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인가? 불순종인가?

요나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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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요나 3:1-5
“순종인가? 불순종인가?”
2024. 3. 15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순종인가? 불순종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한 순종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논지를 가지고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요나의 기도에 대해서 함게 살펴봤었는데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내가 저 깊은 바닷속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것이죠.
그런데 그 기도가 어떤 기도였습니까? 매우 불건전한 기도였어요. 기도의 내용도 실제 사건을 왜곡하는 내용이었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그 기도에 회개가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명령에 거역하고 도망친 일에 대해서 전혀 회개하지 않았어요. 그냥 나를 구해주신 것에 감사만 했습니다.
회개가 쏙 빠진 기도를 한 거예요. 그러면 과연 그런 기도를 한 요나가 지금 마음상태가 어떻겠습니까? 회개를 통해서 내 안의 쓴뿌리를 뽑아버려야 되는데,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속에 쓴뿌리가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순종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순종이 과연 감사와 기쁨으로 행한 순종이었는가?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께 순종의 세 가지 요소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순종의 3요소.
자,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봐 보겠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 말씀은 요나서 1장 1절과 형식이 똑같은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제가 요나서 1장을 설교할 때 이 말씀구절에 대해서 설명을 잠깐 드렸었죠. 일반적으로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이런 관용구를 쓴다고 했었어요.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그래서 오늘 본문도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된다는 것을 1절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물고기 뱃속에 있던 요나가 육지로 올라와서 새롭게 에피소드를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의 시작이 1장에서의 내용과는 완전히 달라요. 1장에서는 어땠습니까?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에 거역하고 도망을 쳤죠.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요? 순종을 합니다. 이 새로운 3장의 에피소드에서 요나는 순종의 모습으로 시작을 하는 겁니다.
자, 2절을 봐 볼까요? 2절에 보니까,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을 하시는데, 1장에서 하신 명령하고 똑같아요. 1장에서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라고 했어요. 뭐 똑같은 말입니다. 선포하라나 외치라나. 핵심은 가서 나의 말을 전달하라는 거예요.
1장에서는 요나가 이 명령에 불순종했어요. 그런데 3장에서는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순종했는가, 오늘 본문 절에 나와 있습니다. 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아멘.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갔습니다.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1장에서도 사실 요나가 일어나서 갔어요. 그런데 목적지가 달랐죠. 1장에서는 요나가 일어나서 다시스까지 도망치기 위해서 배를 타러 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갔죠. “니느웨로 가니라”
여기서 순종의 3요소 중의 첫번째 요소가 나옵니다. 순종의 3요소. 그 첫번째는, 바로 “방향”입니다. 방향. 여러분, 순종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가라 하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그 방향을 향하여서 가는 거예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갈 때 그 방향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갈 때, 비로소 그 방향이 맞았습니다.
이 올바른 방향을 가기까지 정말 온갖 역경을 거쳐 왔어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거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트터영화 같은 경험을 하고나서야 올바른 방향을 가게 됐어요.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1장에서 그냥 그때 니느웨로 향했다면 금방 끝날 일이었어요. 그것을 요나가 어렵게 만든 겁니다. 불순종하고 도망치다가 여차저차 해서 겨우 3장에 와서야 제대로 시작을 하는 겁니다. 이제서야 요나가 순종의 첫번째 요소인 방향을 충족시킨 거예요.
여러분, 이처럼 방향이 잘못되면 순종을 시작도 하기 전에 먼 길을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많은 시간을 허비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방향을 잘 잡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 뜻을 잘 헤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순종의 두번째 요소를 보겠는데요. 순종의 두번째 요소는 “실천”입니다. 실천. 실천을 국어사전에 보면, “생각한 바를 실제로 행함” 이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순종은 생각만 해서는 안 돼요. 실제로 행해야 됩니다.
니느웨로 가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는 거예요. 거기로 가야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만약에 안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또 모세를 부르시면서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 시키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안 갔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가지 않았다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겠죠.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역사도 일어나지 않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 시키는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생각만 해서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실제로 행동해야만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나는 행동했어요. “니느웨로 가니라” 비록 그곳이 원수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실천한 것이죠. 이것이 요나의 순종입니다. 순종의 두가지 요소를 충족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안타깝게도 마지막 세 번째가 충족이 안 됐습니다. 여러분, 이 세 번째가 무엇일까요?
자, 그 답을 듣기 전에 먼저 3절을 봐 볼까요?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3절에 보면, 니느웨를 소개하는데,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본래 1장 2절에서는 니느웨를 “저 큰 성읍 니느웨”라고 소개를 했었어요. 이처럼 계속해서 니느웨가 큰 성읍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3장 3절에서는 그 크기가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크다고 설명을 합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 당시의 니느웨는 굉장히 큰 성읍이었습니다. 이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의 인구가 약 3만명 정도였는데요. 그러면 니느웨는 몇 명이었을까요?
