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함께 하셔요~
성령님
함께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임하여 성도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구원을 완성시킨다(눅 11:13; 요일 4:13). → ‘삼위일체’를 보라.
•인격체로서의 성령 -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요 14:17),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시며(요 14:26), 증거하시며(요 15:26), 죄를 깨닫게 하시며(요 16:8), 인도하시며 말씀하시며 알리신다(요 16:13, 15). 그리고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성령으로 말하게 하시며(행 1:16; 벧후 1:21), 사역자를 부르시며(행 13:2), 사역자들과 말씀하시며(행 8:29), 일꾼을 보내시며(행 13:4), 복음 사역의 방향을 정해주시며(행 16:6–7), 중재하신다(롬 8:26). 또한 성령은 의지(고전 12:11), 마음(롬 8:27), 생각, 지식, 말(고전 2:10–13), 사랑(롬 15:30) 등 인격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거짓말이나 시험하는 행위(행 5:3–4, 9), 거스리는 행동(행 7:51), 슬프게 하는 것(엡 4:30), 욕되게 하는 것(히 10:29), 훼방하는 것(마 12:31)은 모두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악에 해당한다.
•역사(歷史) 가운데 역사(役事)하시는 성령 - 예수께서는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을 말씀하셨는데(요 14:16–17), 사도들과 함께 임재하실 보혜사 성령은 성도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하셨다(요 16:7).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다(롬 8:9–12). 하나님은 본질상 영이시며(요 4:24), 사람들 안에 거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일하신다(요 14:26; 16:7). 신약에 와서 이런 하나님의 계시의 새로운 양상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다(행 2장).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께서 탄생하신 성육신 사건만큼이나 놀랍고 새로운 사건이다.
오순절 때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9–11). 이 소동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세계 각처의 디아스포라 방문객들을 놀라게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이 사건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했다(욜 2:28–32). 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 베드로의 강한 메시지(설교)로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위대한 구원 역사가 일어나 제자들의 수는 날로 늘어났다. 점점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무리와 모임들이 많아졌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된 이면에는 성령의 강권적이고 충만한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가 강하면 강할수록 유대인들의 적대 행위도 집요했다(행 3–4장). 그리고 이 위기가 지나면 다시금 교회는 부흥 성장하기를 반복했다(행 4:31). 성령의 역사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가정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로 이어졌다. 이들은 심지어 방언의 은사까지 받았다(행 10:44–48). 이런 성령의 역사는 후에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도중 아볼로를 만나 구원의 복음을 가르칠 때도 똑같이 일어났다(행 19:1–7).
이상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신약성경은 믿는 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들로 온통 가득 차 있다(롬 8:1–27; 고전 12–14장).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성령의 충만을 받고’(엡 5:18),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가르쳤다(엡 5:18). 여기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다(롬 8:9–10).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성령이 충만하여) 큰 능력을 발휘하는 등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들을 감당한 믿음의 용사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오늘날도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과 믿음의 용사들을 통해 세계 도처에서 쉼 없이 진행된다. → 부록 ‘8. 삼위 하나님의 거룩한 명칭들’을 보라.
