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명예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 views
Notes
Transcript
<수요설교>
누가복음 3:15-20
“예수님의 명예”
2024. 3. 27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예수님의 명예”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지금은 요한이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르침을 주니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요한을 비추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요단강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려와 있어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세리, 군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요한을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저 사람이 바로 메시야인가 보구나’ 라고 생각을 하겠죠. 오늘 본문 15절을 봐 볼까요?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백성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하고 심중에 생각을 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하면, 그들이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간절하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메시야. 히브리어로 하면 메시야, 헬라어로 하면 그리스도. 같은 말이죠.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요한이 나타나서 진노가 임박했으니까 회개 하라고 외치면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침을 주니까. 거기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까지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니까, 당연히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죠.
심지어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이렇게 욕을 하면서 책망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아니고서야 감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백성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요한이 겉모습이 범상치가 않아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맸습니다. 이 모습은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한 거예요. 열왕기하 1장 8절에 보면, 엘리야의 모습을 설명하거든요. 열왕기하 1장 8절에 보니까,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엘리야가 털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은 겁니다. 엘리야처럼 보이려고. 그리고 엘리야처럼 가죽 띠를 띠었어요. 그러니까 겉모습만 봐도 요한이 엘리야를 그대로 계승한 선지자라고 쉽게 연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볼 때, 요한은 겉모습도 범상치가 않고,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이 땅의 것 같지 않은, 뭔가 천상의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요한을 그리스도일 것으로 생각을 한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 그가 우리 앞에 계시구나!’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죠. 요한은 이미 그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겁니다.
요한도 그리스도가 언제 오시는지는 몰라요. 다만 진노가 임박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오시리라는 것만 알아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최선을 다해서 길을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세례를 베풀고, 회개를 촉구해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언제든지 주님이 오시면 바로 그 분께 넘겨드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바로 그 준비과정이 나오는데요. 1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아멘.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한이 무슨 말을 합니까?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말을 합니다. 백성들이 보기에는 요한도 참 대단해 보이는데, 그런 요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스도는 훨씬 더 대단하신 분이라는 거예요.
자, 요한의 말을 다시 보면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리스도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능력이 많다’는 말이 헬라어로 “이스퀴로테스” 라는 말인데, 이 말은 “강력한, 힘있는”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나보다 강력한 분이라는 거예요. 나보다 강력한 분, 나보다 힘있는 분.
그래서 나는 감히 그 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유대사회에서 신발끈을 푸는 일은 종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신발끈을 풀 수도 없다는 말은, 그 분의 종이 될 자격도 없다는 말이에요. 그 분이 어찌나 힘있는 분이신지, 나는 감히 그분의 종이 될 자격도 없다. 이런 말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가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이죠.
또 이어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지만,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겁니다. 성령과 불.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겁니다. 이사야 32장 15절에 보면,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을 했어요.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종말의 때에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황폐한 땅이 아름다운 밭으로 변화돼요.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죠.
에스겔도 이와 비슷한 예언을 했습니다. 에스겔 37장 5절인데요. 유명한 말씀이죠. 마른뼈가 살아나는 환상의 말씀인데요. 에스겔 37장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아멘.
여기서 생기가 바로 성령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라는 말이에요. 좀 전에 이사야서에 나온 영도 같은 말입니다. “루아흐”
또 이뿐만 아니라 느헤미야, 요엘, 미가, 학개, 스가랴 등 여러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예언한 내용이에요.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영을 부어주시리라’
그런데 지금 요한이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영을 부어주시는 분이다’, 라고 선포를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분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단순히 회복만 시켜주시는 분은 아니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만 세례를 베푸시지 않아요. 또 무엇으로 세례를 베푸십니까? 불로 세례를 베푸셔요. 불은 곧 심판입니다. 심판의 불이에요. 그것을 밑에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 17절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아멘.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리스도가 불을 내려서 태우신다는 거예요. 이 땅을 심판하는 것이죠. 그래서 나중에 누가복음 12장에서 가서 보면, 12장 49절에 예수께서 직접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셔요. 이 땅을 심판하러 오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거예요.
이처럼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 가지의 이미지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써 회복시키시는 구원자의 이미지와 불로써 심판하시는 심판자의 이미지. 이 두 가지 이미지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기대를 했겠습니까? 요한이 감히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감이 말도 못하게 커졌을 겁니다.
