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감격이 희소한 시대를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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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서론]
여러분, 최근에 깊이 감동받거나 감격한 적이 있으신가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오랫동안 앞을 가렸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유튜브나 틱톡, 인스타같은 SNS의 아주 짧고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에 익숙합니다.
순간 재미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오랫동안 보거나 들으면 굉장히 지루해 합니다.
도파민은 과잉되고, 주의력은 결핍된 세상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은 지루하고 허무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짜 감동이나 감격을 받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얕은 감동과 감격을 받을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그 순간만 지나면 잊혀져 버립니다.
그러나 진짜 감동과 감격을 받으면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 남습니다.
심지어 삶의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을 바꾸기도 합니다.
연극, 오페라, 음악회와 같은 공연에는 커튼콜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말그대로 공연이 끝나고 커튼이 닫혔는데 다시 연주자를 불러낸다는 의미입니다.
관객들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다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공연이 좋았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기계적으로 커튼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뮤지컬을 봤는데 끝나자 사람들이 무조건 기립박수를 치더라구요.
오페라나 음악회에서는 그게 국룰이 아니거든요.
요즘 음악회에서도 커튼콜을 예의상 2번 정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형식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기억될만한 커튼콜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입니다.
그녀는 195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토스카 역으로 무려 16번의 커튼콜과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녀의 공연에 감동하고 감격했으면 그랬을까요?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찐 감동과 감격이 희소한 시대입니다.
피상적인 감동과 감격, 형식적인 감동과 감격이 만연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삶을 바꿀만한 감동과 감격을 어디서 찾을수 있을까요?
[본론]
1-2절입니다.
1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마음을 다하여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여라.
2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시인 다윗은 주님을 찬송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령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다윗은 마음을 다해 찬송하라고 스스로에게 선포합니다.
개역개정을 보면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주님을 찬송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냥 입으로만 찬송하라는게 아닙니다.
내 오장육부, 손과 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송하라는 말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는게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기만큼은 그렇게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찬송하지 않을수 없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자신이 가지고 계신 것중 하나, 두개를 인색하게 나눠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주시는 분입니다.
혜자도 이런 혜자가 없습니다.
3-5절입니다.
3 주님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
4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해 주시는 분, 사랑과 자비로 단장하여 주시는 분,
5 평생을 좋은 것으로 흡족히 채워 주시는 분, 네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할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효과가 다윗에게는 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결핍과 고통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강도이자 삶의 암덩어리입니다.
이런 죄가운데 고통받으며 살아가는게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꿔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 평생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마치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새 힘을 주십니다.
예전에 제가 필리핀에 있을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어떤 한국분이 예배에 오셨는데 온 몸이 용문신이었습니다.
인상도 얼마나 무섭게 생겼던지 ‘그것이 알고싶다’같은 곳에서 나오는 분 같았습니다.
알고보니 한국에서 조폭 행동대장이셨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알고보니 한국에서 불법 오락실 사업하다가 다 망하고 이혼까지 하셨답니다.
그 후 날마다 술에 쩌들어 살다가 입에서 피를 몇번 토하고는 그냥 한강에 떨어져 죽으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래도 죽기 전에 필리핀에 있는 형 얼굴 한번 보고 죽어야겠다고 해서 필리핀에 온 것입니다.
그 날도 형이랑 교회 가서 한식을 얻어 먹으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놀랍게도 그 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분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살아야할 이유를 찾으셨고, 망가진 몸과 마음도 점차 치유되셨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컸던지 나중에는 한국에 돌아와 지하철을 돌아 다니면서 전도까지 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극적인 경험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 시편의 다윗처럼 찬송할수 없는 것일까요?
6절입니다.
6 주님은 공의를 세우시며 억눌린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변호하신다.
이 시는 왜 다윗의 시일까요?
저는 6-14절을 읽으면서 이 시가 다윗의 노년에 쓰여진 거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으막에 자신의 삶을 하나 하나 돌아보면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의 삶은 초반에는 굉장히 억울한 삶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 형들에게 천시받았고, 궁에 들어가서도 장인인 사울왕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광야에서 10년 넘게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를 핍박하던 사울왕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결국 다윗을 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억울하지 않게 그의 삶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십니까?
이 사실이 가장 위로가 되어야할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편하고 손해보는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정의로운 재판관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우리의 삶을 보상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옳은 길만 걷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자주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만으로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 심지어 숨은 생각과 마음까지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렇게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있을까요?
7-8절입니다.
7 모세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 주셨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님의 행적들을 알려 주셨다.
8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한 쪽은 정의의 손이지만 다른 한 쪽은 사랑의 손입니다.