•성령 충만을 받은 자들 -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성령이 충만하여) 큰 능력을 발휘하는 등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들을 감당한 믿음의 용사들이 많이 나타난다. ① 하나님의 신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의 꿈을 해몽한 요셉(창 41:38–39) ② 지혜와 총명으로 성막을 건축한 브살렐(출 31:2–3; 35:31) ③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한 모세(민 11:17, 25) ④ 이스라엘을 축복한 술사 발람(민 24:1–2) ⑤ 모세의 후계자로 선임된 여호수아(민 27:18) ⑥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 군대를 격파한 사사 옷니엘(삿 3:9–10) ⑦ 300명 용사로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한 사사 기드온(삿 6:34) ⑧ 암몬 자손들을 격파한 사사 입다(삿 11:29) ⑨ 단숨에 블레셋 군사들을 무찌른 삼손(삿 14:6, 19; 15:14) ⑩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 주민을 구원한 사울(삼상 11:6) ⑪ 사무엘의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다윗(삼상 16:13) ⑫ 백성의 잘못을 꾸짖다 요아스 왕에 의해 성전에서 순교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 24:20) ⑬ 하나님의 신을 통해 장래 일을 계시받은 에스겔 선지자(겔 2:2; 3:24) ⑭ 하나님의 신의 능력을 힘입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단 4:8–9; 5:11–14) ⑮ 성령으로 지혜가 충만하여 교회 일꾼으로 선택된 일곱 집사들(행 6:3) ⑯ 순교하기 직전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서신 주님을 목도한 집사 스데반(행 7:55) ⑰ 성령에 이끌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집사 빌립(행 8:29) ⑱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중 성령의 충만을 받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들(행 10:45) ⑲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여 훗날 주님의 선구자 사역을 감당한 세례 요한(눅 1:15) ⑳ 성령이 충만하여 모태에 있던 아기 예수를 찬양한 엘리사벳(눅 1:41) ㉑ 성령의 충만을 입어 하나님을 찬양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눅 1:67) ㉒ 성령의 능력으로 광야에서 사십 일 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예수(눅 4:1) ㉓ 오순절에 간절히 기도하던 중 성령의 충만을 입게 된 초대교회 성도들(행 2:1–4) ㉔ 충만한 성령과 믿음으로 안디옥 교회를 다스린 바나바(행 11:24) ㉕ 1차 선교여행 도중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을 훼방하는 박수를 소경 되게 한 사도 바울(행 13:9) ㉖ 성령의 감동으로 주일 아침에 환상 가운데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계 1:10) 등이 있다.
14:15–24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이 담론의 첫 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는 것은 최후의 사별(死別)이 아니라 장차 그들이 자기와 함께 있도록 ‘거할 처소’ 를 예비하는 필요 조건이라고 확신시킴으로써 그들을 위로하셨다. 그런데 이 주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중간에 개입되었는데, 하나는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길’ 과 목적지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고, 또 하나는 (빌립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아버지를 아는 것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명을 한 다음 예수님은 중심 주제, 곧 슬픔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장래의 ‘거할 처소’ 를 약속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는 일을 재개하신다.
이 약속은 삼중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 첫째,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으로서, 성령은 아버지의 선물이며 현재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으나 장차 제자들 안에 거할 분이다(15–17절). 둘째, 아버지 안에 거하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약속으로서, 장차 제자들이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이 제자들 안에 거할 것이다(18–20절). 셋째, 아버지와 예수님 둘 다 제자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23절)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왕상 8:27). 솔로몬 왕이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봉헌할 때 외쳤던 기도가 구약 성경에서 하나의 약속-하나님이 진정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으로 거듭해서 응답받았다. 가장 최근의 선지자 중 하나인 스가랴는 기쁨의 찬가로 그 날을 환영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며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슥 2:10–11).
“그 날에.” 선지자들이 외친 이 낯익은 말은 성경에 익숙한 자에게 ‘잠시 후에’ 라는 문구에 상응하는 표현이었다(예를 들면, 사 10:27; 26:20; 렘 51:33). 예수님은 이 두 표현을 모두 사용하시지만, 그것들이 사용된 방식은 또 다른 해명을 필요로 한다. 유다의 의문은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라 (불트만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에게 매우 타당한 것이다. ‘그 날’ 곧 ‘주의 날’ 은 은밀한 어떤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 날은 숨겨진 하나님의 권능이 밝히 나타나고, 하나님이 참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심을 열방이 인정하게 될 날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임재와 내주를 ‘세상’ 이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이것은-다시 한 번-누가의 전통에 의하면 사도행전 1:6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물었을 때 제기된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그 날에’ 가 하나님의 대의명분이 승리하는 것이 밝히 드러나는 날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사실상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 때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묘사하는 말(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나오는)을 사용하신다(출 33:13, 18). 이와 동일한 단어가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이 본문의 복합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주의 날이 더이상 장래에 전개될 어떤 것이 아니다. 주의 날은 사실상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대의명분의 승리를 밝히 나타내는 날을 지칭한다. 이 같은 현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증인’ 으로 선택하신 자들에게 한정된다(행 10:41; 참고. 고전 1:24). 그들에게만 이 ‘공개된 비밀’, 곧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비밀이 허락되었으며, 따라서 현재 그들은 선지자들이 내다보았던 ‘마지막 날’ 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단지 한 ‘날’ 로 보였던 주의 날이 이제 하루를 훨씬 넘는 새로운 시대-옛 시대에 이어서 도래하는-임이 판명되었다. 평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맥을 보면 그저 능선들이 겹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가 보면 산과 골짜기, 숲과 호수, 강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오랫동안 갈망했던 주의 날이 도래할 때, 그 비밀을 받은 자들은 그 날이 하루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하나님이 세상에 숨겨진 모습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임을 알게 된다. 그 날이 바로 ‘주의 날’ 이며, 우리는 그 새 시대를 여는 승리의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면서 매주 그 날을 경축하고 있다.
