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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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대적들은 '나사렛 이단'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예수쟁이'처럼 모멸감을 주는 이름으로 불렀거나 무시했을 것입니다.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구별할 뿐 아니라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에 대해 새겨 볼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회심하기 전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라는 이름으로 구분되었던 사람들이 회심 후에 하나의 동일한 이름으로 일컬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이 이전의 구분된 이름들, 즉 이전에 유대인 혹은 이방인이라는 차별적인 출신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나라가 일제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을 당했지만 저는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이라는 사회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조선 말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애를 먹고 쉽게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양반과 상놈, 천민이 어떻게 한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통치아래 있음으로 인해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을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이 땅에 일제강점기를 통해 신분이 철폐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믿음의 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사회에서의 직분과 관계없이 교회 안의 직분으로 불립니다. 밖에서는 직장 상사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역으로 집사로서 장로를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직분이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는 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장로와 안수집사 그리고 집사로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계급적인 구조를 낳기 때문입니다. 직분에 대한 문제는 한국 교회가 깊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적어도 직분을 순수한 봉사직분으로 여기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고, 주님과의 관계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하였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제자들이 자신들을 자칭 '플라톤주의자(Platonist)'라고 칭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랑스러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러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지만, 어떤 위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라는 그분의 칭호를 따라 주어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따라서 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늘 고백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례에 복종하였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그 존귀한 이름이 조금도 비난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휘하에 자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는데 이 병사는 겁쟁이로 알려졌습니다. 이것이 알렉산더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그 병사를 불러서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의 태도를 바꾸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무어라고 말씀하실까요? "네가 내 이름을 높였도다"라고 칭찬하실까요 아니면 "네가 내 이름을 욕보였구나 앞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실까요?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면 비록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때문이라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과 상대방 모두 그리스도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스라엘에 큰 기근이 들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가난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정부에서 주어지는 공적인 구호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들은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를 위해 힘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부유한 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그리스도인을 돕는 것에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물론 믿지 않는 가난한 사람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늘 구제하였기 때문에 믿는 자들 중에는 가난한 자가 없었습니다(행 4:34,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기복신앙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기복신앙의 중심 기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물질적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물질적 복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잘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라도 받은 것입니까? 메튜 헨리는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장사하는 상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상인들이 먼 곳에 있는 지역에 물품을 보내어 이득을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멀리 있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풂으로써 하늘나라 창고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가르치지 않기에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머리가 곧아 교만해지고,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님들 모두 부요한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그 부요함으로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진정한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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