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8 주일오후예배: 민수기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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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민수기 21:4-9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가 어느덧 강도사가 되어 공적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요. 부족하지만, 이 종을 통하여 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시간이 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인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로 숫자에 관련된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도 ‘백성 민’에 ‘셈 수’를 써서 “백성을 계수한 것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민수기를 읽을 때 다들 지루해 하시지 않으신가요? 주구장창 어느 지파에는 몇 명인지 말하면서 이게 왜 기록된 지도 모르겠고, 내가 무슨 의미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래서 한 해를 시작할 때 “올해는 반드시 성경 일 독을 하고 말리라”라고 다짐하지만, 율법이 등장하는 출애굽기 35장부터 시작해 각종 제사에 대한 규례를 지나 각종 제사에 대한 규례가 등장하는 레위기를 읽으면서 졸다가 겨우 버텨내고 민수기에 도착했을 때 이제 고비를 맞이하면서 성경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민수기의 의미와 뜻을 알고나면 풍성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되는데요. 민수기가 백성을 계수하는 내용도 있지만, 백성을 계수하는 것만 있진 않습니다. 민수기에는 다른 내용도 기록되었는데요.
여러분은 혹시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도 화나는 일입니다. 특히나 그 사람이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일수록 배신감을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에게 엄청 잘 해줬는데, 그 사람이 나의 뒤통수를 칠 때에도 우리에게는 배신감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배신을, 그리고 가장 쎄게 뒤통수를 맞으신 분이 계시는데요.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에 백성을 계수하는 내용 외에 기록된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반역의 역사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중에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그 반역의 역사 중에서 가장 정점을 찍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오늘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응답,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수기 11장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거역하고 불순종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들에게 질병을 내리시고, 전투에서 패배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처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직전 장인 20장에서 출애굽 1세대이며 미리암과 아론이 죽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죄를 지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하나님께서 내리셨다는 이야기가 전환점이 되어 이스라엘 진영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계속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다가 오늘 본문의 앞 절인 1-3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랏 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진멸하였고, 그곳을 완전히 멸하였다고 해서 호르마라고 불렀다는 긍정적인 정복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또 오늘 본문 이후인 10절부터는 시혼 왕과 옥 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요단 동쪽을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긍정적인 정복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정복 이야기 사이에 오늘 본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했지만, 다시 하나님께 반역하고, 반역했으나 다시 정복하게 되는 이야기 구조가 바로 21장입니다. 이 구조를 통해 민수기 저자인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반역을 했으나, 그 속에서 희망을 함께 보여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앞에서 말한 정복한 호르 산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는데 홍해 길을 따라 갑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요단 동쪽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코스가 있는데, 홍해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우회해서 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우회하는 이유는 4절에서 보여주듯이 에돔 땅을 우회하기 위해 그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20장 17절에서 이스라엘은 에돔 왕에게 에돔 땅을 그저 지나가기만 할테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하지만 에돔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에돔 땅을 우회하여 요단 동쪽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회하여 가는 만큼 여정이 길어지게 되었고, 결국 4절은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좀 더 와닿게 번역하자면 “참을성이 없어졌다”가 됩니다. 바로 우회하여 가는 길의 여정이 길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을성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악하고 믿음이 없는지를 모세가 고발하고 있는 말입니다. 모세는 불과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가데스에서 목 말라서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증을 채우시고, 호르 산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곧바로 여정이 길어지니 참을성이 없어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더 나아가 출애굽 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구름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고, 만나를 먹이시며, 므리바에서 물을 내셔서 갈증도 채워주셨습니다. 광야를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먹을 것은커녕 물조차 구하기가 굉장히 힘든 곳입니다. 이 곳에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마땅히 생각이 드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곧장 여정이 길어지니 참을성이 없어지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악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진 이스라엘은 5절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며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여기에서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말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이스라엘의 반역이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백성들이 원망하는 대상 중에 “하나님”이 있다는 겁니다. 이전에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는 원망은 많이 했었습니다. 매번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를 왜 데려왔느냐 그냥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라며 원망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직접 원망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게만 원망해도 큰 반역임에도 이제는 직접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고 말로 설명조차 할 수 없는 큰 반역입니까? 이 구절에서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원망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너무나도 심각한 반역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5절 히브리어 원문에는 “원망하다”가 직역하면 “말하다”인데, 이 동사의 형태가 민수기에서는 보통 하나님이나 모세에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용되며 이것은 민수기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용되는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바로 모세는 이러한 형태의 동사를 사용함으로 이스라엘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 반역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이 없다는 불평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므리바를 통해 갈증을 채워주시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이스라엘은 경험했으나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으며 전혀 우리를 위하지 않으신다는듯이 원망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라며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먹을 것을 주시고 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제 그런 것을 주셨냐는듯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지금 다 거부하며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음식과 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보고 “하찮은 음식”, 더 정확하게는 “역겨운 음식”이라며 원망합니다.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은 지금 이렇게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아무것도 없는 이 광야로 저희를 인도하여 죽게 하십니까? 당신이 도대체 뭐길래 저희에게 이러십니까? 이 곳에서 당신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긴 하셨습니까? 저희는 당신이 주신 이 음식이 역겹습니다.”
