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훈련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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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우리를 훈련하신 하나님
우리가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면 어떠한 길이 펼쳐집니까? 항상 넘어짐의 길입니까? 아니면 일어서는 길입니까?
아니면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는 반복되는 길입니까? 우리는 이러한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더욱더 신앙의 진보를 보여야 할것입니다. 신명기서에 보면 독수리로 그리스도인 우리를 훈련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찾겠습니다.
신명기 32:11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11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흔들어 새끼가 떨어지면 날개를 펴서 새끼를받아 올리듯 하셨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 40년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을 신명기는 독수리가 새끼독수리를 양육하는 것으로 묘사를 하였습니다.
독수리의 둥지는 절벽위에 있습니다. 그곳에 새끼를 키웁니다. 어느정도 자라면 새끼가 계속 보금자리에 있지 못하게 어지럽게 만듭니다. 흔들다고 표현을 하고 있죠!
그래서 보금자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떠나면 어디입니까? 낭떠러지입니다. 결국은 떨어지겠죠.. 그모습은 독수리는 그 위에서 너풀거리고 있는것입니다. 계속 보고 있는거죠..
영어성경에는 호바링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을때 거의 부닥칠때 쯤 독수리가 날개로 받아서 다시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떨어뜨리고 이것을 반복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새끼 독수리는 날개짓을 하게되어 하늘의 제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훈련시키는 것을 지금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훈련시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면 정말 우리를 이렇게 훈련시키고 계심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어떠한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까?
(신명기32:11)에 나오는 것처럼 제 1단계는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푹신푹신한 깃털 둥지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보금자리에 넣어서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고 하는거죠..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계속 편안한것만 추구하고 있으면 신앙이 성장합니까? 아니면 그자리 그대로 입니까?
우리에게 환란과 역경이 없다면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한것을 바라보고 살면 고난받을수가 없죠!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고난가운데로 넣으십니다.
요셉을 보겠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형들에게 갔습니다. 만약에 거기가 멀다고 때쓰고 가지않았다면 편안한 삶을 추구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셉이 나오지 않았겠죠.
하나님은 요셉을 저멀리 성경을 보면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까지 보내는 것입니다. 이 거리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곳까지 갔습니다. 30km를 더 간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옆에 가만히 있으면 고난이 없고 환란이 없었을 것인데
주님의 때가 시작되니 요셉을 훈련하기 시작한것입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했죠.. 어려서 부터 미움시기를 받았지만 아버지 옆에 있어서 버틸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상황이 이제 본격적인 주님의 훈련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려고 무단히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욥도 시험하기 위해서 훈련하기 위해서 자녀를 치시고, 재산도 날아가고, 자기의 몸도 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때는 잘 섬겼는데.. 어려움이 있을때 보금자리가 가시나무로 가득찰때 어떻게 하는지 볼려고 주님은 더욱더 나를 몰아가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2단계는 신명기 32장에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주님은 우리를 그 역경속에 보내시면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것입니다. 멀리서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요 보호 하기 위해서 더욱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미는 갓 날으려고 애쓰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을 떠나지 않고 날아 다닙니다.
새끼는 어미를 보지 못하지만 어미 독수리는 누굴 보고 있습니까? 온통 신경을 새끼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 환란과 역경, 고난속에 우리를 밀어 넣으시지만 항상 주님은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목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시편 32:8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처음가본길을 어느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거기에 두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분은 알려주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 한분은 알려주고 잘가나 못가나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후자인것입니다. 잘가나 못가나 지켜보고 계시고 잘못가고 있으면 거기 아니라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를 주목하고 훈계하고 계시는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것입니다.
마가복음 6:48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벳새다로 가라고 하시고 그때부터 주님은 보고 계신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시간입니다. 몇시입니까?
밤사경입니다. 밤사경은 새벽3-6시입니다. 보일까요? 거리도 수라나 떨어져 있습니다. 약 5km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보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보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다 보시고 관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45:15 주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은 숨어서 우리를 계속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면 어떠할까 좀더 조심하고, 좀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보이지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새끼는 어미 독수리가 보이지는 않지만 독수리의 어미는 그 위에서 계속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3단계로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둥지에서 기어 나오면 보고 있다가 새끼를 얹어 더 높은곳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떨어 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새끼들이 땅에 부딪칠 상황이 되면 쏜살같이 내려가서 다시 날개로 받습니다. 그것을 새끼 독수리가 혼자 날수 있을때까지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가끔씩 보면 내가 넘지 못한 일이 있어서 피해가면 또다시 똑같은 일을 주시는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을 넘을수 있을때까지 주님은 반복적으로 주시는것을 경험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형제자매님은 그러한것을 경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연단과 시련들이 언제까지 올까요? 주님이 오실때까지 그러한 연단과 시련이 올것입니다. 왜냐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연단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연단과 시험을 받았습니까?
인정시험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2–4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우르에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까? 하란땅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왜 가지 못했습니까? 아버지가 가기를 거절한것을 보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때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방금 읽은 말씀에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으니깐 다시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땅으로 가라고요..
