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3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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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진리를 위할 뿐
오직 진리를 위할 뿐
여러분 오늘도 이 금요일에 시간 함께 만나 반갑습니다. 지난 한주간을 살아내느라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오늘 이 예배의 시간을 통해 각자의 어려움들을 내려놓고 주님께 크신 위로의 능력을 힘입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고린도후서 말씀을 나눌텐데요, 오늘로써 마지막 내용을 함께 보게 됩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죠.
그렇다면 바울이 마지막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떤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했을까요.
말씀 첫구절을 보면 성도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2가지 행동인데요, 어떤 것일까요?
바로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하래요. 어떤 것에 대해서? 바로 믿음에 대해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너희가 지금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점검해보아라는 것이죠.
왜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는 계속 고린도후서 말씀을 나눴기 때문에 어느정도 이제 알 수 있을거에요.
바로 지난 말씀까지 바울이 열심히 이야기했던 내용과 관련이 있는데요, 바울이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했죠?
바로 자신의 사도성을 놓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약함을 자랑했었죠.
그렇게 자신의 사도성, 즉 자신의 사도라는 직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근본이 있는 자리임을 증명을 합니다.
그러자 이제 바울은 그 이후로 성도들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열심히 자랑해야 했었던 것도 결과적으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이야기들을 너무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었잖아요.
그렇기에 바울은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바라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뭐라고 하죠? 예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 너희가 스스로 모르냐, 그러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다!
지금 바울이 한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너희가 지금 돌아봤는데 예수님 없는 것 같아? 그러면 너는 지옥갈거야! 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고린도교회가 자신이 사역했던 장소이며, 여러차례 방문한 곳이기에 성도들 역시 복음 안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5절 하반절의 이야기는 무엇이냐, 너희가 이미 잘 알지않냐,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느냐, 그거 모르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들이기에 여기에 있을 수 없지, 있다면 다 알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6절에서 우리가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 너희가 스스로 잘 알기를 바란다. 라고 말을 한 것이죠.
그리고 뒤이은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구합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기를 구한 것이죠.
왜 그렇기를 바랐을까요? 그것은 뒤이은 내용에 등장하죠. 바울의 무리가 옳은 자라는 것이 나타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더라도, 오히려 자신들이 버림 받은 자들 같더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실 성도들이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냐면, 그동안 성도들을 가르쳤던 바울과 그의 일행이 잘못 사역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사역하며 여러 거짓 선생들이 공격이 있고,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기는 등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바울의 권면을 따라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행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사실 바울로서는 성도들이 잘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마음,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도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저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있기를 바라는 단지 그 한가지 뿐이었던 것이죠.
심지어는 자신들이 이때껏 했던 모든 사역들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 속에서 버림받은 자, 즉 자신들이 거짓이라고 오해를 받더라도 오로지 성도들이 선하게 존재하는 것 그것만을 바란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바울의 이 이야기에 꽤나 감명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이전까지 고린도전후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이 고린도교회를 사역하며 겪었던 수많은 수모들을 보았잖아요.
바울은 열심히 교회를 위해 사역하는데, 몇몇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사역에 자꾸 이상한 짓들을 하는거에요. 그러면서 자신을 이상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죠.
현대사회로 맞춰본다면 소위 말하는 인터넷 마녀사냥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신이 의도했던 것이나 생각했던 것이 아닌데, 몇몇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진심으로 행했던 것들이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 상황에 있다면 어떻겠어요? 저같으면 어떻게든 해서 제 명예를 회복하고자 할거에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명예를 찾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성 증명하려고 애쓴 것은요? 바울이 사도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보았지만, 당장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이 교회와 성도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자 자신을 부득이하게 자랑하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의 모든 행동들은 오로지 교회와 성도, 그리고 그들에게 전할 복음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이어지는 7절에서부터 그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해요? 자신은 진리를 거슬러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오직 진리만을 전한 것 뿐이다.
무슨 이야기죠? 자신이 그렇게 행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 이외에 다른 것을 전할 수는 없으니, 오로지 진리를 온전하게 전하기 위해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바울이 기도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약하더라도 너희가 복음으로 강한 것을 기뻐하고, 그렇게 하여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다른 어떤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복음과 그것을 통해 일어설 교회만이 그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높이 세워지는 것? 그런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죠.