여기에서 “원망하다”라는 단어는 사실상 “대항하다”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바로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여,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마치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습으로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입니다. 출애굽 세대를 지나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도 전혀 나아진 모습 없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아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가 이스라엘입니다. 반역자가 되니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도 하찮고 역겹게 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마주하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고 싶어질까요? 지금까지 수없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원망해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세운 지도자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 직접적으로 원망합니다. 먹을 것을 수없이 주었지만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목말라 죽겠다고 물을 주었지만 물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준 음식이 역겹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이런 배은망덕한 놈들”이라며 분노하지 않을까요? 누가 이런 자들을 품어줄 수 있겠습니까? 선을 악으로 갚는 이런 자들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벌을 내리시긴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는 다르셨습니다.
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에게 반역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들을 보내셔서 이 불뱀이 물어 죽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여기에서 ‘불뱀’을 우리는 마치 실제로 불에 활활 타오르는 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진 않고 독뱀을 뜻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뱀에 물리면 독이 퍼져 피부가 새까맣게 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태우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하여 불뱀으로 부른 것입니다. TV에서나 실제로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독뱀에 물리면 피부가 새까맣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치 피부가 불에 탄 것과 같이 보인다고 해서 불뱀이라고 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독뱀들을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셔서 독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게되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 독뱀들로인해 이스라엘 진영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겁니다. 여기저기에서 독뱀들을 보고 경악하는 소리와 독뱀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독뱀에게 물려 독이 퍼져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찼을 겁니다. 성경엔 나와있진 않지만, 아비규환의 상태였던 것은 틀림 없었을 겁니다.
독뱀으로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게 됩니다. “아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구나. 우리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요청합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민수기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여러 차례 반역을 저지른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이 고통에 부르짖는 것이 민수기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반역하고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직접 고백하는 것은 민수기에서 딱 두 번 14장 40절과 이 본문입니다.
13장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열두 정탐꾼을 보내어 정탐하라고 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12명 중 10명은 확실히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가나안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라며 거인인 저 가나안 주민들 앞에 우리는 메뚜기이기에 우리는 이길 수 없으며 정복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14장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라며 진노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는 심판을 내리시고, 원망하는 백성을 벌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벌을 받은 이스라엘이 슬퍼하며 14장 40절에서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라며 오늘 본문과 같이 직접적으로 죄를 고백합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며 뱀들을 없애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에 모세는 이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모세의 이스라엘 중보자적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중보자로서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런 모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즉각적으로 해결해주시진 않고, 모세에게 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8절입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의 명령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놋으로 만든 뱀을 장대 위에 달아 이스라엘 진영에 세웁니다. 이게 그 유명한 놋뱀인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왜 모세는 놋뱀은 만들 것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놋뱀을 만든 이유는 불뱀이든 놋뱀이든 그것은 모세의 자유였고 둘 중의 어느 것이든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뱀이든 놋뱀이든 그것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낫는다는 ‘믿음’, 그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뱀이나 놋뱀 자체가 어떤 치료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불뱀이나 놋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불뱀, 곧 독뱀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었는데, 이번에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니 심판의 도구가 되고 구원의 도구도 됩니다.