이 같은 내주는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 본문과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그것을 사랑과 순종의 견지에서 규정하고 있다. 이 두 단어 모두 ‘거함’ 의 방식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그 둘의 상호 관계는 이어지는 여러 구절에서 누적적인 효과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14:15, 21, 23, 24, 31; 15:10, 12, 14, 17). 순종과는 별개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순전히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해석-일종의 부도덕한 감정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랑과는 별개로 순종을 논하다 보면 노예적인 의식 구조-우리가 곧 경고받게 되는(15:15; 참고. 롬 8:15)-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적 관행이 이에 오염되었다. 오늘날의 기독교 사상은 순종의 범주를 피한 채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환상에 빠지는 길이다. 순종은 사랑의 시험물이고, 사랑은 순종의 내용이다.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이 두 가지 면 모두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안내자요 중보자시다(15:9–10). (사랑과 순종의 상호 관계는 요한일서에 충분히 논의되어 있다. 예를 들면, 요일 2:3–5; 3:23–24; 5:2–4.)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는 것은 “또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요 아버지의 선물인 분이 오심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이다. 요한이 이해한 바로, 이 선물은 부활의 날에 선택된 증인들에게 주어진다(20:19–2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 과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것’ 을 주의 깊게 기록하고 있는데(21:14) 그것이 마지막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 다른 ‘보혜사’ 는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낯설지 않을 터인데, 그 이유는 그분이 현재 그들과 ‘함께’ 거하고 있으며 장차 그들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보혜사’ 는 과연 누구인가?
‘파라클레토스’ (paraklētos)라는 헬라어 단어는 요한복음의 이 부분에만 나오고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는-변호인이란 고전적인 의미로 예수님을 지칭하는 요한일서 2:1을 제외하고는-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동사(parakaleō)와 동명사(paraklēsis)는 신약 성경 여기저기에 약 120번이나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요한의 저술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에 상응하는 단어로는 부름, 탄원, 간청, 위로, 위안, 권면 등이 있다. 이런 단어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바로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 란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이 모든 부름, 위로, 권면, 간청, 위안의 근원이 인간적인 성취가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예수님의 중보로 인해 오게 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본래의 ‘파라클레토스’ 로서,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중보하는 분(요일 2:1)이며 번민에 빠진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분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는 말로 시작되는 이 긴 담론은 기독교적 ‘파라클레토스’ 의 완전한 모델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영원히 떠나지 않을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 가 있다. 그분은 “진리의 영” 이다. 그분의 ‘파라클레시스’, 곧 그분의 위로와 권면은 진리의 전달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이시므로 그 영의 일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해석하는 것(14:26; 16:14)과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로 세상에 도전하는 것이다(15:18–26; 16:7–11). 이 기독교적 ‘파라클레시스’ 는 교회를 ‘위로하고’ 세상을 ‘책망하기’ 위한 진리의 전달이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 는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뚜렷하게 구별시켜 주는 하나의 인격적인 임재다. 세상 도처에는 많은 ‘영’ 이 있으며, ‘영적인’ 존재들은 진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대항할 수도 있다(요일 4:1–3). 이 같은 사실이 예수님의 수난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영은 진리를 깨달을 능력이 없다. 만약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들에게 숨겨진 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에게는 알려지게 되었다(고전 2:8–10).
