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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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적과 함께 계속되는 토론 또는 쟁론의 형식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방문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을 때 유대인들과 논쟁이 이어지고 이런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과 지도자들과의 쟁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말함으로 갈등은 고조되고 결국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 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시작하면서 22절은 수전절과 겨울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을 ‘거니시니’ 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상황도 설명합니다. 이런 정보가 어떻게 여러분께 읽혀 지는가요? 우리는 유대인의 명절인 수전절을 잘 모르니까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통해 그때의 상황과 예수의 말씀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 정보가 됩니다.
해당 배경은 이제 달라진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핀 요한복음을 기억하신다면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외치시거나, 가르쳤다는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함께 나오는 본문은 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이고, 37절에 계속해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12:44에서도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 가르치시는 경우도 6:59절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앞선 7장 14절에서도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 20절은 가르침이 성전 안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다고 알려줍니다.
아! 여기는 다르네 라고 생각이 따라오고 있습니까?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분명 성전에 계셨으나 그전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에워싸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까지 당신이 우리 마음을 졸이게 하겠소? 그리스도이시면 우리에게 명백히 말해 주시오? 분위기가 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다’ 라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대놓고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그다’라는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이들의 질문은 직역하면 ‘ 우리 생명을 언제까지 가져가게 할 것입니까?’라는 어려운 번역이 나옵니다. 이것을 개혁개정에서 ‘우리 마음을 졸이게’라고 번역했고 niv는 ‘얼마나 오래 동안 우릴 애태우실 것입니까’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메시아를 누구보다 학수고대 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고,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면 메시아가 빨리 오신다. 그래서 모세처럼 억압 받는 민족을 구원할 것이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우리 민족을 다시 부국강병하게 할 것이다는 것이죠. 특히 수전절이라는 정보는 시리아에 나라를 빼앗기고 성전이 우상 숭배의 장소로 더렵혀진 경험 속에서 마카비라는 사람이 무장 투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명절이라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즉 오실 메시아로 시인하여 여기저기에서 소동과 소요의 조짐이 보였을 것이고 그들은 이런 사람들을 색출하여 쫓아내곤 있지만 특히 수전절 같은 명절에 예수로 인해 선동되어 마치 마카비 혁명처럼 번진다면 이를 성전 뒷편의 가장 높은 안토니오 요새에서 늘 유대인을 감시를 하고 있는 로마 당국에 눈길을 의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마음 졸이는’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하고 돌로 치려 합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 신고된 예수는 신성모독의 혐의가 아니라 바로 정치적인 반역 행위로 신고 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그래서 저들이 ‘얼마나 오래 동안 우리 생명을 to take away 빼앗기게 할 것인가?는 초초한 상황이죠.
생명은 빼앗긴다. 하지만 앞서 예수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면서 생명을 빼앗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양에게 생명을 주는 자로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육신의 생명을 지키려 초초해 ‘메시아면 밝히 말하라’는 요구는 본문에서는 밝히 드러나지 않지만 결국 로마의 법 아래 예수를 죽일 빌미를 찾는 구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믿지 않는 문제로 뒤집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미 5장 후반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아들로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한다고 하셨고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들이라는 신분에 걸맞는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한다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앞서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은 목자가 양을 부를 때 양과의 친밀함에서 목소리를 안다고 했습니다. 친밀한 목자의 음성을 통해 양을 부르는 건 구원하기 위함, 생명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외침에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예수께서 선한 목자와 같이 하시는 일을 보고 아는 것/ 보고 따르는 것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죠. 앞서 맹인을 회복하게 하시는 기적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 즉 보고/들었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반응합니다. 그렇듯 자녀는 부모의 소리를 듣고, 학생은 선생의 소리를 듣고, 환자는 의사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치신 것과 기적을 보고 들었지만 유대인들은 다른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27절은 그런 유기적인 관계를 잘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는 관계를 법적인 서류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증인으로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28절입니다. 그렇게 따르는 양/ 믿음의 관계에 있는 신자는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은 삯꾼과 같은 자들이 1차적이고 이리와 같이 양을 해하는 것들로 부터라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9절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이렇게 함으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주권, 통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다’ 이미 우리는 1장에서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창세전부터 계신 말씀이라는 요한의 선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예수는 1) 아버지의 일을 함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2) 내 양은 아버지께서 주신 양으로 아버지의 통치 아래 있는 보호를 통해 3) 예수께서 양을 이끄시는 것이 영생/구원을 주시는 관계가 완성됩니다.