또한 이것은 사실 우리의 이성, 그리고 현실적으로 본다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독뱀에 물리면 해독제를 쓴다던가 독이 퍼지지 않도록 독에 물린 부위를 절단하는 등 어떤 의학적인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산다니요. 독뱀에 물린 사람들은 독이 퍼져 엄청난 고통 속에 있었고, 물리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 또는 동료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내놓은 모세의 해결책은 고작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모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독뱀에 물려서 지금 죽겠는데, 현실적인 방안은 주지 않고 놋뱀을 보면 낫는다는 모세의 말을 믿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가족, 내 동료가 죽어가고 있는데, 놋뱀을 보면 가족이나 동료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것은 굉장한 믿음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없는 광야에서 해독제를 구할 수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놋뱀을 본다는 것은 곧 오로지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정말 놋뱀을 본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을까요? 9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놋뱀을 본 사람들은 독뱀으로부터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보지 않은 자들은 고통 속에 결국 죽었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봤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심각한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모습을 우리 자신에게 비춰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공급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언제 받았냐는듯이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 그리고 원망을 쏟아내진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제나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걸 눈과 피부로 경험하였지만, 길을 어쩔 수 없이 우회해서 가게 되었다고 참을성이 없어진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삶에서 조금만 불편하거나 고통이 찾아와도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내진 않습니까? 매번 먹는 만나가 물리고 싫증나버려서 역겹다고 말한 이스라엘처럼 우리에게 매번 은혜를 베푸시고 선물로 주시는 것들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주시지 않은 것들이 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대항하는 반역자의 모습으로 있진 않습니까?
기억해보십시오. 지난 날 우리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이것들이 싫증납니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라고 말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싫어하는 우리의 죄가 너무나도 비참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죄는 단순히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사실을 넘어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께 반역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밀어내고 그분을 적대시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너무나도 싫어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 저를 힘들게 하는 당신이 너무나도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형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독뱀에 의해 고통받으며 죽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싫어하고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독뱀에게 고통 당하며 죽게 내버려 두셔도 됐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채 그저 반역자, 그리고 폭도인 이스라엘을 고통 속에 두셔도 됐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무시하며 외면하셔도 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다시 한번 정말 미련할 정도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를 왜 데려왔느냐,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다, 우리에게 마실 것이 없다, 우리에게 이 음식이 역겹다, 하찮다 하는 등 불평과 불만, 원망만이 가득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놋뱀을 만드심으로 반역한 이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정말 끝이 없습니다. 자신의 백성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포기할 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바로 그리스도까지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르게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단 한번도 불평과 불만, 원망한 적이 없으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광야에서 계실 때조차도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계셨다는 것은 단지 오랫동안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40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있었던 40년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언제나 물과 음식을 제공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셨습니다. 이런 아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상황 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원망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은 이 놋뱀을 예수님이 언급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실겁니다. 바로 유대인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4-15 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본문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높이 들린 놋뱀을 본 자마다 생명을 얻었듯이 높이 들린 그리스도를 믿고 본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성취하십니까? 바로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하나님께 반역한 우리 때문에 달리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해 독뱀에게 고통받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받아야 할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가져가시고,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맞바꾸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40일동안 굶주리셨으나 단 한번도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으심으로 심판을 받아서도 안되고 받을 필요가 없으신 그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고, 하나님께 반역했기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는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17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만나와 므리바 물, 그리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이제는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확실한 증거인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기에 우리는 심판이 아니라 생명과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완전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40일동안 굶주리셨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마땅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으시나 하나님께 반역한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그리스도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더 완벽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떻게 변화가 될까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게 될 겁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순간 속에서도 나에게 있어서 불편한 일이 생기더라도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그분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묵묵히 걸어가게 될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는 가능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놋뱀을 봄으로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대적하는 반역자가 아닌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만을 따르고 그분께서 주신 것들에 감사하는 참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겁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순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나은 것 같이 인자를 쳐다본즉 모두 나으리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으나 우리는 그것이 역겹고 하찮다며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반역자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반역이 아닌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