요나서 4장 11절에 보면, 그 숫자를 알 수가 있어요. 4장 11절에 보니까,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나 있다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는 어린아이를 뜻해요. 아직 제대로 좌우도 모르는 어린아이들만 십이만 명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른들까지 다 합치면 몇 명이었을까요? 대체적으로 어린아이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정도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12만 명 곱하기 5를 하면 전체인구가 나오겠죠. 그러면 니느웨 전체 인구는 대략 60만 명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가 3만 명인데, 니느웨는 그보다 20배가 더 많아요. 60만 명. 그러니까 여러분, 니느웨가 얼마나 큰 성읍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3장 3절로 다시 돌아와서 보면, 이상하게도 니느웨의 크기를 설명하면서 인구수를 가지고 설명하지 않고,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크다고 설명을 했어요. 이상하죠? 분명히 4장 11절에는 인구수를 가지고 설명을 했거든요?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나 있다고 하면서 사람 숫자로 크기를 설명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걸어갔을 때 걸리는 시간으로 설명을 합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단위를 통일을 안 시키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할까요?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겠죠.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굳이 니느웨의 크기를 설명하면서 사흘이라는 시간을 사용한 이유. 그 이유는 단지 크기를 설명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사흘 동안의 시간, 그 시간만큼 걸으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래야 니느웨 온 성에 말씀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에.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라면, 당연히 사흘 동안 걸어다니면서 선포해야 온 성읍 사람들이 다 듣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굳이 니느웨의 크기를 시간으로 설명한 이윱니다. 성읍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다니면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목적으로, 특별히 시간을 기록한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요나가 사흘 동안을 충성해야겠죠. 그런데 요나가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아요. 4절을 봐 볼까요? 4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분명히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인데, 요나가 하루 동안만 다니면서 외쳤어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요나가 충족시키지 못한 순종의 세번째 요솝니다. 순종의 세번째, 그것은 바로 “분량”입니다.
순종에도 분량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일을 맡기실 때에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분량이 있습니다. 그 분량을 채워야 돼요. 예수님이 혼인잔치 때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채워야 하는 분량이 있어요. 그 분량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사흘이라는 분량을 주셨어요. 사흘 동안 니느웨를 돌아다니면서 선포하는 것이 요나에게 주어진 분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그 분량을 채우지 않았죠. 아구까지 채워야 되는데, 절반도 아니고, 3분의 1밖에 안 채웠어요. 이것은 요나가 스스로 정한 분량입니다. 하루. 하루면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내가 할 만큼 했다. 이만큼만 해도 다 한 거다.” 스스로 만족했을 거예요. 그러나 스스로는 만족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반도 못 채웠으니까.
여러분, 순종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다 채워야 합니다. 하다가 말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출발을 했으면 골라인을 넘어야지, 반도 안 가서 돌아오면 상급을 받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정해진 만큼 해야 돼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예요. 주일에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에 왔으면, 예배가 마칠 때가지 온전히 그 자리를 지켜야 돼요. 중간에 나가버리면 그것을 주일성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봉사도 마찬가지. 내가 주일학교 교사로, 찬양팀으로, 봉사하겠다고 결단을 했다면 정해진 기간을 채워야겠죠. 1년이면 1년, 2년이면 2년, 끝까지 그 분량을 채워야 합니다. 교사가 힘들다고 중간에 그만두면, 그 반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거예요.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반에 낑겨 앉아야죠.
여러분, 순종에는 분량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줄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순종은 주어진 그대로를 실행하는 것이지, 내 판단대로 그것을 손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흘 동안 외치라고 하셨으면, 사흘 동안 외쳐야 돼요. 일주일 동안 외치라고 하셨으면, 일주일 동안 외쳐야 돼요.
그리고 그렇게 외침으로 인해서 어떤 역사가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그저 땅에 씨를 뿌릴 뿐이에요. 그 씨를 싹틔우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충실히 순종했음에도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을 내가 다 채웠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고, 그냥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반대로,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불완전한 순종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요나가 그런 경우죠.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나름대로 순종하긴 했지만, 그는 분량을 채우지 않았죠.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게 역사합니다. 순종의 분량을 다 채웠음에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다 채우지 않았는데도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어요.
오늘 본문 바로 밑에 5절에 보면, 요나가 선포하는 소리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즉각적으로 회개를 하잖아요. 5절에 보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기를 바라고 3분의 1만큼만 분량을 채웠지만, 놀랍게도 그것만 갖고도 니느웨 전체가 회개를 했습니다. 하루 동안만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사흘 동안 걸어야 할 만큼 큰 니느웨 성읍 전체가,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회개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순종의 결과는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고, 기대와 다른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에 연연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냥 순종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향하여서,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실천하면 됩니다.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제사가 안 중요하다는 게 아니에요. 제사도 중요하죠. 그런데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순종.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을 온전히 지키는 순종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온전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우리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잡고, 그냥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향하여서 실제로 시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시작한 그 일을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충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비록 그 순종의 끝에 우리의 기대와 다른 결과가 온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않고, 또다시 새로운 방향을 향하여서 끝까지 충성하며 달려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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