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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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3:23-38
“예수님의 족보”
2024. 4. 2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예수님의 족보”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단락인데요. 족보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무슨 가문의 누구누구의 아들이다” 이것이면 끝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직업이 뭔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이런 정보는 필요 없이, 그냥 그 사람의 족보 하나면 설명이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족보가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오는데, 특별히 복음서에는 두 개의 족보가 나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에 나오고, 또 하나가 바로 오늘 누가복음의 족보입니다. 이 두 개의 족보는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다른데요. 하나씩 비교를 하면서 찬찬히 살펴보자면, 첫번째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의 차이점은 족보의 위치입니다. 마태복음은 족보가 맨처음에 나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러면서 족보가 쭉 나오죠.
이처럼 마태가 족보를 맨앞에 기록한 이유는,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와 혈통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먼저 예수님의 혈통을 오픈함으로써 예수가 정당한 왕권의 계승자이자, 구약을 성취할 메시야라는 사실을 시작부터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확 집중이 되겠죠. ‘야,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어? 다윗의 자손이었어?’ 하고 집중해서 마태복음을 읽게 될 겁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언제 족보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 족보가 나와요.
오늘 본문 23절을 봐 볼까요? 2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아멘.
마태복음과 다르게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 족보가 등장합니다. 특별히 이때 예수님의 나이가 삼십 세쯤 되었다고 덧붙이고 있는데요. 전통적으로 삼십 세는 제사장이 직무를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된 나이이고, 다윗이 왕위에 오른 나이입니다. 또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나이입니다.
이처럼 삼십이라는 나이는 성경에서 본격적으로 어떤 사역을 시작하는 나이로 기록이 됩니다. 그래서 그 전통을 따라, 예수님도 삼십 세쯤 되어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갑자기 스토리를 일시정지 하고, 뜬금없이 족보가 나와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으니까,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촥촥촥 나와야 될 텐데, 그게 아니라. 갑자기 족보가 뿅 하고 나온 겁니다.
여러분, 왜 누가는 족보를 여기에다가 집어넣었을까요? 마태복음처럼 맨처음에 넣지 않고, 왜 하필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는 이 시점에 족보를 넣었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오늘 본문 23절을 다시 보면, 족보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죠.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족보를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끝에 누가 나옵니까? 아담이 나오고, 그 위에 하나님이 나와요. 예수님의 족보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결국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사람들이 알기로는 예수가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는 사실이죠.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고, 그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었어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내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선포 바로 뒤에, 하나님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나오는 거예요.
자,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이 내려왔어요. 그리고 땅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족보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아브라함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오죠. 하지만 누가복음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땅에서 올라가는 족보가 교차되면서 예수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증명이 되는 겁니다. 어느 한 쪽만의 주장이 아니라, 하늘과 땅 양쪽에서 교차검증을 함으로써 분명한 사실로서 인증이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의 혈통을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사역은요, 사람의 사역이 아니에요. 사람이자 하나님,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분의 사역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것을 위해서 족보를 여기에 넣은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복음의 족보가 마태복음의 족보와 다른 점은 족보의 명단입니다. 족보에 나오는 명단이 달라요. 먼저 그 갯수부터가 다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총 마흔두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마흔두 명.
사실 이 명단은 누락된 이름이 많아요. 마태가 일부러 몇몇 이름을 빼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정당한 왕권의 계승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유대인 특유의 숫자상징을 집어넣어서 족보를 기록했어요.
마태복음 1장 17절을 봐 볼까요? 마태복음 1장 17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아멘.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씩 세 파트로 나눴죠. 14 곱하기 3이니까 총 42명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열네 대씩 이름을 나눴는가 하면, 14라는 숫자가 유대인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글자는 알파벳 순서대로 각 글자마다 숫자를 하나씩 상징하는데요. 우리말로 하면 이런 겁니다. 기역은 1, 니은은 2, 디귿은 3, 리을은 4. 이런 식으로 글자마다 각각 상징하는 숫자가 있어요.
특별히 히브리어 알파벳의 네번째 글자가 “달렛”이라는 글자인데, 네번째니까 당연히 숫자 4를 상징하겠죠. 그리고 여섯 번째 글자가 “와우”라는 글자인데, 이것은 당연히 숫자 6을 상징합니다. 자, 그런데 이 글자들을 “달렛, 와우, 달렛” 순서로 붙여서 단어를 만들면, 이 단어가 사람의 이름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돼요. 화면을 한번 띄워주시겠습니까? 화면에 보시면 이런 모양인데요. 히브리어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어요. 오른쪽부터 달렛, 와우, 달렛. 히브리어가 있고, 그 밑에 각 글자가 상징하는 숫자가 있죠.
