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막 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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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넘겨준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안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결박하고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을가요? 그 이유는 그들에게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극도로 미워해서 죽이려고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넘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가서 심문을 받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며 그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총독에게 끌고간 대제사장들은 여러가지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여기서 여러가지로 번역된 헬라어는 ‘많이’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어떤 내용으로 고소했는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으며, 자기가 왕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다닌다는 이유로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가 보면 우리가 한가지를 깨닫게 되는데요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넘겨준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0절은 그 이유를 시기라고 정확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명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과 가르침을 베풀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그때마다 명성은 점점더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논쟁들은 예수님의 명예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공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공격에 재치있게 대응하여, 사람들은 더욱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종교지도자들은 반대로 더욱 더 권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명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를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시킵니다.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그때 빌라도가 군중을 향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다는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줍니다.
이 당시 로마총독들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민란을 방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총독이라면 식민지에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런 일에 실패한다면 중간에 본국으로 압송을 당하거나 불명예스럽게 그 자리에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리의 소리에 빌라도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라리 그냥 죄가 없어보이지만 이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자기의 자리를 보신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허락합니다.
이런 빌라도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주저없이 비겁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빌라도의 모습은 비겁함 그 자체입니다. 총독을 넘어서 재판관의 자리라면 당연히 정의를 추구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데, 빌라도는 자기의 자리에 연연하며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선고를 해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과거 판결에 대해 재심이라는 것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군사정권시절에 잘못된 판결들이 속속 뒤집히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나라를 철권통치하던 시기에 법관들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정권이 무서워서 때로는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수십년의 징역형을 내렸는데,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세월이 한참 지나서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보면 그 선고를 내린 법관들의 비겁함을 후세에서 증명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요즘에도 비일비재 합니다. 우리 주변에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참는 비겁함이 있고, 정의롭지 않은 일을 하는데도 그 일을 지적하지 못하는 비겁함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학생들의 경우 왕따 당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비겁함이 있고, 때로는 자기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죄악에 눈을 감는 그런 비겁함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빌라도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빌라도의 모습은 우리는 빌라도처럼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비겁한 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정의롭지 못하고 공의롭지 못하며 자기 자리에 연연하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을 게의치 않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작년에 살펴본 아모스서를 보면 재판이 공의롭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분개하시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의 재판과들은 돈을 받고 재판을 굽게하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잘못된 판결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의 모습은 비겁함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비겁함을 얼마나 미워하시는 지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의로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