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손길(막5: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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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6, 42절

신자나 비신자나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1초에 200번 검색하는 질문이 있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하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찾고 있는 것 이죠. 외국에 속담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호 속에서는 불신자가 없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 절대자를 찾는 것은 인생의 기본적인 기본 모드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찾죠,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우리가 물을 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어려움과 낙심과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라고 우리가 물어볼 때가 참 많습니다.
일전에 설교 가운데 초대교회가 받았던 고문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굶주린 사자에 밥이되고, 자기가 보는 눈 앞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죽고 처형을 당하는 그런 고통 속에서 초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데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시는 건가요? 하나님 왜 도대체 침묵하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위기와 고난의 상황 속에 들어가는 걸 원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나에게 하십니까 라는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지 않거나, 내가 생각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우리 주위에 있는 환경들이 나로 하여금 그런 질문을 하도록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여러분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상황 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 전체가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답답하고 외부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의식들이 있는 반 기독교적인 증세가 굉장히 세졌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좀 주십시오 라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올려 드릴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명한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마가의 샌드위치 구조라고 마가복음에는 대표적으로 6개의 샌드위치 구조로 된 본문이 있는데 그 중에 잘 알려진 본문 중에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샌드위치를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생각하며 먹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왜 샌드위치냐 하면 야이로가 자신의 딸 12살 먹은 딸이 죽어가는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그 딸을 살리는 이야기 속에 12 해의 혈류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그 예수님을 만짐으로 인해 소망으로 회복된 이야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두 이야기가 한꺼번에 들어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읽을 때 그 여인에게 딸아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믿음의 이야기를 하셨고,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음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 본문의 주제는 믿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믿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걸가요? 마가의 샌드위치를 하나씩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 말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1절,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유대인 지역으로 다시 들어오셨는데 거라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의 귀신을 내쫓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22절에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야이로 라는 이름의 뜻은 깨닫는 자, 빛을 바라는 자 라는 뜻으로 회당장과 매우 어울리는 이름이고, 성경에서 이름을 밝히고 있는 만큼 아마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근데 그가 지금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렸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회당장은 종교 지도자 혹은 사회 지도자입니다. 답답한게 없는 사람입니다. 보통은 종을 시켜서 불러도 되는 그런 지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직접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3절에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여러분 ‘손을 얹으사’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여기까지가 샌드위치에 첫 번째 부분에 해당 되는 부분입니다.
지금 야이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야이로에 대해 어떤 느낌이 좀 드십니까? 종교 지도자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절박한 마음으로 엎드려서 절합니다.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관습에서 나름대로의 경계선을 넘어서 자신의 지위와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볼까요?
샌드위치에 가운데 부분을 보겠습니다. 25절 말씀 본문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자가 있어 라고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데 마가가 26절에서 27절까지를 굉장히 급하게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26절, 27절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대는 그 장면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대기 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26절부터 27절까지 6개로 나눠서 설명을 합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이 여인이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낭비를 하였고, 효험이 없었고, 더 악화가 되었고, 27절,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의 뒤로 왔고 드디어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손에, 그리스도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28절 말씀을 보시면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그 여인은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앓았던 병은 혈루병입니다. 그 당시 혈루병은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단절을 만드는 부정한 병 이었습니다. 가족과도 헤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이 병을 가졌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그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 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도 경계선을 넘어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굴레를 넘어서 믿음의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계속 진행 되는데 여기서 잠깐 끊고 가겠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병이 얼마나 많은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 질병을 분류한 분류로 보면 병이 2만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우리는 다 이미 경험했습니다. 바이러스 하나만 해도 3년 동안 수 많은 사람이 연약하게 쓰러졌고, 우리 모두에게 큰 어려움을 끼쳤다는 사실을 잘 기억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시면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아니면 이름이 있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여인이라 할지라도 상황은 서로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야이로는 12살 난 딸의 생명이 중단되지 않고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손길을 요구했고, 이 12해 혈루병 앓은 여인은 그 지긋지긋한 12년을 이제 좀 중단했으면 좋겠다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손을 대었습니다. 병명을 알거나 모르거나 어른이거나 아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인생은 다들 나름대로 어려움들이 다 있습니다.