우리같으면 가라고 했을때 첫번째는 호기로 갔다고 합시다.. 지금 있는땅 하란도 큰 도시입니다. 그 먼거리 한번도 가지 못한 길을 갈려고 하면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아갔습니다.
지체된것은 아버지때문에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여기 앉아 있는 형제 자매님 누구든지 인정시험을 받을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인정을 극복하고 말씀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바울은 인정시험을 받지 않았을까요? 사도바울 또한 인정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거짓형제의 위협을 받았다고.. 그리고 같이 동역했던 분들과 대립관계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러한 모든것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시험을 받을때마다 아브라함, 사도바울은 주님이 항상 먼저였습니다. 그러니깐 이길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기근시험이었습니다. 경제적 시험입니다.
창세기 12:10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기근문제가 옵니다. 먹을것 입을것 경제적으로 시험들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나안땅까지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기근이 왠말입니까? 주님이 가라고 한 그땅에 왔는데 주님이 주신것은 바로 연단인것입니다.
기근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나안을 올라오게 되었으며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경제적인 시험이 올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경제적인 시험이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1:27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경제적인 시험이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사도바울은 배고푸고 춥고 헐벗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포기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넘어 섰습니다. 그 산을 넘어간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순교 당하기 전에 적은 편지가 바로 디모데 전후서입니다.
디모데 전서에 디모데에게 이러한 편지의 글을 남깁니다. 지족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6–8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리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경제적인 시험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기다림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가 많이 주어지는 시험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최초 아브람에게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했을때 언약을 했죠. 큰 민족을 주겠다고 언약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25년만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다.
25년의 기다림 속에서 아브람함은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도 출산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스마엘이 탄생이후 14년 후에 이삭이 탄생했습니다.
결국은 25년을 기다림속에서 이삭이 탄생한것입니다. 아브람함 100세때였습니다.
이 창세기의 내용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은 인내가 없고 경제의 시험도 이기지 못했네.. 그렇게 평가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답이 로마서 4:19–21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완전해 진것입니까?
창세기 17:1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99세 완전해 지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 99세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완전해 지니깐 몇세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까?
100세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다.
사실은 연약한 부분도 있고 여러가지 어떤 불신적인 요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걷어 내신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름도 99세에 바꾸어 주시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여정의 길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다림속에서 주님이 주신것 아니겠어요!
우리는 기다림속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겪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완전하라고 하실때 그 말에 순종하여 완전해질수 있는 신앙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겁니다.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의 더욱더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끝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더 굳건해 졌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주는 기다림의 시험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어디로 가길 원했습니까?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억지로 가려고 노력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기다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36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약속입니까? 저 천국의 상급일것입니다. 우리의 인내함으로 형제자매님을 건지고 또한 한 영혼을 건진다면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우리는 기다림의 시험, 인내의 시험을 넘어가야 할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기다리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있으면 반드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어 웃음이 된것처럼 우리에게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다림 속의 끝은 무엇이 기다립니까? 웃음이 기다릴것입니다.
야고보서 5:11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인내하는 자가 복있다 웃음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시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완전해지니 1년만에 이삭이 탄생되는 것을 경험한 뒤로는 성경은 또다른 시험을 주십니다.
어떠한 시험을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이삭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 시행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시험이 포기하는 시험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아직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것이 많을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8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나의 목숨도 내어 던질수 있겠습니까?
가끔 나에게 물어 봅니다. 나의 목숨을 내어 던질수 있을까? 쉽게 답이 나오지 못함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포기할것 또한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 단련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엄청난 상급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 사도바울을 본받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7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주는 것은 결국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고 주신것이라는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소망도 아주 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진 분들은 작은 환란.. 역경.. 찾아와도 이겨낼수 있을것입니다.
제일 중요한것은 2단계 양육 방법에서 지켜 보고 계심을 알고 계신다면 넉넉히 이길수 있을것입니다.
독수리는 독수리 새끼를 절대 땅에 떨어 뜨려서 죽게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다가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십니까? 개입하여서 그 상황을 모면하게 해줍니다.
야곱이 세겜땅에서 머물러서 큰 사건이 일어 났지 않습니까? 레위와 시므온이 동생 디나가 겁간을 당해서 세겜민족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되었고,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창세기 35:1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 상황을 모면해 주지 않습니까?
이런것을 격으면서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벼랑끝으로 몰아가서 주님만 절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주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여 믿음을 성장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윗의 간증에서 나와 사망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간증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겨낸 다윗은 어떠한 간증을 합니까?
시편 139:9–10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바다 끝에가서 거할찌라도 거기서도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붙드신다고 간증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나를 이렇게 보호하심을 느끼면서 살아야 할것입니다.
이렇게 훈련을 하게되면 결국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훈련의 결과 독수리 새끼는 결국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훈련을 달게 받고 위엣것을 추구하며 주님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겠습니다.
(욥기23:10)말씀 읽고 마치겠습니다.
욥기 23:10 “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