자, 이게 누구의 이름인가 하면, 바로 다윗의 이름입니다. 히브리 발음으로 하면 “다위드”라고 발음이 돼요. 이 이름의 알파벳 숫자가 4, 6, 4. 그래서 유대인들이 다윗의 이름을 보면, 자동적으로 그 숫자가 같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걸 다 더하면 몇입니까? 다 더하면 14가 돼요. 그러면 당연히 14라는 숫자도 같이 머리에 떠오르겠죠. 마태가 열네 대 씩 계보를 나눈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의도적으로 다윗의 이름이 떠오르도록 계보를 편집한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태가 족보를 난도질을 하고 왜곡한 것은 아니에요. 실제 족보에서 몇몇 이름을 빼기만 한 겁니다. 숫자에 맞추려고.
실제로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가문의 족보를 기록할 때 중요하지 않거나 문제가 많은 조상들의 이름을 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계보의 기억상실”이라고 불러요. 계보의 기억상실. 계보에서 일부러 이름을 빼서 잊혀지게 만드는 겁니다.
마태가 그런 작업을 한 거예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기 위해서 다윗의 이름이 가진 숫자, 14에 맞춰서 족보를 편집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이름이 총 마흔네 명 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이해가 되시죠?
자, 그런 반면에, 누가복음의 족보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에는 총 77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하나님까지 포함하면 78명이에요. 마태복음이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니까, 아브라함부터 비교를 해보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명단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다윗부터 달라져요. 마태복음은 다윗부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까지 스물여덟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다윗부터 요셉까지 마흔세 명이 나와요. 이름이 열다섯 명이나 차이가 나죠.
한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첫째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태가 실제 계보에서 몇몇 이름을 누락시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누가복음의 족보가 예수님의 외가쪽 계보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가쪽 계보가 아니라 외가쪽,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했어요.
오늘 본문에 다시 보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죠. 그런데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라고 되어 있어요? 23절 끝에, “요셉의 위는 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리. 여러분, 헬리가 누굴까요?
마태복음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돼있거든요?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생뚱맞은 이름이 나와요. 야곱이 아니라 헬리. 헬리가 누굴까? 여러분, 헬리 들어보셨어요? 헬리는 헬라식 발음인데요. 히브리식으로 발음하면 엘리가 됩니다. 엘리. 그런데 헬리나 엘리나,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굴까?
여러분, 헬리는요, 요셉의 장인어른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아빠예요. 마리아의 아빠 헬리를 요셉의 위에 기록한 겁니다. 그래서 요셉 다음부터 이름이 달라요. 어디까지 다른가 하면, 다윗까지 다릅니다.
여러분, 다윗의 아들이 누구죠?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기로는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에요.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됐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 나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달라요. 누가복음은 다윗 다음에 나단이 나옵니다. 나단. 오늘 본문 31절을 봐 볼까요? 3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다윗의 아들이 나단이라고 기록을 했어요. 실제로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 맞습니다. 나단 선지자 아닙니다. 동명이인이에요. 나단은 솔로몬의 형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여 결혼을 하고,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네 명 낳았어요. 그 중에 셋째가 나단이고, 넷째가 솔로몬입니다.
바로 여기서 계보가 갈라지는 거예요. 왕권을 계승한 솔로몬의 계보가 쭉 내려가서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까지 내려가는 것이고, 솔로몬의 형 나단의 계보가 내려가서 마리아의 아버지 헬리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서로 다른 계보가 기록되었기 때문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해가 되시죠?
물론 이것을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의 반반으로 나눠져요. 절반은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절반은 그게 아니라, 계대 결혼의 전통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을 해요.
계대 결혼이 뭐냐면, 형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그의 동생이 형의 자식을 낳아주기 위해서 형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동생이 형을 대신해서 형의 자식을 낳아주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형의 유산을 그의 아들과 그의 아내가 물려받고, 가족의 계보가 이어지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형수하고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실제적으로는 내가 낳은 내 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형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족보에 적용하면, 야곱과 헬리가 사실은 한 형제지간이었다는 말이 돼요. 그런데 헬리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죽었어요. 그래서 동생인 야곱이 헬리의 아내와 결혼해서 헬리의 아들을 대신 낳아준 거죠. 그 아들이 바로 요셉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이 실제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기 때문에, 누가가 그 법적인 계보를 따라서 헬리의 계보를 기록했다, 라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목사님들 간에도 의견이 나눠져요. 헬리가 마리아의 아버지라는 주장과 헬리가 계대 결혼을 통한 요셉의 아버지라는 의견. 대체로 이 둘로 의견이 나뉩니다.