이 땅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 그 분은 도대체 언제 오실까? 모든 백성들이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요한은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요한이 요단강에서 쉬지 않고 사역을 하고 있어요.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요한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죠.
그런데 끝에 보면, 말의 뉘앙스가 갑자기 부정적으로 변해요.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뭔가 이 뒤에 부정적인 말이 오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정말로 부정적인 말이 나와요. 19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갑자기 뜬금없이 분봉 왕 헤롯이 등장을 하죠. 분봉 왕 헤롯, 이 사람은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장 5절에 보면, “유대 왕 헤롯 때에” 라고 시대를 설명하는데, 이 유대 왕 헤롯이 바로 헤롯 대왕이에요.
헤롯 대왕은 유대 땅에 메시야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2살 이하로 모든 남자아기를 죽이도록 명령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것 같으면 어떠한 끔찍한 일도 불사하는 그런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서 그의 세 명의 아들이 유대 땅을 각각 3분의 1씩 나눠서 통치를 했는데요. 그 중에 갈릴리 지역을 물려받아서 통치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분봉 왕 헤롯”입니다. 성경에는 아버지 헤롯이나 아들 헤롯이나 똑같이 헤롯으로 이름이 나와서 헷갈릴 수 있는데요. 유대 왕 헤롯이 아버지고, 분봉 왕 헤롯은 아들이다. 이렇게 기억을 하시면 됩니다.
자, 어쨌거나 19절을 다시 보면, 분봉 왕 헤롯이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일개 백성에게 책망을 받았어요. 권위에 도전을 받은 거죠. 이것은 유대 사회에서 “명예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명예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렸었는데요. 유대인들은 명예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누가 자신의 명예를 건드리는 것을 참지 못해요. 지금 요한이 헤롯의 명예를 건드리고 있거든요. 요한이 헤롯을 책망했는데, 이 책망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엘렝코”라는 말입니다. 엘렝코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헤롯을 비난한 것이죠. 이것은 헤롯의 명예에 정면으로 도전을 한 겁니다. 그러면, 명예에 대해서 도전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대응을 해야 돼요. 여기서 대응을 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집니다. 긍정적으로 반응하든지, 아니면 부정적으로 반응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무시하든지.
만약에 헤롯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요한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면, 그렇다면 헤롯이 자기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잘못한 것을 되돌리려고 하겠죠. 헤롯이 책망 받은 일들이 많은데, 그 중에 결정적인 것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이었어요. 이 일을 되돌리려고 했을 겁니다. ‘그래, 요한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반응했을 겁니다.
여기서 잠깐 이 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면, 헤롯에게는 형제가 여러 명 있었는데, 그 중에 빌립이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어요. 배다른 동생이죠. 그런데 어느날 빌립의 집에 놀러 갔다가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데려와요.
윤리적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거죠. 심지어 헤롯이 총각도 아니었어요. 헤롯도 그 당시에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를 쫓아버리고 동생의 아내, 그러니까 제수씨죠. 제수씨를 자기 아내로 데려온 거예요.
바로 이것을 요한이 책망한 겁니다. ‘어떻게 아내도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그것도 동생의 아내를 데려다가 부인으로 삼을 수가 있느냐?’ 아주 강하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그의 반응이 나와요. 20절에 보니까,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요한을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헤롯이 부정적으로 반응을 한 것이죠. 나의 명예에 도전한 요한을 내가 가진 권위로 짓밟아버린 겁니다. 그런데 헤롯으로서는 사실 이것 밖에는 선택지가 없었어요. 긍정적으로 요한의 말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무시를 할 수도 없습니다. 무시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개 백성에게 책망 받고도 아무 말도 못한 반푼이 왕이 되겠죠.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거예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좋든 싫든, 헤롯은 요한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정도가 조금 심하기는 합니다.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요한을 감옥에 가뒀어요. 뿐만 아니라 요한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5절을 봐 볼까요? 마태복음 14장 5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헤롯이 본래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지지를 하고 있다보니까,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을 위해서 춤을 췄어요. 그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 딸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딸이 뭘 달라고 하냐면,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어요. 황당하죠.