이 성령이 예수님의 위격-성령이 ‘머물러’ 계시는(1:33)-안에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쉴” (20:22) 것이므로 성령이 그들 속에 항상 계시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예수님의 생명 역시 그들 속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머무는’ 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이기 때문이다(1:33). 그러나 이 ‘숨겨진 현현’ 이란 역설이 지닌 궁극적인 의미는 장차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1)는 말씀에서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숨기운 것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그 목적은 세상으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17:22–26).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은 증인으로 선택된 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삼중적인 약속 중 두 번째 약속이 일차적으로 지칭하는 내용이다(18–21절).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장차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과 그 제자들을 위한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 생명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간의 상호 내주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상호 내주를 깨닫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되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게 된다. 이것이 ‘그 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다. 그러나 그 거하는 처소는 “주(예수) 안에서의 성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엡 2:21–22)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내주의 실체는 순종으로 실재화된 사랑이다.
삼중적인 약속의 세 번째 부분(23–24절)-유다의 질문에 대답하여-은 두 가지 면에서 그 사상을 더 멀리 확장시킨다. 그것은 약속된 ‘거함’ 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모든 자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함은 동시에 아버지의 거함인 것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는 애초의 확신이 재확증되었고, 빌립에게 하신 말씀이 재진술되었으며, 옛적 이스라엘의 소망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거하심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적인 내주는 이제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내주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실체는 사랑과 순종-사실상 아버지의 말씀인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14:25–31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이 엄중한 어구는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유사한 형식-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을 상기시킨다. 이 같은 강조법은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동안- “아직 그들과 함께 거하는 동안” -제자들에게 실제로 하신 말씀을 주목하게 만든다. 주님은 참으로 말씀하셨다.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유다와 갈릴리 지방에서 특정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아람어로 말해진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 환언하면, 세상의 공적인 삶의 일부인 객관적인 계시가 존재한다(그 공적인 삶의 일부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가의 임무다). 그것은 구체적 사건들-일본이나 인도가 아닌 팔레스틴 역사의 일부이며, 10세기나 20세기가 아닌 1세기에 일어났고, 실제 이름이 부착된-속에 나타난 계시다. 요한복음의 목적 중 하나는 기자가 기록하는 내용이 지닌 역사성, 사실성, 구체적인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와 장소에 속하는 것은 제한성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사건은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시대와 장소에 속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러면 그분의 계시가 어떻게 한 시대와 장소에 국한되어 나타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세계 종교는 이 ‘특수성의 스캔들’ 을 도무지 용납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건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 관련되어야 하고, 따라서 각각의 역사적인 상황에 있는 인간 영혼 하나하나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 통상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종교가 각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 속한 사적인 문제가 될 것이고, 그 불가피한 결과로서 공적인 삶-역사가의 임무에 해당하는-은 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난 부수적인 것으로, 또한-환상은 아닐지라도-그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며 모호한 진리의 영역으로 간주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단순화시켜 투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하나님의 계시는 공적인 역사의 일부인 ‘객관적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는 내면의 ‘주관적인’ 경험의 문제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에 대해 과학의 공적인 진리성에 비견되는 진리성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요한은 ‘객관적인’ 계시에 관한 이야기, 본디오 빌라도 시대의 유대인이었던 특정한 인물인 동시에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재 그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이 ‘객관적인’ 계시가 제자들의 내적이고 ‘주관적’ 경험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수라는 인물의 구체적인 인간성 속에 현존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예수님이 나중에 그분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도 동시대인이 되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임재하게 될 것이다. 이 살아 있는 임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제자들에게 재현될 것이며, 이로써 그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계시는 그 인물의 ‘객관적인’ 형태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그는 제자들이 고안해 낸 인물이거나 그들 나름의 신관(神觀)에서 나온 인물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고, 책망하고, 용서하고, 치료하고, 가르쳤던 자로서 그들이 만났던 인물이다. 그들은 이 ‘타자’ 를 만났다. 아니 오히려 그 타자가 주도적으로 그들을 만났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계속 반복하듯이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또한 깨달을 수 없었던-이유는 그들이 어리석거나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혈과 육’ 을 지닌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유대인’ 과 다를 바 없었다. 차이점은 그들이 증인이 되도록 ‘선택받았고’ 사전에 준비된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혈과 육’ 은 하나님을 알 수 없으므로, 그들이 증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때는 오직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셨을” 때, “휘장 가운데로 길을 열어 놓으셨을” 때, 수난을 통하여 “이 시대의 통치자들” -인간의 눈으로 하여금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셨을 때다. 이 성취된 승리를 통하여 예수님이 왕으로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셨으며(18:37) 종교의 세계를 포함한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을 폭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산 영으로서 사람들에게 오셔서 이 영단번의 사건을 가리키며 그들의 마음과 양심 가운데 이것이 진리임-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실 수 있다(15:26; 16:8–15; 요일 2:27; 고전 12:3).
