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음1:12(전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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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됨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존재가 어려우니 자녀가 된다는 부분부터 살펴보면 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양권은 ‘자녀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죠.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으니까 하나님을 보통 남성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해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초기에 선교를 하신 분들이 ‘아버지’ 하니까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육신의 아버지를 모시고 봉양하는데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죠. 거기에 더해서 아버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육신의 아버지와 자녀의 촌수가 꼬이는 것이죠. 특히 이런 하나님의 자녀된다는 의미에서 모두를 ‘형제’라고 하니까 기독교는 근본도 모르는 종교, 부모도 몰라보는 그래서 나라의 근본을 흔든다고 핍박을 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써 태어난다기 보다는 입양되어진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그러니까 출신 성분을 중요시 여겨 양반도 있고 평민도 있고 노예도 있는 당시에는 거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반 안에서도 서자라고 해서 우리가 잘 아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를 생각해보시면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죠. 지금도 여전히 ‘내 자식’이라고 하면 그 어느나라보다 끔찍한 관계를 갖는 것이 우리나라 아닙니까?
물론 성경의 배경이 되는 유대인들 역시도 아버지의 권한은 엄청났습니다. 이런 구조는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택하면서 그들에게 지켜야 할 법을 주셨고 그 안에는 부모에 대한 절대 복종을 가르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본문은 이어서 13절에 혈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에 인간사의 육체적인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장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조건을 제시합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보고 있는 요한복음에서 대부분의 대상이 유대인들이고 이들은 이미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죠. 이미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 또 다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이런 이해를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자부심을 갖는 이유와 그들조차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당시 그들 손에 성경은 구약 성경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 이후 제자들의 글과 사도 바울의 글이 합쳐져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66권이 완성된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집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님께서 역사의 현장에 오시기 전까지의 성경이고 신약은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후의 기록을 담은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았고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그런 내용이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고 오늘 요한복음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팔레스타인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30년을 목수로 3년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고 우리가 잘 알듯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을 이 땅에 더 있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래 역사 속에 있었다고 해도 그럴 수 있어 그리고 십자가에 죽는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살아 나셨다는 것이죠. 그렇게 40일을 여러 사람들과 보내시고 500여명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시는 장면은 신화다. 있을 수 없다. 어떻게 그러냐 하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질문은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당시의 사람은 이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눈으로 본 사람인 예수가 어떻게 우리가 믿는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기록한 내용이 구약 성경이었기 때문에 마치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거나 구약 성경을 무시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다. 선지자요 선생이라면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했다는 아주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구약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 삼으시고 그 증거로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규칙과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삶에 규칙이 있는 것이죠.
그런 그들에게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믿는 자들’을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나는 이런 이유로 이 글을 쓴다고 나중에 기록 목적을 밝혔는데 요한복음 20:31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을 믿게 하려는가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에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말함으로 ‘그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왜 믿는다면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앞서 여러분들에게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백성’입니다.
백성이라는 것도 구약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배경이 되는 내용은 출애굽기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고 하셨으며 이런 내용으로 언약/약속이라고 하는데 보다 정확한 의미는 ‘계약’을 맺게 됩니다. 계약을 맺는 긴 설명이 24장에 나오는데 내용을 정리하면 먼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 즉 지켜야 할 내용을 낭독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수락합니다. 출애굽기 24:3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리고 나서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를 합니다. 마치 계약서를 읽고 서로가 인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낭독한 후에 모세가 피를 취해서 제사를 드렸던 제단과 백성에게 뿌립니다. 출애굽기 24:6–8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렇게 피를 서로를 향해 즉 제단에 뿌린 것은 하나님을 향해, 백성에게 뿌리는 행위는 계약이 피로 맺은 약속이라는 것이며 약속이 깨어질 때는 피로써 값아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계약이 이루어지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백성이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니다. 출애굽기 24:9–11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는 놀라운 친교의 현장이 이루어진 것이죠.
그들이 거룩한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에게 주신 율례를 통하여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부모가 자녀가 올바르게 자라나길 바라지만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고통 당할 때도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그들에게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서 성전과 제사라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통해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옳으심이며 약속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인 신실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반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죠 신명기 6:25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그렇게 지키는 것을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사람의 입장도 이해하시고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그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행위인 제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연결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깬 것은 인간입니다. 약속을 깬 결과는 앞서 살폈던 것처럼 서로를 향하여 피로써 값아야 할 계약 청산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생명으로 빚을 갚아야 할 상황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마땅히 죽어야할 사람편의 빚을 대신해서 갚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은 유대인도 아니고 아주 멀리 떨어져 전혀 다른 민족으로 사는데 무슨 상관이 있냐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해서 그들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사면 주변에 많은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도 저렇게 살고 싶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죠. 예전 우리가 유럽을 구라파라고 불렀어요. 미국을 동경했어요. 생각해보면 유럽이나 미국을 동경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군인으로 여러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도 저런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양반과 평민과 노예가 살던 나라가 노예 제도를 없애고 왕이 통치하던 조선왕조가 여차저차해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지금에 이르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택한 민족이라는 자부심만 남았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뜻을 저버리고 살은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몇 차례 멸망을 합니다. 그렇게 사라질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이 있죠. 우리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신뢰할 만 한 사람’이라고 하듯 약속이 깨어졌으니 끝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다시 새로운 약속을 새우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33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언약은 그 전에 했던 약속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법을 돌판에 새겨 주셨다면 이번에는 ‘그들의 속에 두며’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신 것이죠. 우리 마음에 두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는데요. 에스겔 36:25–27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새 언약을 세우시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유대인들은 몰랐을까요? 유대인들은 자나깨나 ‘당신 생각’처럼 늘 ‘메시야가 언제 오시는가?’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메시야를 구약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거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전한 것이죠. 부모가 집을 비우고 아이들만 있을 때 이러저러한 부탁을 하면서 이걸 잘 지키면 아빠 엄마가 빨리 올거야 하면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 동안에도 잘 지키고 그러면 빨리 온다고 믿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잘지키면 메시아가 올 것이다라는 사고 속에서 살았던 것이죠.
그들이 학수고대 하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오셨는데 그들은 에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마치 모세가 이집트에서 구해준 것처럼 구해주고 다윗 왕처럼 이스라엘 나라를 아주 잘 되게 해줄 소위 말해서 정치적인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기 변두리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아무리 능력을 보이고 잘 가르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입니다. 18절은 요한복음의 전체를 아우르는 1-18절의 마지막 장식을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우리가 말하는 ‘독생자 예수’라는 호칭이 불려지는데 이것을 1-18절까지 선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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