마지막으로 바울은 10절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이렇게 기록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렇게 떠나 있을 때 편지로 써야 나중에 대면할 때 너희가 악하지 않고 선한 행실에 서 있어서 괜히 사도의 권한으로 교회를 벌하고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13장 1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던 지난 2번의 시간, 그리고 더 나아가 곧 방문하게될 3번째 방문 전까지 고린도교회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교회가 서로 분쟁을 하기도 하였으며, 바울이 공격당하기도 하였고, 이런 여러 일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방문했을 때,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또한 그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들을 꾸짖거나 벌할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자신이 오랜기간 사역한 사역지의 귀한 어린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들을 모두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던 바울이기에 괜시리 방문했을 때 눈쌀을 찌푸리면서 교회를 벌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랑만이 가득하기를 바랐던 것이죠.
우리는 여기까지 말씀 속에서 바울의 사도성, 바울의 리더십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감당했기에, 충분히 그들을 책망할 수 있고, 그들에게 벌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진리를 벗어난 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본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여러번 책망을 하기도 하였죠.
오늘 우리가 읽은 13장 말씀의 시작부분을 보아도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바울은 강한 리더십을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을 사랑이라고 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기에, 그는 자신의 성도들을 정말로 사랑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어떤 명예나 이런 것들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까지도 바울은 성도들을 걱정하였습니다.
자신이 고통받고 모욕을 당하는 것들보다도, 교회가 거짓 선생들에게 넘어가거나, 악한 세력에게 핍박을 받거나 하여 교회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바울은 가장 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말을 안하니, 다들 바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이죠.
아마 바울이 미련하게 자랑한 것도 그러한 측면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대단하고, 엄청나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 또한 어쩌면, 우리가 바울이 행했던 사역을 모두 확인할 수 있기에, 그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 신학이 완성되고, 정말 먼곳까지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평가인지도 모릅니다.
당장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면, 유명하기는 한데, 실상 만나보면 별것 없어보이는 그 사람에 대해 대단하다는 평가를 할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들 역시도 거짓 교사들의 말에 속아 그를 폄하하고 그렇지는 않았을까요?
오늘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하면서 한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껏 어떤 모습으로 사역을 해왔나요? 바울과 같이 온전히 진리를 전하기 위한 사역을 했나요? 아니면 겸사겸사 나의 명예와 명성도 올리고, 취할 것도 취하는 사역을 해왔나요?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에이 그건 바울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요? 저는 그정도가 아니라서 그렇게 못해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바울이 정말 능력이 대단해서 그렇게 행했던 것일까요?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8절에 뭐라고 하고 있나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진리만을 위한다고 말하죠.
바울은 그저 진리를 향해 열심히 달려갔을 뿐입니다. 주님이 주신 진리가 너무나도 좋으니 그것을 전하기를 바랐고, 그것을 하다보니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 안에서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우니, 진리만을 바라보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고, 자신이 진리를 모른다고 하니, 자신이 아는 진리를 다시금 이야기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그저 진리밖에 몰랐던 바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진리만을 보고 따라가다보니 그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올바른 일들이 각 성도들에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바울이란 사람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이 대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혼동합니다. 마치 사람이 대단하고,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는 경우는 정말로 극히 드뭅니다. 자연을 움직이시거나 하지 않는 이상 볼 수가 없죠.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하는 사람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는 사람은 물론 대단한 사람도 있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기드온은 어떤 사람이었죠? 이방민족이 두려워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어땠죠? 지금으로 치면 사기꾼이었습니다. 베드로는요? 물고기만 잡던 사람이었죠, 마태는요? 세상에서 로마 앞잡이라고 욕먹던 세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부족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주님의 큰일들을 충분히 이루십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죠. 학식도 있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랬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주님은 아마 어떤 사람을 세우더라도 바울과 같이 행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거에요?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죠.
첫째로는 우리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보았을 때 너무 부족해보일 수도 있을겁니다.
당장 중간고사도 못봤는데 뭔 주의일을 해? 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주님은 반드시 그 일을 행하십니다. 놀랍게 역사하신다는 것이죠.
당장 여러분들의 과거만 보아도 그걸 깨달을 수 있어요.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모든 일이 다 할만했나요? 모든 일들을 이지모드 하듯이 수월하게 했나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거에요.
