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고통을 공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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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M1: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M1: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1. 서론 : 하나님의 눈물을 흘리는 선지자 예레미야,
(PPT)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처음 저는 이 별명을 들었을 때, 왜 울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어떤 뉘앙스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선지자로서 백성들이 행하는 잘못을 힘들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선지자들은 그다지 눈물을 흘린다는 그런 표현은 안나오는데, 예레미야가 감정적으로 예민한 선지자인가보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대원 3학년 1학기 때 “선지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거기서 예레미야를 배우며 그 일종의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가?
그리고 다른 감정 표현에 있어서도 다른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격정적인 표현을 해냅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감정이 더 예민해서? 아닙니다.
(PPT)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는 감정적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의 감정을 투영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표현하는 감정적 표현들의 대부분은 사실 “하나님의 마음을 투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선지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레미야는 감정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2. 본문 설명 : 예레미야의 상황과 감정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부르심은 1장을 보시면 나옵니다.
많은 선지서에서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에 관련된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그 소명에 대해서 상당한 불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0:7 (NKRV)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여기서 “권유하시므로”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파타흐”동사인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설득하다, 유혹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유혹하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보통 사랑을 빌미로 남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자를 유혹하는 그런 이미지에 사용됩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설득하셨는데, 유혹할 때 쓰이는 단어를 사용할만큼 그 설득이 매력적이고, 설득당할 수밖에 없는 제안, 권유였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내용에서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부정하며, “나는 아이입니다.”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의 입에 오게 되고, 그는 뿌리칠 수 없는 부르심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두게 되었을 때 그는 뿌리칠 수 없는 설득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달변가의 연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 있었고, 그 어떤 매력적인 이성의 유혹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상황은 어땠습니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조롱”이며, “치욕”이었습니다. “모욕 거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0:7–8 (NKRV)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왜 예레미야는 조롱과 치욕을 당했을까요?
예레미야 20:8 (NKRV)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파멸과 멸망”에 대한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언하라 하신 내용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나 믿고 있던 성전이 파괴되고, 이방 나라에 의해 멸망할 것이었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모함했고, 심지어 그의 친한 친구들마저 그를 속이고 모함합니다.
M2: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M2: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1. 위기 상황 : 예레미야가 겪게된 고난
예레미야가 겪었던 고난은 배신과 모욕, 치욕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오늘 본문 직전에 “바스훌”이라는 제사장에게 큰 치욕을 당합니다.
예레미야 20:2 (NKRV)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린 것은 폭행을 가한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매를 맞는 형벌에 처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처벌입니다. 굴욕적인 일이에요.
예레미야는 선지자입니다. 직분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직분을 맡은 선지자가 공개적으로 매를 맞는다는 것은 큰 굴욕입니다.
게다가 공개적으로 나무 고랑에 채워져 수감됐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느끼는 그러한 굴욕의 수치감이 더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제사장에게 공개적인 치욕을 당하는 것은 예레미야가 어떤 느낌을 들게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죠
2.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 예레미야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하나님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선지자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이 모든 감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을까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신 말씀을 그대로 선포했을 때, 예레미야는 거절을 당하고, 수치와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절과 수치, 굴욕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가요?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전체에서 하나님의 감정에 공감하는 선지자의 면모는 이 본문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하나님의 감정들인 것이죠.
하나님은 이미 예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돌아선데서부터 수치와 굴욕의 감정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신데,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신데 그 백성들이 왕을, 창조주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로서 자신의 피조물에게 거절받은 수치와 굴욕을 계속해서 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동일한 경험과 감정을 겪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굴욕과 수치를 당하신 주님이십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왕이신 주님이..그의 백성으로부터 거절받고 굴욕과 수치 당하십니다.
M3: 본문의 사건을 오늘 날로 연관하라
M3: 본문의 사건을 오늘 날로 연관하라
1. 언제나 선포되고 있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그 말씀에는 남유다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의 예언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멸망과 파괴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관계를 회복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다시 그들이 말씀 가운데로 들어오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사랑으로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서 성경의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담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제 한 나라의 멸망이나 성전의 파괴가 아닌 “이 세상의 완전한 종말”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에는 죄인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목적도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그 목적과 같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면하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 심판과 멸망, 그러나 믿는 자에게 그 심판의 면함이 주어지는 내용이 성경을 통해 선포되고 있습ㄴ다.
M4: 본문의 위기가 오늘 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M4: 본문의 위기가 오늘 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2. 복음에 대한 거절과 하나님의 거절 받으심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믿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겠죠.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심판의 경고를 믿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인이라고 칭하는 자들 중에 심판과 멸망의 메세지를 믿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미국 설문조사 결과입니다
무교인 분들 중 지옥을 믿는 사람 28% 이해가 가죠?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 지옥을 믿는 사람 84%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 중에서 진짜 복음을 믿고, 진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분명히 많을 것이라는 점을 저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심판과 멸망은 자신에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면, 그 부분만 선택해서 믿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가르침, 혹은 위안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분명히 “최후 심판과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독교인들조차 지옥만 믿지 않는 선택적 복음을 믿고 있습니다. 진짜 믿음이 아니죠.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는 어떤 점을 볼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 때 거절받고, 치욕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거절받고, 치욕받고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히 멸망과 심판에 대해 그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 복음은 여전히 사람들에 의해 거절받고 있구나.
이 점이죠.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말씀이 거절받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죄악이 퍼진 이후 계속해서 거절받고, 치욕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M5: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M5: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1. 하나님의 함께하심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어떤 확신이냐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요.
예레미야가 겪고 있는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선지자의 직분으로 꼬드겨서 그 넘어갈 수밖에 없는 설득에 당해 직분을 맡게 되었고
그리고난 후 선지자로 살다가 억울한 상황에 놓이고, 말씀을 거절당하고 치욕과 굴욕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꼬드기신 후에 치욕을 당할 때는 응답하지 않으시는 듯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확신합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요.
왜 그랬을까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이 당한 거절과 치욕을 이미 당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넘어서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 상황을 경험함으로써 너무나도 잘 공감하고 있었습ㄴ다.
그러나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 상황이 자신이 당해보니 너무나도 힘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까지 대변하는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는 쓰임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을 가진 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에 공감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을 전할 때 생기는 어려움을 격정적으로 토로할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때로는 거절받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치욕을 얻게 되나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M6: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라
M6: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라
1. 예수님은?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거절받으셔 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거절받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아니 공감할 수밖에 없는 예레미야보다 더 완벽한 예레미야같은 선지자”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받으신 거절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직접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복음을 전하시고, 그것을 거절받으시고 치욕받으시는 사건으로 가득했습니다.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들의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십니다.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어 죽이려고 합니다.
이 이외에도 복음서를 쭉 살펴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면,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모함하고 죽이려하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마치 누구에게 벌어진 일 같나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에게 벌어졌던 일, 예레미야에게 벌어졌던 일과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예레미야는 치욕을 받고 죽음의 위협에 놓일지라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함의 끝에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받으신 거절의 끝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를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46 (NKRV)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린바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고,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얻게 된 복은 무엇입니까?
은혜는 무엇인가요?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죽으신 댓가로 우리는 예레미야에게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세상에게 예레미야처럼 거절받고 치욕받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게서 언제나 함께한다는 사실입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