근데 이 두 명의 공통점이 뭘까요? 나름대로의 경계선, 사회적인 지휘와 종교적인 굴레를 넘어서, 경계를 넘어서 지금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주님의 손길을 요구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나왔을 때 나름의 경계선을 넘고 여기까지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의 고비를 넘게 되면 이상하게 우리 마음속에 조금의 안정감을 취하려고 하는 안전망과 경계선을 다시 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제 주님께 절박하게 와서 주님의 손길을 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 앞에 절대적인 소망을 가지고 나오기가 힘이 듭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지 않는 이유는 마음 속에 교만이 있다는 겁니다. 주님 앞에 하나의 경계선을 넘어서 주님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여기에 내 나름대로 안전망을 치고, 경계선을 쳐서 여기에 머물려고 하는 습성들이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그 첫사랑의 감격에 감사하고 신앙생활을 해오고는 있지만 어느 순간 안정감을 누리고, 다른 경계선을 쌓아갑니다. 과거에는 종교 없음에서 넘어서 예수님께 나아왔는데 이제는 종교적인 것으로 안전망을 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손철주라는 미술 평론가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깔끔한 인생은 없다. 그런 인생이라면 거짓 인생이다.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신앙생활을 여기까지 해오시면서 우리가 깔끔해졌습니까? 마음속에 더 답답함이 있고 더 알아야 겠고 더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게 사실 아닐까요? 하나님 나는 지금도 무력하고, 지금도 무지하고, 지금도 주님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는 내 자신에 대한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는 사람만이 지금도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손길을 바라는 그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안전망과 경계선을 넘어서 어떤 모습이든지, 사회지위를 막론하고, 어떤 종교적인 경험과 내용들이 있든지 간에 나는 주님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한 사람 이라는 사실입니다. 겸손히 나오실 수 있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손길을 바라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샌드위치를 먹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었던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 나간 것인줄 아시고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 돌이켜 말씀 하시되 자 이제 보십시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31절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이게 무슨 이야기 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많은데 손을 대기는 누가 됩니까? 다 대였겠죠 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알고 계셨으니 옷에 누가 손을 대었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32절 예수님이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그 여인이 두려워서 엎드립니다. 왜 엎드렸을가요? 부정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이겠지요.
그때 34절에 주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왜 공적으로 불러일으켜서 이 일에 대한 대화를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말씀을 준비하며 묵상해보면서 이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우선순위,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야이로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데 무명의 한 여인이 자신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여인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을 부를 아버지라도 있었죠. 그런데 가족과 단절된 그녀, 누구도 그녀를 옹호해 줄 수 없는 그 여인의 가치를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 되지 않습니까?
그 수 많은 무리들 가운데 가장 주님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여러분 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영적 우선순위, 주님은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는 한 영혼을 지켜 보고 계시고 그 옷자락에 손 댄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구원되었고 평안히 가라 네가 건강할지어다.’ 육체적인 회복도 있지만 저는 이 말씀 중에 딸아 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딸아 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꼭 이 여인에게만 딸아 라고 불렀습니다. 가족과 단절되었던 그 여인에 육체의 회복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회복과 하나님과의 회복과 총체적인 회복을 주님께서 주시기 위해서 그녀를 일으키셔서 더 깊은 사랑으로, 더 깊은 믿음의 확증과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 주님께서 그 여인을 불러 일으키신 줄 믿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밀쳤지만 주님께서 인정하는 손길은 이 여인의 손길 이었습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다 틀렸다가 아니라 정말 주님께서 이 시간, 이 시대 가운데 주님이 인정하시는 주님을 향한 손길이 정말 여러분에게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자기생각, 자기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비록 작은 믿음이지만 주님을 신뢰해서 경계선을 넘어서 주님의 옷에라도 손을 대려고 하는 그 절대적인 신앙의 간절함이 우리 가운데 있는지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님께만 우리의 온전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분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려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작고 연약한 한 영혼, 옷자락 믿음 같은 작은 믿음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더 깊은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언제나 연약하고 나약하고 소외된 자에게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삶 속에서 총체적인 회복으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그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 지금도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주님께 이 음성을 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이제 샌드위치 구조의 끝부분으로 가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시죠? 야이로와 같이 가는 가운데 혈루병 여인의 사건으로 지체가 되었습니다. 마치 자녀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가는데 길이 막힌 것과 똑같은 상황인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앞부분에서 제가 기억해 보라고 했죠. 