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9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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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49-59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심판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는가? 그것은 각자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말 할 수 있다. 학교를 다닐때 선생님께서 숙제 검사를 한다고 말 할 때 학생의 반응을 보면 검사하지 않아도 이미 이 학생이 숙제를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있다. 숙제검사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두렵지 않는다. 오히려 숙제 검사를 하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숙제를 하고 안하고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숙제를 성실하게 한 학생은 숙제검사 시간이 오히려 기다려진다. 하지만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에게는 이보다 더 피하고 싶은 시간이 없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불은 중의적 표현이다. 하나는 심판의 기능이고, 하나는 정화의 기능이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하며 살아간 이들에게는 정화의 기능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태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거룩하게 하는 기능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이 땅에서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다시말해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심판의 불로 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게서 불로 심판하시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 50절에 예수님이 자신이 온 세상에 임할 심판을 위해 받아야 할 죽음의 세례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문자 그래도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의 정화를 얻게 되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49절의 불과 50절의 세례는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51절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신다. 누가복음 12:51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예수님 자신이 이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쟁이 생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 하면 평화의 왕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참 평화가 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정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화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쟁으로 번역된 원어의 뜻을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분쟁으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분배하다, 조각으로 나누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나누어지다, 분리되다’ 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 할 수 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분리하려고 왔다.” 그러기에 지금 예수님은 앞에서 말씀하신 불과 세례에 연결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분리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과 이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족은 어떠한 공동체인가? 가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초의 공동체이다. 그와 동시에 그 어떤 공동체보다 친밀함을 유지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도 있다. 그처럼 가족은 끊어질 수 없는, 끊어져서는 안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누가복음 12:52–53 (NKRV)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절대 끊어져서는 안되는 그 가족이 예수님을 향한 마음에 따라서 분리되고 갈라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가족과 같은 가깝고 친밀한 관계일지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느냐 안하느냐로 인해 갈라지고 대립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잘 따르려 할 때 우리의 삶속에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갈등과 대립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과 대립의 대상이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 나와 멀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같이 끊어질 수 없는 끊어져서는 안되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와같이 말씀하신 이유는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그 삶이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상황이 닥쳐 올 때에 이것으로 인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너희의 마음을 굳건히 하여서 주님이 가신 그길을 잘 따라오라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넓혀서 본다면 단순히 인간관계의 대립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고난하고 힘듬과 어려움이 닥쳐 올 때에도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몇번씩 드린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복받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복 받았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환경가운데 감당 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 내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길을 가는 그 싸움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주님의 말씀이 버겁게 다가올 지라도 내 생각과 내 경험을 내려놓고 잠잠히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분명히 약속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신실하신 주님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신다.
이미 주님은 주님의 길은 넓고 큰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임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길이 점점 좁아지고 험란해지고 어려워지는가? 그러면 지금 주님의 길을 잘 가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그 가는길을 포기 하지 말길 바란다.
그러기에 주님이 오신 것이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쟁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이 말씀은 주님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이 지금 상황과 환경가운데 지쳐있는 성도님에게 위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가 이처럼 처절하게 또 철저하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54-57절에 말씀을 보면 당시에 기후 현상을 통해 날씨를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가 지금 어떤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풍이 불어오면 지중해 지역에서 습기를 머금고 있는 구름으로 인해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남쪽에는 사막이 위치하고 있기에 남풍이 불어오면 사막에서 발생한 뜨거운 열기로 인해 더워질 것을 예상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현상인 것이었다.
이처럼 날씨도 하나의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예측 할 수 있으면서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게 분명하게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데 왜 그것에 대해서는 왜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수많은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시대에가 얼마나 악한지에 대해 듣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 메시지대로 우리가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너무나도 악한 시대에 살아가면서 그것에 대해 대비하기는 커녕 악한시대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더나아가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해서 마치 오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57절에 “어찌 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말해 우리의 수고와 애씀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했으면 기도한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애씀과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을 듣고 읽었으면 듣고 읽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애씀과 수고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구원은 절대로 우리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환경가운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인해 낙심이 될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 주님 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안나와도 기도에 자리에 있는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도가 할 수 없으니 더욱더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버티는 애씀과 수고가 있어야 하는것이다.
그래서 58-59절에 주님은 재판장 앞에 서기 전에 화해 하기를 힘써서 옥에 갇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최후 심판의 날을 향해 나가는 모든 이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서기 전에 홰개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심판 받기 전까지 해결애햐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주님앞에 서기 전까지 우리의 삶을 늘 되돌아보며 살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이 말씀이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와 감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기도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 오늘도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온전히 살아가는 하루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허락하신 삶의 터전에서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히려 주님의 심판이 기대가 되어 기다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셔서. 오늘 하루도 나의 상황과 환경의 상관없이 온전히 주님으로 인해 기쁘고 감사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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