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탄치 않음 중에 당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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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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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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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걷지 못하는 형제의 인생을 축복 가운데로 인도하는 기적 이후, 복음전파의 사역은 순탄하게 흘러갈 것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도는 감옥에 갇힙니다. 예상치 못한 난관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모든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우리도 분명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할때, 항상 순조롭고 형통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럴때, 믿음이 흔들리고 낙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과 이유 없는 비난을 만날때, 어떻게 해야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 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 순탄치 못함 앞에 “Beef” 하지 않기
1. 순탄치 못함 앞에 “Beef” 하지 않기
“인간” 이라는 단어에는 꽤 다양한 함의가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 관계를 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눈에 띄는 부분은 사도들을 반대하고 그들의 사역을 가로막은 이유 입니다.
“싫어하여”
앞에 내세우는 어떤 논리나 이유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저 싫은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모르겠고 싫은 것입니다.
분명 옳은 일이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 받은 길이고 하나님이 사명을 주어 세운 사람이라 하여도 그냥 싫은 것입니다.
이들은 왜 그렇게 사도들과 그들이 하는 일이 싫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위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계파
제사장-사두개파
서기관, 율법사, 랍비- 교사
바리새파-율법주의,전통주의자
사두개인은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고 부활이나 내세나 천사 등 영적인 세계를 부인 했습니다. 오직 현세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 했다는 말이 여기서 기인 합니다.
사도행전 4:2 (KRV)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왜 그들은 백성에게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 했을까요?
백성들이 부활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원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카스트 라는 신분제도를 유지 하기 위해 인생의 네 가지 목적을 제시 했고 그것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힌두교의 4가지 인생성취 과제
다르마(dharma)-종교, 정의, 의무
목샤(moksa)- 해탈, 해방, 고행
아르타(artha)- 재물
까마(kama)- 욕망, 성적욕구
그들의 윤회 사상은 지배층인 브라만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지 현세에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살면서 어떤 시도도 무의미 하니 그냥 종교적 의무 잘 지키고 재물이나 많이 모으고 즐길것 원없이 즐기다가 때가 되면 성지 순례나 고행하면서 살다보면 한 평생 지나간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는 시셋말로 성전은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때가 되면 제사를 지내러 왔고 성전 내에서 많은 이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들에게 부활의 도를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은 눈엣 가시였을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성전 관련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의 출연은 그들의 순탄했던 비지니스에 걸림돌이 었습니다.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선한 일을 했는데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맙니다.
사두개인과 두 사도 서로에게 걸림돌이고 난관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두개인의 자리에도 두 사도의 자리에도 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은 그들을 가뒀고 적의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두 사도는 순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불평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차이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최근 한 넷플릭스 드라마가 미국의 방송시상식에서 골든글러브 3관왕을 차지 했습니다.
한국 감독에 한국계 재미교포 배우로 유명한 스티븐 연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Beef” 한국어 제목은 “성난 사람들” 입니다.
“Beef” -짜증내다 불평하다 충돌하다 갈등하다
탄탄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운전하면서 만날 수 있는 빌런을 주인공도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 합니다. 평소 같았다면 그냥 넘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주인공에게는 나쁜 일이 겹치는 날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참지 못하고 평소에는 하지 않을 복수를 하게 됩니다.
작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의미 심장한 드라마 입니다. 특히, 이 드라마의 많은 등장 인물들이 이민자이고 특히, 한국계 이민자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드라마 내용 중에 3세대 미국한인 이민자들이 등장하는데, 성공하여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생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한국적인 정서의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가 어느날 전 여자친구를 따라 한인 교회에 가게 되고 예배 중에 순간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의 열정적인 신앙 덕분에 초신자 임에도 교회사람들은 그를 응원하고 호의적으로 대합니다. 전 여친의 남편은 교회의 찬양리더이자 젊고 신실한 성도 입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을 전도하기 위해 호의적으로 그를 대하다가 어느날 부터 그를 뒤에서 욕하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열심히 섬기던 찬양 리더 자리도 주인공에게 밀려나고 모든 관심이 주인공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시기가 나서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응 해야 할까요?
만약 내가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의 남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내가 주인공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논리로는 설명이 가능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 낯선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두개인 처럼,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옥에 가둬야 할까요? 뒤에서 그들을 깍아내리고 흠집내야 할까요?
잠깐은 상대가 깍아 내려지는 것같아도 사실은 그런 험담을 하고 다니는 나의 가치만 갉아먹을뿐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제시하는 행복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상대를 컨트롤 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컨트롤 하는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너무 미워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상담사는 미워하는 감정에 집중하지 말고 당신이 좋아하는 일과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시간을 가져 보라는 제안을 합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조금 쉬고 옛 친구도 만나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마음 속에 내가 그렇게 까지 분노 하고 미워 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배우자와 대화하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내기를 더디 하십시오.
화내기 전에 한번만 숨을 내쉬고 들여 마시고 무슨 얘기인가 들어 보십시오.
사두개인과 성전관련자들은 두 사도가 말하는 가르침과 부활의 도가 무엇인지 자세히 들어봐야 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 감정과 이권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아주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상반되게 두 사도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입니다.
평정심을 넘어 너무나 당당하게 대처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미 이렇게 될줄 알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사도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중 호의적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관계 2:7:1 법칙
인간관계 2:7:1 법칙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솔직하고 진솔하게 살다보면
2명은 나를 싫어하고
7명은 무관심하고
1명은 나를 좋아한다는 법칙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나를 미워하고 더 적은 수의 사람만이 나를 공감해준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도 이 법칙에 해당하는 하는 사람들 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숙명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길은 순탄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할때가 있습니다.
