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넝쿨 보다 귀한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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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니느웨의 악행만을 문제 삼았습니다.
요나 처럼, 죽어도 용서 못할 원수는 분명 존재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죽여서 까지 원수를 갚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생명을 다루는 방식 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해도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요나는 자신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죽이시지 않으십니다.
요나 4:2 (KRV)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오히려 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박 넝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 성내는 요나임에도 타이르시고 깨달음의 기회를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니느웨가 어떻게 되나 지켜보기 위해 초막을 짓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그런데 햇볕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은 요나가 뜨거운 햇살에 괴로워 하자 박 넝쿨을 준비하십니다.
조금 전 까지도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며 성내던 요나가
또한 씩씩대며 니느웨가 어떻게 되나 초막을 짓고 지켜보던 요나가 햇볕 가리게가 생겼다고 금새 기뻐하였다는 것은 참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합니다.
하루가 그렇게 지나 다음날이 되어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 박넝쿨을 씹어 먹게 합니다.
그늘은 사라지고 다시 햇볕이 머리 위에 비춰 괴로운 지경이 됩니다. 요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또 죽기를 청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어려웠으면 그랬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은 지경 까지 요나는 곤두박질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 하십니다.
요나 4:9 (KRV)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가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사람의 감정은 갈대, 가벼운 존재감
사람의 감정은 갈대, 가벼운 존재감
사람의 감정과 기분은 이 처럼, 밑도 끝도 없습니다.
이유와 논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주어지는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박 넝쿨이 햇볕을 가려주면 기뻐하다가
박 넝쿨이 없어지면 또 죽겠다고 하는 것이 가볍디 가벼운 인간의 감정 입니다.
요나는 선지자 이지만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요나를 쓰시려는 걸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누가 알겠습니까?
단, 확실한 것은 한번 선택하여 쓰기로 한 사람은 능력과 성품이 어떠하든지 쓰신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점을 채워서라도, 만들어서 라도 쓰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우리의 감정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없어지는 박 넝쿨 입니다.
그 당시에는 마치 목숨이라도 걸것 같이 성내다가도 결국 금새 수그러드는 것이 감정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서운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화나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물론 자기의 감정에 솔직한 것은 중요합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하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요나의 솔직함은 하나님이 그를 돕기 쉽게 했습니다. 가식을 떨고 진심을 숨기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지만 이 감정이라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변화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요나가 감정에 휩싸여 한 일들을 되집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하고 거기서 물에 빠저 스올의 배속에 들어가서 사흘을 살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와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죽여 달라고 떼를 씁니다. 결국 니느웨가 망하나 안 망하나 초막을 짓고 내다 보는 옹졸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이 감정입니다.
차 안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결국 그 욕은 나 자신에게 하는 얘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 차에는 나만 있기 때문 입니다. 나를 화나게 한 상대는 듣지 못합니다.
감정 보다 더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니느웨에는 인생의 길을 잃고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가축들과 같은 다른 생명들도 있습니다.
나의 감정 보다 나의 자존심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을 살리는 사역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나를 묵상하며 주님 저의 감정 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하소서. 기도하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