제가 CBS성서학당을 보니까, 외국인 교수님이 나와서 계대 결혼으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참 존경하는 베이직교회의 조정민목사님도 계대 결혼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야곱이 헬리의 동생이었고, 그 아들 요셉은 법적으로 형의 족보에 올라간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첫번째 의견이 맞다고 봅니다. 헬리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버지다. 헬리는 요셉의 장인어른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두 가집니다. 첫번째는, 만약에 헬리와 야곱이 한 형제지간이라고 한다면, 그 위에 족보가 일치해야 돼요. 한 형제라면 아버지도 같고, 할아버지도 갖고, 조상이 같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족보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죠. 마태복음은 솔로몬으로 내려오고, 누가복음은 나단으로 내려오거든요. 한 형제라면 어떻게 조상이 다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말이 안 돼요.
두번째 이유는, 누가복음의 족보가 나오기 전에, 분봉 왕 헤롯을 책망한 내용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해요.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분봉 왕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한눈에 반해서, 강제로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삼은 일이 있었어요. 제수씨를 자기 아내로 삼은 거죠. 이것을 세례 요한이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다가 감옥에 갇히고, 결국에 목이 잘려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뜬금없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직전에 들어가요.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그 뒤에 족보가 나오는 겁니다. 자, 세례 요한은 형이 아내를 취한 것을 책망했어요. 그런데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가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서 만들어진 족보라고 한다면, 굉장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이상해요. 굳이 헤로디아의 사건 바로 뒤에 계대 결혼으로 만들어진 족보를 기록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저는 헬리가 요셉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아버지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물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제가 전문적으로 유대인들의 족보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다 보니까, 제가 모르는 다른 내용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제 나름대로 연구한 바에 따르면,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였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대로, 헬리가 마리아의 아버지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들어요. 도대체 왜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했을까? 왜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솔로몬의 계보를 기록하지 않고, 계승권이 없는 나단의 계보를 기록했을까?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만 모르는게 아니라 아무도 몰라요. 왜 누가가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했는지. 이유를 안 써놨기 때문에. 그래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다양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윗 다음에 일부러 왕이 아닌 나단의 계보를 기록해서, 그 계보에 쭉 왕이 없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이 왕으로 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했다, 라고 말을 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 기록된 “여자의 후손”으로서의 예수님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이 말씀을 우리가 흔히 “원시복음”이라고 부르는데요. 최초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을 한, 원시적인 복음이다, 그래서 원시복음이라고 불러요. 이 말씀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예언하고 있죠. 이 여자의 후손이 바로 그리스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기 때문에, 누가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했다고 학자들이 주장을 하는 겁니다.
이밖에도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요. 뭐가 맞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뭐가 맞는지, 우리가 더 깊이 파헤칠 필요는 없어요.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픕니다. 우리는 그것보다는 오늘 본문에서 다른 것에 집중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보가 아담까지, 그리고 하나님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이에요. 마태는 아브라함이 끝이지만 누가는 아브라함을 넘어가요. 아브라함부터 셈까지 기록을 하고, 다시 셈부터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아브라함부터 셈까지 기록된 족보는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셈의 족보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셈부터 아담까지의 족보는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의 족보와 일치해요. 그러니까 노아는 창세기에 기록된 족보를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바로 이것이 누가복음의 족보의 핵심이에요. 누가는 창세기에 기록된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을 아담까지 연결을 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인 것을 넘어, 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였어요. 일평생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이방선교사역을 충실하게 도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누가의 모든 관심이 바울과 같이 이방선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겠죠.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고 나서도, 그 뒤를 이어서 계속해서 이방선교에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선교의 일환으로 기록한 책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에요. 이 두 책은 모두 로마의 고위관료인 데오빌로 각하를 위해서 썼어요. 누가가 데오빌로를 전도했을 겁니다. 그리고 데오빌로에게 더 확실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 차례대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써서 보낸 겁니다.
누가는 바로 이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이 유대인만의 메시야가 아니라, 혈통을 넘어, 국경을 넘어,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데오빌로 당신도 구원하신다는 그런 확신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이제는 아담을 넘어, 그 위에 누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나와요. 예수님이 아담의 아들만이 아니라, 그 위에,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연결이 되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아들은 아담이었지만, 그러나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연결이 끊어졌어요. 그래서 아담부터 쭉 이어지는 계보는 더이상 하나님의 자손이 아닙니다. 그냥 인간 아담의 자손이에요.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이 이 땅에 나셨습니다. 그 분은 약속대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분의 거룩하신 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끊어졌던 계보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어요. 첫 사람 아담에게서 끊어졌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통하여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멘.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은 사람은 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면서 하나님, 하나님이면서 사람인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 그 자격을 가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족보가 그것을 보증하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시켜주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4장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
이것이 바로 불변의 진리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십니다.
누가가 족보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대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혈통을 넘어 온 인류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시키신다는, 이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다른 이름은 없어요. 예수님만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본분에 맞게, 날마다 거룩하게,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