분명 옳은 길이지만 선한 의도로 행했지만 고갑게 보는 사람들과 우리를 막아서는 역경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악물고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내 차에 흠집을 내고 달아났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 하시겠습니까?
심지어 의도적인 테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쟁이" 이렇게 낙서를 하고 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겠지만 이를 악물고 하늘을 보고 오늘 받은 말씀과 예배의 은혜를 떠올려야 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때문에 은혜로운 주일을 망칠 수 없습니다. 다만 경찰에 신고하고 일을 해결할 방법은 찾겠지만 감정에 휘둘려서 “성난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기뻐하라는 말은 이를 악물고 기뻐하라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기치 않은 불행과 부침을 만날때,
나를 가로막는 사람들을 만날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숨을 깊히 들여 마시고 그 일의 진행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습니다.
만약 내가 사두개인의 입장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매몰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필요 합니다.
반사적으로 화를 내거나 공격으로 여겨 반격하기 보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마저 쉬고 기도 하는 것이 기독교인 이라면 훈련해야 합니다.
2. 진실의 순간
2. 진실의 순간
그렇다면 그 순탄하지 않고 예기치 않은 불행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하며 견뎌야 할까요?
결론 부터 말씀 드리자면, 그 시간을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두 사도에게 종교지도자들은 묻습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종교지도자들을 통해 두 사도에게 날아온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권세로, 뉘 이름으로 …?
이 질문은 그 질문을 누가 하느냐 보다 그 질문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론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 것인가?
내가 지금 까지 잘 살아온 것일까?
이런 질문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를 찾아 옵니다.
그럴때, 우리는 스스로를 감옥같은 고독한 곳에 머물게 하고 진실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고 있지?
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살고 있지?
나의 헌신과 선행은 무엇을 위한 것이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목회와 교회의 모든 사역에는 수시로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3 가지 전치사로 되어 있는 질문
“모든 은혜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주어진다”
(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in the Holy Spirit)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동되어 시작하였는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지?
성령의 인도하심과 힘주심 안에서 하고 있는지?
교회 뿐만 아니라, 가정과 개인의 삶도 마찬 가지 입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응답으로 모든 중요한 일을 시작하는지?
모든 선한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지?
나는 성령의 인도 안에 살고 있는지?
항상 질문 해야 합니다.
두 사도는 이 질문에 대해 확신을 얻습니다.
이윽고, 성령에 충만하여 대답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누구의 권세와 뉘 이름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달아 죽인 나사셋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로 그 형제가 건강하게 되어 지금 너희 앞에 서 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어서 구약성경 시편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가 버린 그분이 예수다 선포 합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 이라는 것을 선포 합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어떻게 갈릴리 어부가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들 앞에서 그것도 감옥에 갇힌 신세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의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언변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었기에 힐난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그들이 예수와 동거동락 하던 제자가 분명했고
지금 그 나은 사람이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 입니다.
알맹이가 있어야 당당하다
알맹이가 있어야 당당하다
대제사장과 성전 맡은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은 두 사도에게 댓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권력자고 종교인이지만 그들은 변질된 신앙과 알맹이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기때문 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제사장 안나스등의 사람들은 아론의 후손도 아니고 돈을 주고 대제사장 자리를 산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두개인들에 대해서는
렉헴 성경 사전에는 사두개인을 부르는 명칭에 대해 말합니다.
번지르르한 것을 추구한 이들(Seekers of Smooth Things)"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철저한 삶이라도 있었지만 사두개인들에게는 그저 유명세와 권력에 따라 상황따라 기회주의적을 움직일뿐 영적인 아무 유익나 실천 또는 그 어떤 업적을 세운 것이 없었기 때문 입니다.
반면에 두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3000명, 5000명 그리고 걷지 못하던 자가 고침 받는 등의 역사가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냐?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가 회개 하였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 의 문제 입니다.
알맹이가 있으면 당당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 할때도 들려줄 수 있는 기도응답의 경험이나 간증이 있어야 더 능력있는 전도가 되는 것을 경험 하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육을 받아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안나스나 가야바 또는 사두개인들 보다 이 신학공부도 하지 않았고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하지 않았던 두 사도를 예수님의 제자로 증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겉으로 화려한 하지만 신앙의 깊이나 하나님에 대한 진솔한 헌신이 없던 그들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 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깊히 이해해야 하는 자리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지위의 높음 보다 하나님의 뜻이 지금 어디에 누구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뼈아픈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면 회개의 기회가 되고 진실의 순간을 맞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였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이자 투자자인 짐 로저의 수행비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도 탈북자 출신의 여성 입니다. 처음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때,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답니다. “한국에 하버드 나오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나 입니까?”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북을 했다는 점에서 존경스러웠고 그래서 당신에게 배울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 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라도 배울 수 있는 겸손함이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 종교지도자들이 이 두 사도와의 만남과 눈 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과 5000명의 회개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겸손히 받아들였다면 어뗐을까요?
종교지도자들은 번드르르 한 신앙을 버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결론
결론
우리는 오늘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중에는 호의적인 사람과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고 존경하는가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옳게 살고 있는가? 선을 행하고 있는가? 가 더 중요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롭게 살아갈때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하게 흔들림 없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서 봅시다.
내가 선한 길을 걷고 있는지 아뢰어 봅시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앞에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살아갑시다.
이 시간 기도 하겠습니다.
겉이 아닌 내면이 성숙한 사람으로 성잘 할수 있게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닮은 사랑과 용서와 배려와 관용이 있는 영혼의 성품으로 다듬어 주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