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계명 - 질투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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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계명 – 질투하시는 하나님
말씀 : 출 20:1-6절
오늘은 ‘십계명 세 번째 시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지체와 인사할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립시다. 이번 한 주가 우리 주님만을 사랑하며 따라가는 믿음의 삶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지난 주에는 저와 첫 번째 계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제 1계명이 뭐였죠? 따라해보겠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한번 더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여러분 한 주 간 이 계명대로 사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차지 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결혼 언약이라고 배웠죠. 결혼언약을 맺은 부부 사이에는 제3자가 끼어들서는 결코 안됩니다. 그것은 언약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결혼을 해놓고, 외도하는 것은 배우자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지금 뭐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하는데요, 이건 형사법, 즉 감옥에 가는 형량만 없어진 것이지, 배우자가 민사소송을 걸게 되면,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이것은 물질적인 보상을 넘어서, 한 사람에게 평생 동안 가장 심각한 상처를 주는 행위가 외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결혼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이 결혼 관계에 우상이 끼어들면 그것은 배신이요 영적 외도입니다.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을 선택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랑하는 정산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살펴볼 계명은 제 2계명입니다. 따라해보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한번 더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원래 이 계명은 더 긴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핵심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 2계명은 1계명과 맥을 같이합니다.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제 1계명은 참된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나눕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해야 하며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제 2계명은 참된 예배와 잘못된 예배 즉 우상숭배를 나누고 있습니다.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랑해야 된다는, 즉 예배의 대상, 우리의 사랑의 대상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면, 제 2계명은 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예배하는 방법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어떻게 예배해야 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옳은 방법대로 예배해야 하며 사랑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제 2계명에 내용에 보면, 우상이 무엇입니까? 돌이나 쇠나 금이나 은이나 흙이나 나무를 깎고 주조하고 자르고 빚어서 형상이 있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상은, 이 땅의 피조물들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우주나 해나 달이나, 별이나 사자나, 용이나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우상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출애굽기에 등장한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2:4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 내용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간 지냈는데요, 백성들이 긴 시간동안 내려오지 않으니깐, 불안해서 모세의 형 아론보고,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요청합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금을 거두어서, 뭘 만들었어요?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말씀에 보니깐,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게 뭐라는거에요? 이 신이 바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는거에요.
애굽 땅에서 누가 인도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했잖아요. 그런데요. 이 금송아지가 다른 존재라는게 아니라, 이 송아지가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거에요. 지금 모세라는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니깐, 뭘 요구한거에요?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요, 이 형상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거에요. 왜 하필 하나님의 모양이 송아지라고 생각했을까요?
다음 그림을 보시면요, 이제 히브리어라는 글자인데요, 구약성경이 기록된 글자입니다. 그 히브리어 가장 첫 알파벳이 바로 ‘알렙’이라는 알파벳인데요. 이게 왜 이런 글자가 되었는지 소개하는거에요. 이게 나중에 라틴어로 넘어오면서 영어로 넘어오면서 A가 된거에요. 이 알렙은 황소, 뿔을 모티브로 한 문자인거에요. 알렙이라는 글자는, 가장 첫 번째 글자로, 창조주, ,주인, 우두머리를 뜻하고요, 결국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이 알렙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형상이 뭐에요? 송아지, 소였다는겁니다.
결국은 생각해내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낸게 고작 자기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재료인 뭐요? 금으로, 금은 없어지지 않잖아요. 영원의 상징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소의 모양을 만들어 냈다는거에요. 그들은 그 송아지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했다고 생각한게 아니에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그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소라는 형상을 빌려서 만들어놓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섬겼다는 거에요.
이것은 아주 유사하게 나중에 또 이런 범죄가 일어납니다. 열왕기상 12:27-29절 말씀인데요 한번 읽어볼게요.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건국되게 되는데요. 초대왕이 사울 왕이었고, 그 다음에 다윗, 그 다음에 솔로몬 왕이 통치를 했습니다. 3대까지는 이스라엘은 한 나라였어요. 그런데요 솔로몬 다음 왕 때에는,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게 되요, 남유다, 북이스라엘 이렇게 두 나라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남유다는 르호보암이라는 왕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라는 왕이 통치하게 되요. 근데 나라가 나뉘어지니깐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여로보암이 걱정거리가 생긴거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게 남쪽에 있는거에요. 그니깐 명절날만 되면 불안한거에요. 북쪽 사람들이 남쪽에 내려가서 안올까봐 말이에요. 그래서 뭘 만들어요? 북이스라엘의 가장 북쪽과 남쪽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게 하나님이라고 섬기라고 한거에요.
우상을 섬긴다는건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금송아지가 하나님이 아니라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 형상을 만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에요.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며 섬길 때에, 형상을 만드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금 봐보십시오. 4절 보세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물속에 있는 것,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 섬기지 말라고 가르치세요. 즉 이 2계명에서 엄격하게 금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섬길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이렇게 사람들은 우상,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사람이라는게 이 시각적인 것에 굉장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게 중요합니까 안중요합니까? 중요해요. 시각적인게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요. 그래서 세상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하여서, 온갖 장치를 통하여 메시지를 주잖아요. 어떤 사람은 심지어, 눈에 보이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본 것만 믿어 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대부분의 종교들을 보면요, 늘 어떤 형상을 만듭니다. 그게 왜냐면, 시각적인게 사람들에게 중요하고요. 그 마음은 자기가 섬기는 것을 형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욕심을 채워줄 형상을 만듭니다. 사람은 형상을 통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를 표현하고, 능력을 표현하길 원해요. 유명절에 가보신적이 있으시죠. 거기엔 뭐가 있습니까? 불상이 있어요. 불상이 크면 클수록 유명하잖아요. 전남 강진에, 남미륵사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이 있는데요, 36m 아파트 12층 높이의 불상이 있다고 합니다.
