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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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한 절의 말씀으로 오늘 모이신 다양한 분들에게 몇 가지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한 절의 말씀이지만 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내까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그를 맞이한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번역에) 우리가 읽은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라는 기록은 영접한다는 내용과 믿는다는 내용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런 내용을 잘 담은 말씀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3:20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예수님은 활동하던 당시에도 사람들이 만나기를 거부하는 세리나 죄인들이라고 불리는 이들과 식사를 자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1–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영접한다는 것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면 누구세요’하고 문을 열어보지 않습니까? 마치 여러분을 찾아온 이웃을 맞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2천전 팔레스타인 땅 지금의 예루살렘과 하마스가 전쟁을 치루는 곳에서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지금 보이지 않는 예수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두고 영접한다는 것과 그 이름을 믿는 것은 같은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쉽게는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같이 식사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또한 관계가 분명하다면 왜 어렵겠습니까? 한편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다음에 식사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 내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지친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밥 한 번 살께’, 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믿음의 관계인 신뢰를 쌓고 싶은 것이죠. 즉 믿음은 신뢰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먼저 읽었던 누가복음의 이야기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라는 말씀에 보니 함께 식사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색한 사이는 정말 ‘밥 만 먹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식사하면서 듣는 말씀만큼 좋은 교제의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어떤 경우는 어색했는데 식사하면 이야기하니 선입견이 풀리기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을 알 때도 있습니다.
믿는다. 신뢰한다는 것은 찰나의 깨달음을 통해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는 여러분의 삶에 다양하게 다가오는 ‘문을 두드리는’ 과정을 통해 찾아 옵니다.
어떤 이는 아들이 목회자가 되어서 오랜 시간 동안 교회 출석을 하지 않다가 오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삶의 고난을 경험하면서 자연으로 떠나 자연인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질문하고자 교회를 찾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사진)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결코 강제로 강압적으로 열어 버리지 않습니다. ‘두드린다’고 그리고 ‘내 말을 듣고’는 여러분께서 ‘열어도 되겠다’고 판단할 때까지 기다리신 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껏 여러분이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 가끔 교회를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이렇게 주님께서 강압적이신 분이 아니시며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시며 내 음성 듣기를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렇게 말하고 기다려도 답답한 자녀나, 친구 그리고 부모를 두고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의 관계로 더 이상 불편해는 것만이라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두 번째, 또 하나는 영접과 믿는 것 즉 신뢰가 같은 말이라면 그 대상이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입니다. 왜 예수 일까요? 성경에 중요한 표현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1:2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하나님의 사자가 직접 전해준 이름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이름에 담긴 놀라운 예수의 사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부모로 부터 이름을 받습니다. 이는 창세로부터 사람의 기원으로 올라가면 그 자녀에게 이름과 이름이 갖는 의미를 전하는 부모의 가장 흔한 이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가장 쉽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2:20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여러분들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비록 심오한 의미가 없더라도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바람을 담기 마련입니다’
조금더 살펴보면 그렇게 자기의 이름 값을 산 사람들 반면 그렇지 못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그렇게 살지 못했다’라고 고백할 때가 있죠. 이것이 죄입니다. 자녀가 범법자가 되어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그 바람대로 살아내지 못한 마음의 깊은 돌이킴이 있다면 하나님께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그들의 죄에서 구원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살기를 원했던 바람에서 벗어난 ‘죄’의 상태에서 구원하기 위해 주신 이름이 예수 입니다.
마태복음 1:22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즉 태어날 때 주의 사자의 말뿐만 아니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즉 죄를 범한 이후부터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계속해서 예수께서 태어나실 사건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사건을 말씀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어떠한 사명을 감당하실지 말씀하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때론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게 왜 그랬니’, ‘꼭 말을 안들어 사고를 쳐요’ 라고 말이죠. 부모인 우리는 이렇게 말해서 또 자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런 상황에 있던 성경에 어떤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5:18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하고 전재산을 모아 아버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먼 나라’로 떠나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사업을 해보려다 쫄딱 망한 아들입니다. 누가 그를 돕겠습니다. 오히려 돈을 탐내는 이들만 모여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전 재산을 말아 먹고 흔한 말로 ‘빈대도 낯짝이 있지’ 결국 부모를 생각하며 하는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자식을 받아 주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서 그리는 아버지는 누가복음 15:20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중요한 표현은 ‘측은히 여겨’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런 고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21절에도 누가복음 15:21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스스로를 아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아들의 신분을 빼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사랑을 독생자 예수를 통해 나타냈습니다.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심판이 없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3:18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지 않는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상태’입니다. 형벌이 유예 되었을 뿐이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9:27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낯선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른 사람의 자녀가 될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좋은 의미보다 나쁜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도 예전에 양반과 같은 제도 아래에서 서자 출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 어떤 나라보다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영향 아래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앞서 누가복음의 한 아들이 아버지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시나요? ‘먼 나라’로 갔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3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첫 번째 ‘재물을 다 모아’ 나름 철두철미 했죠. 두 번째 ‘먼 나라에 가’ 입니다. 아버지의 영향이 없는 곳에 가려는 것입니다. 아들의 모든 일은 아버지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유명한 영화 대사 중 이런 말을 들어 보셨나요?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짧은 영화의 대사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이 없는 곳에서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고립에 빠졌을 때 아버지의 집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5:17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의 영향 아래 있는 품꾼 조차 누리는 풍족함을 아들이지만 누릴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야 말로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딱 그만큼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풍족하게 주시는 것을 ‘자녀’의 관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가장 큰 권세이자 특권입니다. 자녀는 모든 것을 갖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은 자녀에게 전해줄 유산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어떤 관계셨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요한복음 3:35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그래서 예수께서는 받아 누리는 특권만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17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일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요한복음 5:20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는 자녀가 한 일을 크게 말하지 않습니까? 비록 어릴지라도 아버지야 말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향하여 마태복음 3:17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1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아들이신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종의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친히 보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12절 제일 앞에 ‘그러나’는 단어로 시작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왜냐하면 요한복음 1:11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늘 자신만만해 하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께서 오셨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고 받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찾아오신 예수를 거절한다면 우리 역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심판만을 바라보는 것은 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어쩔수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 마음에 ‘식사하면 즐거움이 가득차 있듯’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오는 자와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24:3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하자 출애굽기 24:11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이라 불리는 자들과 함께 식사하듯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낮은 자세로 본을 보이시면 마태복음 26:26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먹고 마시는 즐거운 시간이 우리에게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규칙을 정하고 맞고 틀림으로 저와 여러분을 계속해서 판단하고 규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듯, 예수를 직접 먹고 마시는 영접의 놀라운 손길을 붙잡으시고 오늘 교회에게 허락된 함께 먹고 마시는 놀라운 친교에 참여하심으로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