이것은 또 다른 계시이거나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은 그분을 보내셨던 아버지가 보내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는다(26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고, 아버지의 말씀을 발하셨으며, 아버지의 사역을 행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 또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이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해석해 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내신 분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는 분은 동일한 아버지다.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다른 방법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닫도록 하신다. 성령은 ‘이 말’ -1세기 유대라는 특정한 세계에 속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취하셔서 모든 시대와 장소에 걸쳐 제자들에게 새롭게 기억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모든 것’ 을 가르치실 것이다. 이는 ‘모든 것’ 이 우주의 머리요 왕이신 예수님 안에서 통일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엡 1:10; 골 1:20).
바로 이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기독교 신앙이 존재하게 된 것이고, 이 믿음을 공유하는 자들이 쓴 ‘복음서들’ 이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네 복음서의 저술은 부활의 날 이래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계속해서 ‘생각나게 한’ 결과다. 이 과정-최초의 제자들이 행한 말씀 전파와 상호 격려(‘파라클레시스’)로 시작된-은 흩어져 있던 여러 기독교 공동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이 분명하다. 제4복음서의 기자는 자신이 그 ‘사랑받는 제자’ 의 증거에 의거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러나 이 참된 해석은 오직 성령-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인-이 해석자의 마음에 내주하여 계시가 계속 진행되게 할 때에만 가능하다. 여기서 계시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고, 1세기 유대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있었던 말씀과 사역이 모든 시대에 걸쳐 믿음의 공동체가 직면하는 모든 새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된다는-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가는 과정에서-의미에서의 계시다.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짐으로써 믿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는 진리를 계속해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증거는 결국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서 다음의 사실을 최초로 증거하고 있다. 즉, 영단번에 일어났고 구체적이며 특정한 그 ‘객관적인’ 계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단절점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유대로부터 사마리아와 전 세계에 걸쳐 역사하기 시작하는 시발점-육신이 된 말씀 안에서 ‘모든 것’ 이 진정 하나임이 인식될 때까지-이라는 사실이다.