야이로가 예수님께 원한 것은 예수님이 와서 주님의 손으로 손을 얹어서 낫게 해주시는 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혈루병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낳게 하였다는 그 말씀이 어쩌면 야이로에게는 굉장한 소망의 말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대가 컷겠죠. 잘 될 수 있겠다 생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35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 회당장 야이로 집에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말합니다. 그만하십시오. 예수님을 이제 괴롭히지 마십시오 이미 딸이 죽었습니다 라고 전합니다. 그때 36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이 말씀에 저에게 너무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두려워 말고 뭐하라고요?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주님께서 옆에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느껴지시나요? 야이로가 좌절하고, 낙심하여 거기서 멈출까 봐 주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야이로에게 말씀 하고 계신겁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두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부터 야이로에게는 믿음의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참 재밌는 것은 이 본문 이후에 야이로는 단 한마디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데요 멈추지 않고 예수님만 따라 가는데 항상 예수님께서 먼저 하시고 난 다음에 따라가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함께 집으로 갔고, 예수님게서 울고 있는 자들을 다 쫓아보내시고 잔다라고 이야기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할 때에도 야이로는 아무런 반응하지 않고 40절 41절 말씀을 보시면 야이로의 부모와 3명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그 방에 들어갑니다. 어떻게 되었죠? 달리다굼, 일어나라 손을 대시고 붙잡으시고 세우실 때 야이로는 열 두해 동안 죽어가는 혈루병 여인이 살아나는 기적도 봤지만 죽었던 자기 딸이 살아나는 엄청난 회복을 야이로는 보게 되었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면서 여러 가지 기대와 여러 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지만 때로는 야이로가 경험한 것 같은 지체됨, 지연되는 것들을 경험할 때도 있고 우리가 생각할 때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인간적인 절망을 경험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때마다 이 말씀을 좀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에게만 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본문 앞에 4장 보시면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우리가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십니까 라고 제자들이 외쳤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두려워 말고 무서워 말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라고 주님께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야기가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신뢰를 끝까지 놓치 말라 라는 말씀입니다. 힘들지만 계속해서 믿음의 선택을 해달라는 주님의 부탁입니다.
처음 너희가 이 자리에 올 때 가졌던 그 믿음을 끝까지 놓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선택을 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며 지체된다 할지라도 그 지체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우리들의 성도의 삶의 끝이 비극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그 일들이 있다는 그 믿음의 선택을 해달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믿음은 온전히 주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시대가 아무리 힘들고 세상이 여러분을 아무리 조롱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믿음의 선택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선택하며 주님 따라서 선택 하나 하나 해 나가겠습니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먼저 우리에게 위대한 주님의 손길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 29절, 34절을 보시면 마가가 ‘병에서 놓였다’ 라는 말을 쓰는게 참 독특합니다. 마가가 이 단어를 쓸 때 병이라고 우리가 번역을 해놓았지만 성경을 쓴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마스틱스 라는 채찍질 이라는 뜻입니다. 여인의 병이 채찍질이죠. 마가는 여인에게만 썼고 독특하게 한명에게만 이 단어르 씁니다. 누굴까요? 마가복음 10장 34절, 세상이 채찍질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썼던 단어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아픔을 주님께서 대신해 바꾸셨죠. 여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소외감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피를 흘린다는 단어를 이 혈루병 여인 말고 또 누구한테 썼을까요? 마가복음 14장 24절 ‘이르시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 피로 부정했던 우리가 정결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리심을 당함으로 우리가 딸이 되었고 우리가 가족이 되었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라는 말은 부활의 용어입니다. 마가복음 16장 6절에 그가 살아나셨고, 에게이로 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쓴 단어입니다. 그 분이 생명의 주인 되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하여서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영원한 주님의 손길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여러분이라면 비록 내가 작은 믿음이지만, 옷자락 같은 믿음이지만 주님 앞에 나와서 지금도 주님께 손 대기를 사모하고 절망적이고 지체된 상황속에서 하나님 어디에 계시나요? 라는 질문이 나온다 할지라도 믿음의 선택으로 주 앞에 와서 주님의 옷자락에 손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대심으로 부정했던 우리가 정하게 되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대심으로 죽었던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면 이제 여러분들이 이 세상 속에 주님의 손길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런 믿음의 고백과 선포가 여러분의 입 속에서 나오고, 여러분의 손이 예수님의 손길이 되어서 구석구석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우선순위를 줬던 주님의 그 마음을 담아서 격려하고 붙잡아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뿐 만 아니라 여러분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주님이 손이 되고 손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소외되고 어렵고 힘들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주님의 손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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