126편은 한 개인의 시편이 아닌 공동체의 고백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던 노래다. 이 시편은 크게 세 부분을 되어 있는데 1절부터 3절 까지는 과거를 회상하면 부르는 기쁨의 노래, 4절에는 현실의 아픔에 대한 탄식 그리고 5절과 6절은 미래의 희망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다.
기쁨의 노래에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하셨던 큰 일에 대하여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셨던 큰 일은 다른 나라들이 볼 수 있을만큼 큰 일이었다. 주석가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70년만에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한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본 시편의 저자가 에스라 일것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본문이 그것을 정확하게 명시하지는 않기 때문에 저자와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인생 가운데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과거의 영광과 기쁨과는 다른것 같다. 4절 말씀에서 기쁨의 노래는 순식간에 탄식으로 변한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간절한 탄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남방 시내는 네게브 땅에 흐르는 물을 말하는데 그곳은 황량한 광야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만든 땅이바로 그 곳이다. 그런데 네게브 사막의 문제는 단순히 물이 없다는데 있지 않다. 물이 가장 필요한 때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데 있다. 네게브 지역에는 식물이 자라야 하는 여름에 비가오지 않고 겨울에 비가 내린다.
인생에 광야를 경험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지치게 만드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다. 인생에 겨울이 찾아오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내가 뭔가 잘못해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하지만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면 마치 공동체 안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 안에는 늘 종교성과 세속성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종교적인 사람은 대체로 삶의 어두운 면을 부정하려고 애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사업이 망했든지 혹은 질병에 걸린다든지 아니면 관계 속에서 갈등이나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비는 만큼 복을 받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없이 표현한다. 이들에게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없다. 예의도 없다. 동방예의지국 이라는 것은 옛말이다. 동서양 문화가 짬뽕이 되어 비교적 자유분방하다고 하는 서양 사람들에게도 있는 에티켓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래서 일단 내 마음이 상처를 받았으면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도 마치 남인 것처럼 치부를 드러내고 뒷말을 한다. 이것이 세속적인 사람의 특징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삶의 겨울이 찾아올 때,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화살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들은 아픔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 토로한다.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겸손하게 기도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겨울이 찾아올 때, 자신을 비난하거나 혹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시간으로 헛되게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사막에 비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탄식한다.
본 시편은 기쁨의 노래에서 시작하여 슬픔의 탄식으로 그 노래의 톤을 바꾼다. 그러나 공동체의 노래는 탄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탄식에서 소망을 노래한다.
시편의 최고 번역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꿈인가 생시인가 했지.
붙잡혀 갔던 이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시온으로 데려오셨을 때,
우리, 웃음을 터뜨렸네.
노래를 불렀네.
너무 좋아 믿을 수 없어 했지.
우리는 뭇 민족들의 화젯거리였네.
“저들의 하나님, 참으로 놀랍군!”
그렇고 말고, 우리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
우리는 그분의 행복한 백성
하나님, 다시금 그렇게 해주소서!
가뭄에 찌든 우리 삶에 단비를 내려 주소서.
절망 가운데 곡식을 심은 이들,
환호성을 올리며 추수하게 하소서.
무거운 마음을 지고 떠났던 이들,
한 아름 복을 안고 웃으며 돌아오게 하소서.
공동체는 남방 시내들 같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소망을 노래한다.
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본 시편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감동은 겨울에 사막에 비가 내린다는 사실이다. 식물이 자라지 않는 그 시기에 하나님은 식물을 자라게 하는 비를 내리신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눈물의 씨를 뿌리는 시기는 여름이 아닌 겨울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자란다. 무럭무럭 자란다. 더 튼튼하게 강하게 자라간다. 거센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자라간다. 그래서 실패도 실패로 여겨지지 않고 아픔도 아픔으로 여겨지지 않는 소망의 사람으로 변해간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는 여름과 겨울, 추위와 더위, 낮과 밤 그리고 심음과 거둠이 있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통해 창조의 질서를 계속해서 유지해 가신다. 겨울이라도 창조의 질서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생에 겨울이 있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 겨울에도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비를 내리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지만 그대로 두시지 않는다. 자라게 하시고 주님을 더욱 닮아가게 하신다. 그래서 겨울이 있는 것이다.
림버그(Limburg)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회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미래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바라는 사이의 공간에서 진행됩니다”
오늘 내 삶에 겨울이 찾아왔다면 눈물로 씨를 뿌리라. 심음의 시기가 지나면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이 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