이 약속들이 주어진 공동체는 예수님의 요청으로 평안의 선물을 받게 된다. 평안(‘샬롬’)은 전 인류의 여정의 목표, 곧 약속된 축복의 본질적인 핵심이다. 이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되어 온 최후의 완성을 보증하는 표지이자 서약으로서 공동체에 주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이 알고 있는 그런 유의 평화-일시적인 분쟁의 중단이나 휴전에 불과한-가 아니다. 곧 분명해지겠지만 이것은 전쟁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에 주어지는 어떤 것이다(예를 들면, 15:18이하; 16:1–3, 33). 그것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평안, 곧 “그의 십자가의 피” 로 이룩하신 평화다(골 1:20). 그것은 우리로 환난 중에도 기뻐하게 만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 이다(롬 5:1이하). 그리고 이 평안의 선물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이다(빌 4:7). 그러므로 이 담론의 초반을 장식했던 위로(‘파라클레시스’)가 재확증된 셈이다. 더이상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이 수난의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또한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이 같은 확신이 주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제자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했다. 그 이유는 이 ‘가는 것’ 이 새로운 유의 ‘오는 것’ 을 의미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더 큰 일’ 을 위한 길을 열어 주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성령이 ‘모든 것’ 을 가르치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완성이자 본래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 을 보시고(히 12:2) 제자들이 그 즐거움에 동참하기를(그들이 그분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바라신다. 진정한 제자의 기쁨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보다는 예수님이 승리한 사실에 있다. 이 값비싼 사명을 감당하도록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 분은 아버지였다(3:16). 이제 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는 것을 기뻐하고 있으며, 그가 돌아감으로써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드리게 되는데 이는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13:16),
다시 한 번 기자는 제자들이 당시에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믿게 될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는 보혜사가 예수님이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해석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한 번 우리는 성육하신 주님의 말씀과 사역을 너무나 비좁은 공간으로 압축시키는 제약을 상기하게 된다. 그 영원한 분이 말씀하실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다는 이미 제 길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유다의 배후에는 율법과 정치와 종교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들의 배후에는 ‘이 세상의 통치자’ 가 버티고 있는데 그는 스스로 눈 먼 존재면서 사람들의 눈을 가려 참된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전 2:8이하). 장차 있게 될 재판에서 이 세상의 통치자는 자기의 대변인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그의 지혜는 자기 기만적이고 그의 권세는 무력하다. 곧 있게 될 행동은 세상 통치자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가 될 것인데, 그분은 그를 무장 해제시키고 그의 주장이 어리석고 무력한 것임을 폭로하실 것이다(골 2:15; 참고. 고전 1:18–25). 그것은 예수님의 행위, 곧 순전한 사랑과 순종의 행위이며, 그로써 세상은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행동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을 소환하여 일어나 유다(나무 사이로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는)를 만나러 가자고 말씀하실 때 사용한 표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표현은 기독교적으로 변용되어 국가의 잔인한 권력에 직면한-자주 그랬듯이-겁 많은 제자들에게 전투를 요구하는 외침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요한이 선호하는 바, 공관복음에서는 최후의 재판 시에 나오는 것을 앞당겨 그의 사건 이야기에 배치시킨 또 하나의 예인가? 혹은 여기에서 고별 담론의 초기 판(版)-담론이 더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최종 편집 시 현재와 같은 상태로 남겨진-이 끝나는 것인가? 이러한 여러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 어떤 경우든 의미는 분명하다. 제자들과 헤어지는 순간에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 는 겁쟁이를 위한 부드러운 양털이 아니라 용기 있는 자를 위한 강철이다. 보혜사의 ‘소명’ 은 어린 양이 ‘이 세상 임금’ 을 만나러 갈 때 “어린 양을 따라가는” 것이며(계 14:4), 거기에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 이 거할 곳이 없다(계 21:8).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는 부르심이다. 함께 ‘거하겠다’ 는 약속이 주어진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유일한 길이다-을 걷는 자들이다.
1. 예수님의 승천(1:1–14)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 단락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사도행전과 이어주며,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언급될 이야기를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지내신다. 예수님은 이 기간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예수님의 부활과 그분의 깊이 있는 말씀, 그분의 승천을 통한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을 더욱 견고히 무장시킨다.
1) 서언: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1:1–2)
사도행전의 처음 두 구절은 이 책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1–2절). 누가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먼저 쓴 글”(프로톤 로곤, πρῶτον λόγον), 즉 누가복음을 언급하며, 누가복음과 동일한 수신자인 “데오빌로”(떼오필로스, Θεόφιλος)를 거론하고,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한다. 따라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애초부터 두 권으로 기획된 책(two-volume work)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책들은 모두 “데오빌로”에게 보내졌는데, 이 이름은 주전 3세기 이후 흔하게 발견되는 헬라식 이름이었다.24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붙였는데(참고. 눅 1:3),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데오빌로가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기를 기대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지원해 주기를 바랐다.