30절은 그 결론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말을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 다양한 것들이 보입니다. 대표적으로 ‘기적’ 같은 것이죠. 여전히 오늘날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기적과 같은 것을 바랍니다. 고통받는 현실, 아픈 가족 구성원의 회복 등이나 하다못해 교회를 다니면 ‘잘 된다’는 사고입니다. 조금 더 현미경의 배율을 높이면 신앙 교리와 같은 ‘조직’이 보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꽤 두터운 층을 갖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맞는, 처음 교회 오는 분들에게 맞는 또는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맞는 등 다양한 상황에 맞춰 만든 것들이 보입니다. 이런 교리라고 하는 조직은 예수님 이후 2천년이 넘는 시간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두텁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조직적인 내용을 통해 신앙의 안전을 확보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제 가장 높은 배율로 높인다면 최종의 단계 보게 되는 데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정점에 도달합니다.
설교자의 부족으로 드라마틱하게 설명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은 있지만 여러분 우리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때론 기적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출발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심’이라는 도달점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선물로 받았다면 선물로 인하여 한참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곧 선물을 준 상대에게 감사의 마음과 고마움을 늘 선물과 함께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 지금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인정하신다면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이심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조직 안에서 끈임없이 ‘하나’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간음한 여인이나 맹인과 같은 약자를 배제하거나 그들이 만든 600개가 넘는 율법의 두꺼움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더 어렵고 좁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율법의 본래 기능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을 회복 시킨 것,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며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나 맹인된 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통해 안식일의 바른 관계가 하나님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혁명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올바른 이유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곳에서 출발해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은 영이신 하나님을 ‘단순히 믿는다’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눈과 귀를 막고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사기꾼이 속여 믿게 만드는 말의 능수능란함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이미 깨어진 옛 언약을 붙잡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죽음으로 값을 치뤄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실 분이 예수 밖에는 없는 이유도 ‘하나님과 하나’이시기 때문에 예수의 죽으심으로 죄의 값인 죽음을 치루는 값이 넉넉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믿음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들어 치려’했습니다. 예수는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선한 일로 인함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라고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은 ‘자칭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보이는 사실은 맞지 않습니까? 예수는 제자를 모으고 기적을 베풀고 가르치면서 그 내용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할 뿐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자칭 하나님’은 유대인들 편에서는 맞는 말로 보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하시면서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의 말씀으로 논증하시는데 시편 82:6 “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라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편한 말로 바꿔보면 ‘그래 너희가 나를 자칭 하나님과 하나라고 했다하니 너희가 가장 높은 권위로 내세우는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다’는 구절이 있지 않느냐 하시며 35절에 ‘성경은 페하지 못하나니’라고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다고 주석을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위치 즉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직접 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일종의 계약서 역할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 내용이 82편에 수록된 것이죠.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해 판결을 내리고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를 구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 삼으신 것은 왕이신 하나님의 옳으심(공의)가 드러나도록 하신 특별한 선택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고 믿어 영생에 이르는 그 줄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의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 서로 사랑하라)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행한 삶의 ‘정의와 공의’를 통해 세상이 심판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어 보셨습니다. ‘너희는 택한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에 제사장이니’라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즉 ‘’너희를 신이라’ 특별하게 불렸다는 성경의 말씀도 사람을 신이라 불렀는데 36절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하면서도 82편의 ‘신이라 불리는 특권’을 누리면서도 올바른 재판을 이끌지 못했던 자들처럼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 하심으로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의 뜻을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부모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어린 자녀는 부모의 말을 신뢰하고 따르지 않습니까? 양과 목자의 관계에서 말입니다. 거짓말 하지 않는 부모가 자녀의 신뢰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고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게 길을 밝히는 등불처럼 주님께서 베푸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놀라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잡고자 했고 예수는 그곳을 떠나셨다고 39절에 기록합니다.
이제 다시 요단 강 저편으로 장면은 바뀌는데. 그곳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말한 것이 ‘다 참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증거한 예수를 ‘참’으로 받았지만 오히려 예루살렘 성 안에서 성전 가까이에 있던 이들은 예수의 기적과 말씀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하나님 백성이라 믿고,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성전 가까이에서 율법을 따라 살았다는 것이 믿음으로 가지 않습니다. 시대는 달라졌고 사람들은 세련되어 과학과 이성의 한계를 넓히며 살아가지만 여전히 그들처럼 무엇인가를 붙잡지 않으면 불안한 존재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잘 해보겠다고 하면서도 죽음의 끈을 잡고 있는 유대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눈을 열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 전인격의 고백이 ‘다 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