이걸 어떻게 하지? 싶은 일들, 아예 처음 겪는 일들, 그렇기에 벽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그걸로 인해 그냥 쓰러졌나요? 극복을 못하고 무너졌나요? 아마 그 답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누구든 첫 경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 해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지만, 두번째, 세번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첫 경험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랍게도 그 첫경험을 잘 이루어내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물론 여러분들의 능력도 반영이 되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 일들을 능숙하게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일들을 통해 주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끌어주신다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들에게는, 아니 여러분들에게 함께하시는 주님께는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충분히 사용하셔서 주의 크신 일들, 어쩌면 ‘저런 일을 어떻게 해’라고 말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버림 받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5절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계신 것 아시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우리가 첫번째로, 우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나눴는데요, 두번째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주님께서 이끌어주셔서 이루어낸 일들이 본인 스스로 혼자 행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보조바퀴가 있어서 자전거를 탄건데, 원래 그거 없어도 잘 탄 것처럼 착각을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보조바퀴 없이 호기롭게 두발자전거를 타고 막 아무렇게나 자전거를 타면 어떻게 되죠?
반드시 사고가 나게 되어있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계시기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주님이 없으면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함을 잃은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울이죠.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된다는 두려움에 숨어있던 사람이었지만, 점차 승리를 얻자 그것에 도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다윗을 질투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안에 애초에 죄가 많기에, 언제라도 그 틈을 파고들어 죄를 지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역의 자리에 더욱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께서 이끄시기에 행했던 일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복들이 마치 자신이라는 존재에게만 주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나만이 할 수 있어, 내가 아니면 안돼 이런 생각들이 지배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더욱 커지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공동체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 공동체를 내가 만든 공동체, 나를 따르는 성도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제가 앞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고린도교회가 바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나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가 와도, 야고보가 와도 주님의 뜻하심을 따라 교회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던 것이죠. 자신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이고, 교회 공동체를 보였던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겸손함을 잃어버려선 안됩니다. 어떤 자리에 서던, 그것이 준장이던, 리더이건, 교사나 멘토이건, 이 자리는 내가 했기 때문에 잘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것이지만, 주님께서 특별히 나에게 기회를 주셔서 이끌어주신 것이다.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는 나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사역의 자리 안에서 주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이죠. 우리 스스로도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공동체의 일원들 역시도 스스로를 잘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말씀에서 고린도교회가 몇 사람의 거짓된 이야기에 현혹이 되어 넘어갔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왜 고린도교회가 그런 이들에게 쉽게 넘어갔을까요? 물론 그들이 하도 자신들을 자랑하니까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가장 큰 것은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제일 하지 못하는 일,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 한국교회가 제일 하지 못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셨기에, 기본적으로 사회를 이루려 합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좋아함이라는 것은 쉽게 신뢰로 변화합니다. 물론 신뢰라는 것은 좋은 감정이죠. 그것이 있기에 우리가 사회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신뢰라는 것도 넘어서는 안될 선이 존재합니다. 바로 신뢰를 넘어서서 신앙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해야 할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입니다. 왜죠?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기 때문이겠죠. 다시 말하자면,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완전해요. 그렇다는 것은 결국 죄를 짓고 잘못 행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그러한 자리에 처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죠.
결국 사람을 신앙한다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들고 살아간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중 많은 이들이 그 시한폭탄을 들고 살아갑니다. 특별히 교회에서도 그 목사님, 그 찬양리더만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있죠.
그런데 만약 그 시한폭탄이 터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로 나뉘겠죠. 완벽하게 실망하여 아예 하나님을 떠나게 되거나, 아니면 폭탄이 터진 자체를 부정하여 사람에게 더 매달리거나.
둘중에 좋은 방향은 없습니다. 물론 그 방향에서 다시 돌아올 수는 있겠지만, 엄청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겠어요? 신앙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 있는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습니다. 왜 동일한 하나님인데 그 사람에게 매달리나요.
그 사람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것도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하신 동일하신 분이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신데 왜 엉뚱하게 사람에 매달리냐는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같은 물리 선생님한테 배우면서도 전교1등이 잘하는 것 같으니까 그 친구한테만 가서 매달린다는 거에요. 그냥 선생님께 물어보면 되는 것을.
그러니 여러분들, 신앙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행할 수 없습니다. 혼자선 말이죠. 그렇기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럼 대체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냐? 그냥 바보가 되시면 됩니다. 오직 진리만 바라보는 바보.
우리가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분들을 말할까요? 그냥 하나만 계속 바라보고 하나만 계속 행하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대로 행하면 됩니다. 진리에 바보가 되어, 우리 안에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걸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못한다는 일들도 진리가 있으니까 무식하게 도전하고, 남들이 잘한다고 할때도 진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오로지 주님의 진리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9절의 말씀처럼 주님과 함께 온전해질 수 있고, 우리 스스로는 약하지만, 결과적으로 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진리에 바보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오직 예수 뿐이네