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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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의롭게 되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들어가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여 주셔서 함께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 드리며 나아가는 이 시간 가운데서 주님만 높여드릴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영광만이 임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내 생각, 문제, 예배와 주님을 바라보는 데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내려놓게 하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온전히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모하며 갈급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께서 이끄실 것을 의지하고 기대하며 나아갑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시간, 경험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들어가며

(1) 인사
오늘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이 저녁, 주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리는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케 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늦은 저녁이라 피곤해서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 내일 대부분 일을 쉬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며 나아간 이 자리 가운데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내 자신을 격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왔다.” 왜 스스로 격려하자고 했냐면, 저처럼 숫기가 없어서 옆에 분들과 인사하자고 하면 마음이 어려운 분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스스로 격려하자고 했습니다. 어쨌든 정말 잘 오셨습니다. 오늘 예배 드리는 이 자리, 기도 하는 이 자리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과, 깨닫게 하심을 사모하고 경험하는 오늘 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죽음과 부활
벌써 4월도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도 안 된 3월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과 부활절이 있었습니다. 그 전부터 사순절 기간을 시작해서 이 땅에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가운데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며 슬픔과 기쁨, 감격과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 너무나 중요한 시간인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날만 기념한다는 것입니다. 방금까지 말씀 드린 예수님의 죽음, 그때만 슬퍼합니다. 그때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날만 기뻐합니다.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따른 슬픔,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기쁨이 식어버린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완전한 실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념하는 날은 연례행사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곧,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늘 마주하고 있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제목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매일의 삶에서 죽음이 있어야 하고, 매일의 삶에서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고난주간에만 죽고, 부활절에만 부활하는 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이 고백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죽음과 부활, 두 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이유로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된 것일까요?