누가는 “먼저 쓴 글”(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다고 하는데(참고. 눅 24:51), 이는 그의 두 번째 글(사도행전)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즉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시면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을 기록한 것이지만,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사역을 그분의 제자들(사도들)이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the presence of the risen Jesus)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령 강림의 약속(1:3–5)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분의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하셨다(3절a; 참고. 10:41). 여기서 누가는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라고 표현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신빙성’(historical reliability)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기 때문에 그분의 육체적 부활은 적어도 제자들에게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즉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참고. 눅 24:31–33; 34, 36–51),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지내신 것으로 되어 있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결코 영혼이나 환상으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셨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필시 사도는 부활을 확신했다. 사도행전과 이어지는 서신서들에 묘사된바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참고. 고전 15:12–19).
예수님이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10일이 지나서 ‘오순절’(五旬節)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 강림하신다(참고. 2:1). 그런데 ‘40’이라는 숫자는 실제 숫자이지만 신학적인 상징성을 가진다. 즉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훈련의 기간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며 훈련을 받았고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다(참고. 출 24:18; 34:28). 그리고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참고. 마 4:1–2).
예수님은 이 기간에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다(3절b).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에 그리 많이 나오는 용어가 아니지만(예. 8:12; 14:22; 19:8; 20:25; 28:23, 31), 이 책의 처음과(1:3) 마지막에(28:31) 반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참고. 서론의 ‘주요 주제들’). 예수님은 이미 공생애 기간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셨기에(참고. 눅 4:43; 6:20; 7:28; 8:1, 10; 9:2, 11, 27, 60, 62; 10:9, 11; 11:2, 20; 12:31–32; 13:18, 20, 28–29; 14:15; 16:16; 17:20–21; 18:16–17, 24–25, 29; 19:11; 21:31; 22:16, 18, 29–30; 23:42, 51), 이 기간에는 이전에 가르치셨던 내용을 복습하시면서 이전보다 심화한 내용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의 핵심으로서 이제는 제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명령하신다(4절). 사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적과 명령은 조금씩 다른데, 이는 신학적 강조점의 차이 때문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일을 기록하였다(참고. 마 28:10; 막 16:7).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과(참고. 요 20장) 갈릴리에서(참고. 요 21장)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모두 기록하였다. 하지만 누가는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라는 말씀을 언급함으로써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설명하시는데, 그것은 ‘성령의 오심’이다(5절; 참고. 2:33). 예수님은 제자들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참고. 요 14:16, 26; 15:26; 16:7). 따라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예루살렘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거기에서부터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때문이다(참고. 2:33; 눅 24:47). 예루살렘은 신학적 상징성을 가지는데, 하나님은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서 예루살렘을 통하여 온 백성을 다스리시며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참고. 삼하 7:1–29; 왕상 8:1–21; 시 78:68–72; 132:11–18). 그리고 이 언약에 대한 성취로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구속의 사역을 이루셨는데, 이제 성령께서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신다.
더욱이 기능적인 측면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만일 제자들이 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흩어지면(파송되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부활의 확신 위에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후에야 비로소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사도행전에 묘사된바 제자들이 놀랍게 변화된 모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 부활의 확신에다가 예수님의 더욱 깊은 가르침과 성령의 강력한 권능이 더하여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예수님은 성령의 오심을 요한(John the Baptist)의 세례와 대조하면서 설명하신다. 즉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참고. 마 3:11; 막 1:8). 예수님께서 이처럼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연관 지으시는 것은 성령세례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해서이다. 곧 물세례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세례는 죄 사함에 대한 ‘상징’이며 ‘의식’이나, 성령세례는 죄 사함의 ‘실체’이며 ‘내용’이다. 물세례가 물에 의해 적셔지는 것처럼 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는 성령에 의해 적셔진다(saturated by the Holy Spirit). 사람이 물로 씻어져서 정화되듯이 죄악이 성령으로 씻어져서 사해진다. 성령세례는 단회적 사건인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성령께서 그의 모든 죄를 씻으셔서 정결하게 하신다. 하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후에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성령 충만은 반복되는 일로서 이를 통하여 신자들이 힘을 얻는다.
