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장 6-7절(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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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된 당시에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기 위해서 쓴 서신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마게도냐 지방에서 가장 먼저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2절 이하의 말씀에서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치유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로 고발을 당해 붙잡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분명 억울한 상황임에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때 갑자기 발에 채운 사슬이 풀렸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일을 보고 자결하려는 간수를 전도하는 사건이 바로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일어난 일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인들은 이 서신을 받아서 읽을 때 빌립보에서 바울에게 일어났던 이 사건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바울이 옥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양을 부르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이들에게 바울의 권면이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겠습니까?
도대체 바울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고난의 시간과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충분히 염려하고 걱정해야 할 상황임에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믿음의 우등생이며 모범생인 사도바울만이 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말씀의 권면이 과연 우리와는 멀리 동떨어져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입니까?
너무나도 유명하고 친숙하고 익숙해서 노래로도 만들어진 이 말씀이 그냥 노래,, 좋은 명언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울리며, 여러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실재적인 위로와 권면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절 말씀을 보시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시 빌립보 교인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을 염려하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위해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전달하고 바울을 잘 보필 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더욱 악화 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로 가던 도중에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불안해 하고 염려와 걱정의 마음이 쌓여 갔습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을 잘 알고는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감사도 그냥 감사가 아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지금 빌립보 교인들이 감사할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이루어진 것도 없고 나아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에게 고난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쓸 때 없는 근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미래의 짐을 고민하며 스스로 괴롭히는 행위입니다. 바울의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에는 이런 일을 아무리 염려해도 소용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삶의 희노애락,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근본적인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라는 존재는 이런 상황들을 변화시키고 뒤집을 수 있는 주체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빨리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 아뢰라..고 전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야 다 내려놓고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려는 어떠한 시도를 버려야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고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CM 중에 광야에서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 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에 서 있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광야에 서 있게 하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붙잡을 수 없는, 의지할 수 없는 고난이라는 광야를 통해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며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누구를 의뢰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환란과 시련이 닥쳤을 때 우리는 누구를 신뢰하며 의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 아니면 사람이나 내가 가진 것들을 신뢰하고 있는지는 고난이 닥쳐 오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고난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사람을 찾고 술을 의지하고 내 방법과 생각과 능력을 고민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평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를 외치는 자입니다.
만약 고난이 닥쳐 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십니까? 그 분의 일하심을 의심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믿는 하나님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거나 하나님을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자들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은 고난이 찾아왔을 때만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모든 일을 강조합니다. 어떤 특정한 사건, 특정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리고 모든 일에도 기도와 간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때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그 일이 해결되고 나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마치 재해대책본부장 정도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아뢴다는 말은 수동명령형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말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항상 이야기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이 곧 내 인생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를 머리에 맞아서 미쳐서 그랬습니까? 그는 평소에 작은 것도 하나님을 의뢰하였던 자였기 때문에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들어 경주 근처에서 큰 지진이 여러 번 일어났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다 무너지고 난 뒤에 대책을 세우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리 지진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본은 지진나기 10초전에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미리 문자를 발송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건물을 지을 때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하고 건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고난과 환난이 닥쳐오기 전에 미리 미리 평소에 모든 일에 하나님을 만나고 의뢰함으로 준비하여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태풍과도 같고 집 채 만 한 파도와도 같은 고난을 버텨낼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크신 손 안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어떤 유익을 주십니까?
본문 7절은 6절의 권면에 대한 결과절로 사용됩니다. 6절에서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어서 7절에서는 6절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이런 유익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 유익은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기도와 간구로 아뢴다고 해서 고난의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과 환난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의뢰하자마자 / 6절과 같은 삶을 산다고 해서 지금 닥친 고난과 환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은 계속됩니다. 상황이 변하지 않을 수도 더욱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평강은 외부적인 평화보다는 내면적인 평화를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고난 가운데서 받는 기도의 응답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의뢰하면 고난이 해결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고 말을 합니다. 아직 그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시편 69편을 보면 다윗은 억울하게 고통받는 자신의 상황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탄식하고 간구하면서 자신의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을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음에도 그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과 기도와 찬양이 나올 수 있습니까? 반대로 왜 우리에게는 이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기도응답을 나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주셔야지 응답받은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고 믿는 것은 그 상황이 당장 없어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버틸 수 있는 힘과 인내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께서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 배경이 이렇습니다.
이 찬송은 호레이쇼 스패포드가 쓴 찬송입니다. 호레이쇼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장로교회 장로였습니다. 1871년에 그와 그의 아내는 시카고에 일어난 대 화재로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 1873년 11월에는 자신의 아내 애너가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호레이쇼는 일이 있어서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2월 2일에 그의 아내로 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홀로 살아남았음” 아내와 아이들이 탄 배가 영국 여객선과 부딪쳐서 바라에 가라 앉은 것입니다. 딸 넷이 죽고 아내 애너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호레이쇼는 영국에 자신의 아내를 데리러 가는 배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하며 쓴 시가 바로 이 찬양의 가사 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고난 넘어에 있는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시간을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새는 알을 깨기 위해서 알 안에서 아직 여물지도 않은 부리로 딱딱한 껍질을 두드립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세상을 보지도 못한 새에게는 그 시간이 고통과 고난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밖에서 껍질을 대신 깨 주면 그 새는 너무나도 편하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거치지 못한 새는 너무나도 약해서 세상에 나와서 금방 병에 걸려 죽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냥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상처 없이 깨끗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를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고난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이 바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울증이 심한 분과 상담을 오랜 기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이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이 마음과 생각이었습니다. 평소에 잘 지내다가 갑자기 안좋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제어가 안되고 그것이 마음과 몸 까지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과 어려움이 오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마음과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지켜낼 수 있고 버텨내고 인내 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십니다.
이렇게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지각은 시각, 촉각, 감각, 청각, 미각 등의 모든 신경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독수리는 시각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독수리의 시력은 5.0입니다. 30미터의 상공에서도 지상의 조그만 씨앗까지 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뛰어난 감각을 가진 것들 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고난, 그 가운데 신음하고 흘리는 모든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악한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탄식과 염려가 아니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끊임없이 아뢰는 것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상황이 바뀌지 않고 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고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아뢰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의지함으로 필요에만 급급한 기도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안 가운데 거하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은혜를 소유하며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헨리 나우웬 이라는 사람이 서커스단에서 공중 곡예사들이 우아하게 공중을 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 그들을 만나서 비결을 물어 보았습니다.
곡예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비결은 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향해 나아갈 때 나는 그냥 팔을 뻗고 그가 나를 붙잡아서 안전하게 반대편으로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최악의 실수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 붙잡아 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의 팔을 붙잡으려 한다면 그 사람의 팔목이 부러지거나 내 팔목이 부러지고 맙니다. 공중을 나는 사람은 붙잡아 주는 사람을 믿고 팔을 뻗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팔을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팔을 뻗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빌립보 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고난 가운데서 누구를 의뢰하며 신뢰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한다고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여건과 처지와 환경은 고난 가운데 있었고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으며 이 고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답답함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상황과 환경이라는 바람에 언제 꺾일지 모르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며 고난에 대해 더욱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고난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붙잡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 진급하며 졸업하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에게도 앞으로의 삶 속에서 광야의 길을 걷는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히 하나님만 붙잡고 신뢰하는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처럼 매일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심으로 바울의 이 고백이 진정으로 나의 것, 나의 신앙, 나의 믿음, 나의 고백이 되는 은혜와 감사의 삶이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