어찌됐건 이런 불상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이기에, 이런 불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욕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깐, 다 뭔 눈에 보이는 크고 좋은 우상들이 널려 있는거에요. 그리고 그게 신이라고 섬기니깐 혹 하는거죠. 자기들은 하나님 모양으로 만든 우상들이 없는데, 눈에 보이 걸 가지고 신이라고 하니깐, 진짜처럼 보이는거죠.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형상을 만들어서라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다면 좋은거 아닐까요? 천안의 한국기독교기념관에 높이 30m가 넘는 예수상을 세우려는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이런게 오히려 좋은게 아닐까요? 아니라는거에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뭐냐면, 따라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다”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에, 형상으로 표현될 수가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라는 의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하신 분이시고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은 이 땅의 피조물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무한하신 하나님을, 도대체 어떤 형상을 통해서 만들어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형상이 있으신 분이 아니세요.
디모데전서 6:16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어요. 그래야 하나님의 격에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어디에도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세요.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불꽃 같은 눈동자, 그러면 눈이 있다는걸까요? 하나님의 손, 팔, 귀, 발 이런 내용들이 등장해요.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눈과 귀와 손과 팔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친근한 표현으로 사용한 문장들인거에요.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지키고 계신다. 그분의 팔로 붙들고 계신다. 그만큼 세세하고 따스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현인 것이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형상으로도, 자신을 우상화하여 섬기는 것을 금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형상도, 하나님을 대체하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상숭배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배의 원칙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에만 그치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거에요.
여러분 우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세요? 왜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할까요? 오늘 본문 4절 전반절만 봅시다. 우상의 본질이 뭐에요? “너를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아주 근본적인 이유는 나를 위한 것이에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따라해보겠습니다. ‘우상숭배는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여러분 이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상의 본질은 여기에 있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섬기는거요. 그들은 똑같이 자기들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요 그들의 마음의 내면이 무엇이에요?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좋은 방법으로,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겼다는거에요.
오늘날도 똑같이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다른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 내면이 뭐에요? 나를 위하여, 내 가족을 위하여, 자기 소원을 이루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게 우상숭배라는거에요. 하나님이 나의 안녕을 위한,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쉽게 말하면 나를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질 때,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는겁니다.
하나님을 이런 가증한 예배를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누구의 제사가 열납되었습니까?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어요.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니깐, 너무나 화가나고 분했습니다. 그 질투로 인하여 동생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을 때 왜 그가 그토록 화를 내며 동생을 죽여버렸을까요?
그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제사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 내면에 진심어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제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면서요.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우상을 철저하게 give and take에요. 주고 받음입니다. 사람들이 왜 우상을 섬길까요? 진짜 그 우상을 위해서 섬길까요? 아니에요.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만큼보다는 나에게 더 복을 달라는 의미로 우상을 섬깁니다. 이게 우상의 본질이에요.
수능철만 되면, 새해만 되면, 왜이렇게 절간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할까요? 평소에는 가지도 않다가 말이에요. 내가 이만큼 정성을 보일테니깐, 내 자녀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는거아니에요? 이게 give and take에요. 신년에 가서 내가 이렇게 복돈도 내고 정성도 보일테니깐, 올한해 대박나게 해달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절간에 가는거에요. 철저하게 나를 위하여, 우상과 거래를 하는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도 이렇게 대하는 마음들이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는거에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질 않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를 할 수가 없는분이에요. 왜요? 이미 우리가 무엇을 드려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세요. 과연 우리가 무엇을 드려야 그 사랑을,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애초에 거래가 성립이 안되는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런데요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우상처럼 그분을 섬기려 한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기가 찰 것 같아요. 오늘 말씀 5절 후반절과 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거에요. 여러분 질투라는 감정을 느껴본적이 있으십니까? 질투는 어떨 때 일어나요? 사랑하면 일어나는거에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질투가 심해지는거에요. 질투가 뭔가 유치한 표현 같습니까? 아니에요. 이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는거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뭣처럼 여겨요?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 나 이거 이만큼 해줄테니깐, 이만큼 해주세요. 이 따위로 생각한다면 하나님 안에 뭐가 일어나는거에요? 질투가 일어나는거에요. 내가 널 얼만큼 사랑했는데,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하냐는거에요.
6절에 보세요. 우상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정반대인거에요. 우상처럼 하나님을 섬겨선 안됩니다. 우상은 철저한 계산 관계로, give and take의 관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제발 복비 내는 것처럼 헌금하지 마십시오. 헌금의 유일한 정신은 감사입니다. 감사 없이 헌금하지 마세요. 어떤 소원이나 기도의 제목 좋습니다. 헌금말고 기도로 하십시오. 이만큼 정성을 보였으니깐 이거 해달라고 하는건 아닙니다. 차라리 미리 감사하세요. 그 기도제목처럼 이루어주실 것에 미리 감사해서 헌금하세요. 자식들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가정을 위해서 미리 감사해서 헌금하세요.
이런 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는거에요. 과연 나라는 존재 때문에, 예수님을 내어주실 정도로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인가 정말로 깊이 생각해보셔야해요.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이번 한주의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삶이 아니라,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처럼, 주님을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여 오늘 말씀대로, 천 대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복된 모든 성도님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