한 쪽이 아버지의 손이라면 다른 한 쪽은 어머니의 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손이 정의의 손밖에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평생 죄를 짓지 않고 살았습니까?
그 역시 왕이 되고나서는 교만하고 자만하여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밧세바와 관련된 최악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자식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형제간의 살육이 일어났고, 심지어 아들 압살롬은 반역하여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런 콩가루 집안이 어디있습니까?
만약 그가 지은 죄에 따라 하나님이 심판하셨다면 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비참하게 죽을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의 집안과 그의 나라는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킬때마다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이 붙잡은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아닌 어머니의 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그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 그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했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죄는 정말 최악의 죄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에 포기하고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그때 모세가 잡은 손이 바로 어머니의 손입니다.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 어떤 비구니 한분이 등장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인데도 산에서 밤새도록 삼천배를 드리는 여성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사정을 들어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미스코리아 출신에 사업도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모든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한지 4년만에 갑자기 남편이 죽었고, 사업도 IMF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멀쩡하던 하나 뿐이 없는 아들도 알수 없는 병으로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이 꼬이다보니 그 모든 원인을 자신의 죄에서 찾았습니다.
모든게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해서 이런 고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믿는 신은 어떤 신입니까?
아무리 빌어도 용서도 잘 안해주고, 저지른 죄보다 더 심하게 벌하시는 분 아닙니까?
평생 죄책감에 휩싸이게 만들어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게 하는 신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9-13절입니다.
9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10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12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13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는데 인색한 분이 아닙니다.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히시는 잔인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만큼 똑같이 보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12절에 나온 것처럼 동쪽과 서쪽이 얼마나 멉니까?
그런 것처럼 우리의 죄를 저 멀리 완전히 치워버리시는 분이십니다.
13절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처럼 여겨주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때릴때 어떻게 때리나요?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식을 죽도록 때리나요?
너무 공포스러워서 두번 다시 잘못하지 못하도록 인정사정없이 때리나요?
부모는 자식을 때리더라도 자식이 맞은 자리에 약을 발라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는 경험했을까요?
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죄인이 저주받아 죽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죄없는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달려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을 직접 십자가 형벌에 처하셨습니다.
창조주의 아들이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모든 저주와 죽음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혹시 요즘 찬송하는 우리의 입이 힘을 잃고 버벅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냉랭해지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감격을 잃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무뎌졌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잊어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 깨달을때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14-16절입니다.
14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16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어, 그 있던 자리마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말해줍니다.
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알수 없는 티끌같이 연약한 인생입니다.
한 때는 꽃을 피우지만 금새 지고마는 들꽃처럼 쏜살같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입니다.
아무리 힘이 세고 능력이 있어도 결국 노쇠해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사라지고 나면 곧 잊혀질 인생입니다.
우리의 사정이 이런데 우리가 하는 찬송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한낱 지나가는 노랫소리처럼 듣지 않으실까요?
17-18절입니다.
17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고, 주님의 의로우심은 자손 대대에 이를 것이니,
18 곧 주님의 언약을 지키고 주님의 법도를 기억하여 따르는 사람에게 이를 것이다.
연약하고 허무한 인생이지만 역전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합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의 육체가 소멸해도, 우리가 잊혀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영원한 방부제가 들어 있습니다.
홀로 남겨졌을때는 우리의 인생만큼 허무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때 우리 인생은 영원한 보물이 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그 분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사랑을 나만 누릴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누려야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다윗은 이제 더이상 혼자만 찬송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이런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기를 바랍니다.
19-22절입니다.
19 주님은 그 보좌를 하늘에 든든히 세우시고, 그의 나라는 만유를 통치하신다.
20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힘찬 용사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1 주님의 모든 군대들아, 그의 뜻을 이루는 종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2 주님께 지음 받은 사람들아,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곳에서 주님을 찬송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다윗은 이제 모든 피조물들에게 찬송하라고 선포합니다.
다윗은 감동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사들, 그들이 힘찬 용사들이고, 모든 군대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런 존재들에게도 다윗은 찬송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명령합니다.
그 분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와 선교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다카포 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공연을 본 후에도 예의상 형식적으로 커튼콜을 합니다.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러줍니다.
내가 돈주고 본 공연인데도 그렇게 합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자격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이름에 합당한 찬사를 올려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가 공연중에 보이는 그런 형식적인 찬사를 하나님께 드릴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송하라!
세상 모든 피조물들아 주님을 찬송하라!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이런 감동과 감격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달라집니다.
지루하고 무의미해 보이던 것들이 모두 새롭게 보입니다.
삶을 바꿀만한 가장 깊은 감동과 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찬송을 주님께 날마다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