그런데 헤롯이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것을 어기면 자기 명예가 실추됩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죽이게 돼요.
결과적으로, 요한은 헤롯의 명예에 도전을 했고, 헤롯은 그 대응으로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그의 목을 자른 겁니다.
바로 이러한 끔찍한 사건을 오늘 본문에 누가가 넣어놨어요. 물론 오늘 본문에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는 것까지만 들어있죠. 하지만 어쨌거나 오늘 본문에 갑자기 헤롯이 등장하고,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내용이 들어가는데, 문맥상 이것은 너무나도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를 했으면, 그 뒤에는 당연히 그리스도가 등장을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요한이 신발끈도 풀 수가 없는 그런 위대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껏 기대감을 갖게 해놓고는, 뜬금없이 헤롯이 등장을 해요. 지금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그리스도를 비추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무대 위에 갑자기 헤롯이 올라온 겁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요, 요한의 말 다음에 곧바로 예수님이 등장을 해요. 마가복음도 마찬가지, 요한 다음에 바로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희한하게도 누가복음만, 요한 다음에 헤롯이 등장해요. 헤롯이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을 하필이면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바로 직전에 집어넣어 놨습니다.
이해가 안 되죠. 도대체 왜 누가는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굳이 헤롯을 집어넣었을까? 실제적으로 요한이 감옥에 갇히는 사건은 훨씬 뒤에 일어나는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시간순서와 관계없이 미리 여기서 말을 하고 있어요. 도대체 왜 누가는 이렇게 기록을 했을까? 분명히 이유가 있겠죠.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지금 이 땅을 통치하고 있는 자와 이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대조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보다 밝은 빛을 조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땅은 타락한 통치자로 인해서 너무나 어두운 시대를 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곧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환하게 빛나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싶은 겁니다.
영국 속담에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이 말은 지금이 아무리 어둡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뒤에 해가 뜨고 환하게 밝아지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마치 이와 같이, 헤롯이 지금 아무리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온갖 악한 일들을 범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뒤에는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의 의돕니다.
그 의도에 따라, 오늘 본문 21절에, 마침내 진정한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헤롯의 어둠을 걷어내시며, 무대 위로 등장을 하십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토록 바라며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 요한이 그토록 명예를 높여드린 그 분이 나타나신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비추고 있다가 잠시 헤롯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이제 진정한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비추기 시작해요. 자,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우리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께서 마침내 등장을 하셨는데, 예수님은 다른 백성들이 세례를 받으실 때 동일하게 함께 세례를 받으셨어요. 어떤 특권도 없이, 똑같이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요한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죠.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 저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나이까’ 이러면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누가는 과감하게 그 장면을 삭제합니다. 왜냐하면, 누가에게는 그 장면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거예요.
누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무대 위로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헤롯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이미 요한을 통해 명예가 부여된 예수님께 더욱 강력한 명예를 부여하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누가는 써내려가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개인이 명예를 얻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하나는 개인적으로 노력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명예를 얻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이미 명예를 가진 누군가가 그 사람을 지명하여 명예를 부여해주는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한으로부터 명예가 부여되고 있었어요. 그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도 감히 풀 수가 없다.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다.
계속해서 예수님께 명예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이제는요. 누가 명예를 부여해요? 하나님께서 명예를 부여하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저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지명하여 하늘의 명예를 부여하신 겁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명예는 없어요. 예수님을 위하여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할렐루야.
모든 백성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명예가 높아진 겁니다. 완전히 헤롯과는 반대죠. 헤롯은 일개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고 명예가 실추되었지만. 예수님은요, 하나님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명예가 높아졌어요.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의 명예를 보증하신 겁니다. 예수는 나의 아들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직접 아들이라고 하시는데,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을 심판하시고, 또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잠시 잠깐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는 예수님 앞에서 물러나고, 그분의 빛이 온 땅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인생이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둠 가운데 놓여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런 고난에 가로막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어둠 뒤에 새벽이 옵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듯이, 우리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밝은 빛이 비추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헤롯의 통치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비추인 것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에도 우리를 이 어둠 속에서 조명하시며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빛 되신 예수님의 은총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어둠이 깊을수록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며, 주님의 은혜를 더욱 바라고 기다리며,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