3) 선교에 대한 사명(1:6–8)
예수님께서 성령의 오심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는다(6절). 제자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성령의 오심과 주님의 나라의 도래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참고. 사 32:15–20; 44:3–5; 겔 39:28–29; 욜 2:28–3:1; 슥 12:8–10).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나라를 민족적 이스라엘에 국한하여 생각하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식민지 이스라엘의 해방(회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될 바로 그때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배웠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이나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한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the Kingdom of Israel)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영토와 민족에 국한해서 이해하는 제자들의 발상은 잘못되었다. 특히 그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와 시기”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참고. 눅 21:7). 그리하여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신다(7절). 이것은 책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회복과 같은 문제는 그들이 알 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8절). 이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하며, 이 구절에 따라서 사도행전의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the Great Commission)을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정치적인 이슈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세계 복음화라는 영적인 이슈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신다. 여기서 ‘성령의 임하심’에 관한 약속은 이사야 32:15의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한다. 이 구절은 황폐한 이스라엘이 성령의 오심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권능”(뒤나미스, δύναμις)이란 용어는 ‘이적’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했고(예. 2:22; 3:12; 4:7; 8:13; 10:38; 19:11),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힘을 포함하기도 했다(예. 4:33; 6:8–10). 따라서 “권능”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증인이 되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지리적 확장은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으로 성취된다. 필시 사도행전에서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유대인)에서 시작되어 땅 끝(이방인)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온 유대”는 유대, 이두매, 갈릴리, 베뢰아, 트랜스요르단 등을 가리킨다. 또한 “사마리아”는 유대와 땅 끝의 중간지대로서 혼혈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땅 끝”은 사도행전이 바울의 로마 사역으로 끝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로마로 여기지만, 로마가 사도들의 궁극적인 종착점이었던 것은 아니며, 나아가서 온 세상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사도들과 그들을 계승한 후대의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글자 그대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
결국,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단순히 한 나라(이스라엘)의 물리적 회복이 아니라 온 세상의 영적 회복이며, 이는 오직 성령의 오심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아시아와 그리스를 지나 로마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불과 몇 십 년 만에 복음은 많은 지역에 퍼지며,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겨나고, 교회가 세워진다. 특히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이는 이 책을 읽는 모든 세대의 모든 제자들이 계속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
4) 예수님의 승천(1:9–1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신 후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어 가시고 곧 구름이 그분을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한다(9절).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데” 올리어 가신다. 이는 그분이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하늘로 올리어 가시는 것은 또한 그분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기 위해 영화롭게 되시는 것을 상징한다(참고. 엡 1:20–21; 빌 2:9; 히 1:3, 2:9 등). 즉 예수님은 ‘승천’(昇天)하셨지만 또한 ‘승귀’(exaltation)하셨다.그리고 예수님을 가린 구름 역시 실제 구름이나 또한 신학적으로 ‘신적인 영광’을 상징한다(참고. 출 16:10; 시 68:4, 104:3).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그분이 영화롭게 되셨음을 알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자세히 쳐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난다(10절; 참고. 눅 24:4). 그들이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천사임을 의미한다(참고. 마 28:2–3; 요 20:12). 천사들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말한다(11절). 천사들은 제자들의 주의를 예수님의 재림으로 환기시킨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 약속은 제자들의 사명 성취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림을 대비하여 깨어 있을 것과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다(참고. 눅 12:35–48). 따라서 여기서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천사들의 말은 촉구의 성격을 띤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속히 현실로 돌아와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승천을 엘리야의 승천과 대조할 수 있다. 엘리야가 승천한 후에 갑절의 영감을 엘리사가 받았듯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성령을 받아 권능을 얻게 된다(참고. 왕하 2:10).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 시에 들린 천사의 말인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는가”를 예수님의 부활 시에 들린 천사의 말인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에 대조할 수 있다(참고. 눅 24:5). 전자의 경우나 후자의 경우 모두 증인의 사명과 연관된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의 ‘종말론적인 현존’(the eschatological presence)의 조건이다. 따라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편재하셔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