본론

(1) 본문의 내용
오늘 함께 보았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 가지 심각해 보이는 일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도된 그들인데 무슨 연유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한 걸까요?
오늘 본문의 12절을 보니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식사 예법이 있었는데, 그것에 비추어 볼 때 지금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는 모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릇된 선민의식이 있죠.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이방인들은 더럽고 악한 자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뿌리 깊이 잡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방금 보았듯이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를 하는 것도 문제였는데, 유대인이 이방인을 만나는 것 또한 문제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28절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그래서 그때부터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거리낌없이 만났고, 식사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방금 보았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도 속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베드로는 누군가를 보고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헐레벌떡 도망갑니다. 누구를 보았냐면 야고보가 보낸 할례자들, 곧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왜 이 유대인들을 보고 베드로는 도망을 갔냐?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사도행전 말씀에서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로 “아무도 속되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았고, 그렇게 따랐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뿌리 깊이 남은 유대인들의 그릇된 관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겉으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상관없이 여기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마음 속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스스로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롭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처음 보았던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이 바로 이러한 이유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14절에서도 나오지만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들며 뒤이어 계속해서 의로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과 같은 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함이다.” 이것이 오늘 보았던 본문의 내용입니다.
(2) 율법으로 사는 삶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여다 보면 두 모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에 메여 사는 모습,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습, 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율법에 메여 사는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보았던 베드로의 모습에서는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에 남은 율법에 메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가 속되지 않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 했습니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이방인들을 대하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여전히 율법에 메여서 불편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보면 똑바로 걷지 않았다는 의미가 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똑바로 걷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에 메여 있는 모습들, 그러면 과거 구약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을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할례자들도 나오고, 율법도 나오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구별된 자로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써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나오고 있지만 그 의미가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그에 따른 행위를 따라야 의로운 자로 여겼습니다. 또 그들은 선민의식, 민족주의와 같은 잘못된 길로 어긋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메이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율법과 같은 것이 무거운 멍에로 다가오게 되는 참으로 우매하고 안타까운 일들을 야기시켰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떠한 행위에 대해 얽메여서 그것이 본질보다 더 앞서게 됨으로 하여금 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정죄의 잣대가 되기도 하고, 본질에서 벗어난 꼭 지켜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곧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써 본질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 엉뚱한 것에 메여 사는 모습이 야기되어집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행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본질에 벗어난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제자훈련과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성경통독을 일 년에 몇 번 하는 것,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전도를 몇 명 한 것, 이런 것으로 신앙이 훌륭하다,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물론 경건의 행위라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로써 의롭냐, 의롭지 못하냐를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이 큰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모습도 그러한 모습입니다. 의로움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오는 것인데,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제는 정죄함이 없는데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행위에 얽매여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겉의 모습들, 또 율법과 같이 지키는 어떠한 행위들로 하여금 “의롭다, 의롭지 않다.”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에서도 보았지만 유대인들은 이러한 그릇된 생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분별하는 율법이 그들에게는 멍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묶여서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는 행위에만 급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도 똑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아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을 지켜야 하는데 엉뚱한 것을 지키고자 하고 있고, 엉뚱한 것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보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써 똑바로 걷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방금 보았던 16절 말씀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여길 육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계속해서 말하는데, 만약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왜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여금 율법의 완성이 되셨는데, 여전히 그 율법을 갖고 늘어지고 있다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겠습니까?
말씀을 처음 시작할 때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말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때만 그것을 기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멍에와 같은 율법, 그것에 얽메이는 모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종합해 보았을 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집착을 하는 모습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매일의 삶에서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곧,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20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말합니다. 그 말은 곧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 제목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백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 말씀 제목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바울의 고백,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만이 의롭게 사는 길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고, 바라보아야할 본질 중에 본질입니다.
(3-1)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며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흔히들 생각하기로 흔히 포기하듯 말하는 것처럼 ‘내가 죽어야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포기하는 것, 혹은 내가 내려놓고 인심을 쓰는 것과 같은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그것에 대해 히브리서 12장 1절과 2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주라고 자주 표현을 합니다. 그 경주 가운데서 예수를 바라보라 말합니다. 바라보아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2절 말씀과 같이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했다.”라는 모습입니다. 곧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부인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어떠한 것을 자포자기하듯이 ‘내가 죽어야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나 또한 나의 살아있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매일의 삶에서 십자가에서 죽는 삶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이와 같이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다른 것이 있었더라면, 그것이 컸더라면 죽음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을 살아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담대하게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3-2)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부활의 삶
여기까지 보았을 때, 이렇게만 말씀을 드리면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라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나를 철저히 부인해야 하는 것 같기에 또 그것에 얽메이는 것 같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목도 그러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이 십자가의 죽음만을 바라보고 절망으로 그친 것처럼 그 절망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부활의 삶, 기쁨의 삶이 분명하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서 6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의 몸을 죄에게 내주지 말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이라는 것을 보았을 때 기쁨이 넘치는 것 같고, 이제는 죽음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부활의 삶은 역설적일 수 있게도 여전히 주님께 나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우리 모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원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여금, 주님을 믿는 자들은 구원 받은 주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사망에 있었던 죄인에서 천국백성이라는 생명의 부활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자녀, 구원 받은 백성들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왕되신 주님께 내 삶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방금 보았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늘 바라보고 기억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 율법과 같은 어떠한 행위에만 얽메여 본질을 놓치는 삶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삶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매일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 고린도후서 4장 10절, 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은 결코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말 생명이 끝난 죽음이 절대로 아닙니다. 방금 보았던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세상 어느 것도 줄 수 없고,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은혜가 분명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의 삶이 결코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슬픔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부활의 삶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분명하게 결단하고 선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 또 종교적 행위에 중독되어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벗어나서 본질을 바라보고 정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길을 바라보며 결단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시간,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결단하고 선포할 때, 우리의 삶에서 분명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사모하며 결단하며 나아가는 오늘 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배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어 주님께 찬양 드리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붙잡고 결단하며 담대히 순종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상을 살아갈 때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일들이 많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겨주셨는데 의로운 자로 살아가지 못하였음을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는 주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신 자와 같이 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렇게 살기 위해 나의 모습을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기를 다시금 결단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살아있고, 내 마음 대로 사는 모습을 내려놓기를 결단합니다. 주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사시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 고백이 이 시간으로 그치지 않게 하시고, 매일의 삶에서 이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그렇게 결단하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하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셔서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마음 따라 나아가는 귀한 기도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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